두산 베어스 오명진. 사진=두산 베어스 제공
"코치님께서 '너 지금 이렇게 스윙이 좋은데, 왜 자신을 못 믿냐'더라. 그래서 '날 한 번 믿어보자' '투수와 정말로 싸워보자'고 생각했다."
오명진(24·두산 베어스)이 그를 믿어주는 새로운 지원군을 얻었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오명진 자신이다.
두산은 27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5 KBO리그 정규시즌 롯데 자이언츠와 홈경기를 13-4로 크게 이겼다. 이날 승리로 최근 2연패를 끊은 두산은 12승 16패를 기록, 7위 KIA 타이거즈와 승차를 1경기로 유지했다.
13안타 11볼넷 11득점을 폭발시킨 타선을 이끈 건 단연 오명진이었다. 이날 6번 타자·2루수로 선발 출전한 오명진은 결승 만루홈런을 포함해 4타수 3안타(1홈런) 1볼넷 6타점 2득점 맹타를 휘둘렀다. 홈런 외 안타도 모두 장타일 정도로 생산성이 빼어났다. 또 두산이 세 차례 빅 이닝을 만드는 과정에 모두 관여하는 '알짜' 활약이기도 했다.
2025 KB0리그 프로야구 두산베어스와 롯데자이언츠의 경기가 27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다. 4회말 1사 만루 오명진이 만루홈런를 치고 달려나가고 있다. 잠실=김민규 기자 mgkim1@edaily.co.kr
특히 백미는 4회 말이었다. 1사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오명진은 롯데 왼손 투수 송재영의 초구 슬라이더 실투를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고, 이는 그대로 왼쪽 담장을 넘어가는 그랜드슬램이 됐다. 오명진의 홈런이 나오기 전까지 0-0 팽팽했던 경기는 순식간에 타격전으로 바뀌었고, 오명진은 5회 말 2루타 1득점, 7회 말 2루타 2타점 활약으로 두산이 압승을 거두는 데 선봉장이 됐다.
오명진 개인에겐 데뷔 후 첫 1군 홈런이기도 했다. 2020년 프로 입단 후 안타가 없었던 그는 올해 시범경기에서 타율 0.407을 기록하며 개막전 2루수가 됐다. 2루수 경쟁에서 이겨냈지만 정작 개막 후 기대를 채우지 못했다. 시즌 처음이자 데뷔 첫 안타는 개막 후 일주일 이상 지난 2일 키움 히어로즈전에서야 나왔다. 10일 한화 이글스전까지 타율 0.111 부진 끝에 11일 2군에 내려갔다.
2025 KB0리그 프로야구 두산베어스와 롯데자이언츠의 경기가 27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렸다. 7회말 2사 만루 오명진이 2타점 적시 2루타를 치고 있다 잠실=김민규 기자 mgkim1@edaily.co.kr 담금질의 시간이 끝나고 있다. 23일 1군에 올라온 오명진은 시범경기 때 보여준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중이다. 27일까지 총 5경기에 출전한 그는 무려 9안타를 때려냈다. 1경기만 빼면 모두 멀티히트 이상을 기록했다.
시범경기 때부터 기회를 부여했던 이승엽 두산 감독은 27일 경기 후 "오늘은 단연 오명진의 날이었다. 팀 동료들과 팬들이 바라던 첫 홈런을 결승 만루홈런으로 때려내며 담대함을 보여줬다"며 "이후에도 들뜨지 않고 꾸준히 적시타를 때려낸 점도 칭찬하고 싶다. 첫 홈런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전했다.
누구보다 오명진 본인의 감동이 크다. 경기 후 만난 오명진은 입단 동기 박지훈이 뿌리는 물 세례를 받은 후 더그아웃에서 취재진과 만났다. 오명진은 만루 홈런 때 상황에 대해 "맞자마자 홈런이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오명진은 "(선행 타자인) 김재환 선배님이 나갈 때 '칠 수 있겠다' 싶었다"며 "벤치에서 감독님도 날 믿어주셨고, 박석민 타격 코치님도 슬라이더를 노려보라고 하셨다. 슬라이더가 딱 와서 넘어갈 수 있었다"고 돌아봤다. 그는 "2군에서 참 열심히 했다. 2군에서 열심히 하면 1군에서도 기회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것 같아 기쁘다"고 전했다.
2군을 다녀오면서 오명진은 몸이 아닌 마음을 재조정했다. 그는 "기술보다는 멘털을 재정비했다. 1군에서 내가 못했는데도 감독님께서 날 믿어주셨다. 코치님께서 좋은 말씀을 계속 해주셨다"며 "2군에 갔을 때도 타격 코치님께서 '너 지금 이렇게 스윙이 좋은데, 왜 자신을 못 믿냐'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고 떠올렸다.
오명진은 "그래서 '한 번 날 믿어보자' '나랑 싸우지 말고 투수와 정말로 싸워보자'고 생각했다. 그게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어쩌면 오명진 스스로 믿지 않았을 자신을 믿어준 게 이승엽 감독과 이영수, 박석민, 이도형 1·2군 타격 코치들이었다. 오명진은 1군에 돌아온 뒤 활약에 대해 "내가 엄청 잘했다기보단, 감독님께서 믿어주신 게 크다"며 "감독님의 믿음, 타격 코치님들의 많은 도움, 또 이영수 코치님의 멘털 조언도 도움이 됐다"고 감사를 전했다.
이승엽 감독의 인터뷰 때는 베테랑에 대한 질책보단, 어린 선수들의 실책엔 따가운 한 마디가 관심을 모으곤 한다. 오명진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팬분들께서 감독님이 (차갑다고) 생각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조금 아프다"며 "언론과 인터뷰에서 그렇게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저희에게 정말 좋은 말을 많이 해주신다. 말보다도 우선은 믿어주시는 게 선수로서 느껴진다. 감독님 덕분에 좋은 기회를 받았고, 성적도 내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인생 경기'에 대한 설렘은 하루로 끝이다. 오명진은 "오늘 같은 날은 1년에 몇 번 없지 않나"라며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남은 시즌 분투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