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1500m 결승이 열린 지난 21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 레이스 중반까지 후미에 있던 최민정(28)과 김길리(22·이상 성남시청)가 나란히 1·2위로 치고 나갔다.
결승선까지 한 바퀴 반을 남긴 상황. 코너를 돌던 김길리가 특유의 스피드를 앞세워 인코스를 파고들었다. 김길리가 추월하려는 찰나, 선두를 달리던 최민정이 스트로크를 지체했다. 왼발을 뻗는 타이밍에 자신의 왼쪽으로 붙은 후배의 앞길을 막지 않은 것이다. 김길리는 가속력을 이용해 선두로 나섰다.
둘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순위는 바뀌지 않았다. 다른 선수들은 ‘인코스 파이터’ 김길리와 ‘아웃코스 마스터’ 최민정을 비집고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올림픽 개인전 첫 금메달을 딴 김길리가 가장 먼저 찾아가 끌어안은 이는 이 종목 올림픽 3연패에 실패한 최민정이었다. 한국 쇼트트랙의 세대교체를 알리는 순간, 최민정은 금빛보다 환한 미소로 김길리의 우승을 축하했다.
21일(한국시간) 이탈리아 밀라노 아이스스케이팅 아레나에서 열린 2026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여자 1500m 결승에서 김길리가 최민정(왼쪽)을 추월하는 장면. 연합뉴스 금메달을 딴 김길리를 안아주는 최민정(왼쪽). 연합뉴스 앞서 다른 3명의 선수와 여자 계주 3000m 금메달을 합작했던 최민정과 김길리는 개인전 1500m에서는 라이벌로 경쟁했다. 경기 후 김길리가 말한 것처럼 작전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두 선수는 단체전이라도 하는 듯 치밀하고 단단한 팀워크를 보여줬다. ‘쇼트트랙 여제’ 최민정이 흔든 판에서 김길리기 ‘람보르길리’처럼 질주했다.
하이라이트는 세 바퀴를 앞둔 상황이었다. 선두를 달리던 커린 스토더드(미국)를 최민정이 아웃코스에서, 김길리가 인코스에서 동시에 추월했다. 두 선수의 협공에 샌드위치가 된 스토더드는 옴짝달싹 못했다.
이때까지 선두였던 최민정은 역사적인 골인까지 불과 두 바퀴만 남겨두고 있었다. 2018년 평창올림픽부터 시작된 그의 레이스에 이만한 마침표가 없을 것이다. 올림피언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앞두고, 그는 인코스를 파고든 후배를 위해 살짝 엇박자를 냈다.
금메달을 욕심내지 않는 선수는 없다. 엘리트 스포츠맨에겐 ‘이겨야 한다’는 강박이 곧 본능이다. ‘무리했다가 둘 다 넘어지면 큰일이다’ ‘격차가 벌어지면 재역전하기 어려우니 지금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이성적 생각은 뼛속까지 새겨진 승리욕을 앞서기 어렵다. 그러나 최민정은 물 흐르듯 곁을 내줬다. 장강의 뒷물결이 앞물결을 밀어냈다. 아니, 앞물결이 뒷물결의 길을 열어주었다.
레이스가 끝나고 알려졌지만, 최민정은 밀라노 대회를 끝으로 ‘올림픽 은퇴’를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금메달을 목에 건 뒤 이 소식을 들은 김길리가 펑펑 울었다. 자신만이 알고 있었던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했기에 더 뭉클했다.
최민정-김길리의 합주로 한국 대표팀은 대회 세 번째 금메달을 따냈다. 네덜란드·캐나다·미국 등의 약진으로 인해 위축된 한국 쇼트트랙의 저력을 두 선수가 다시 보여줬다. 체력에서 밀리고, 이젠 기술적 우위도 갖기 어려운 상황에서 최민정-김길리가 3000m 계주와 1500m 개인 결승에서 보여준 하모니는 다른 팀이 결코 모방할 수 없다.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쇼트트랙은 선수단 내부 갈등에 신음했다. 또한 국제대회에서는 석연찮은 판정으로 실격패를 당한 게 여러 번이다. 여자 대표팀 주장 최민정이 어떤 마음으로 ‘엇박 스트로크’를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레이스에서 은메달를 딴 최민정은 한국 올림픽 역사상 최다 메달리스트(7개, 금 4개·은 3개)로 기록됐다. 삐끗하지 않았다면, 동·하계올림픽 사상 최다 금 타이기록(양궁 김우진 금 5개)과 동계올림픽 사상 최대 금 신기록까지 세웠을 터다. 그는 더 많은 기록, 부와 명예를 욕심내지 않았다.
최민정은 “계주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려고 많이 노력했다. 언니들이 잘 이끌어주고, 어린 선수들이 잘 따라와 줘서 좋은 결과가 나와서 뿌듯하다”고 소감을 말했다. 개인전도 단체전처럼 치른 선배다운 맺음말이었다.
그가 올림픽에서 세운 기록도 대단했지만, 마지막 레이스에서 우리에게 남긴 기억은 더 강렬했다. 굿바이, 여제.
시상대 맨 위에서 환호하는 김길리를 최민정이 축하하는 모습. 연합뉴스 마지막 올림픽 레이스에서 은메달을 딴 최민정. 팬들에게 인사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