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쇼박스 그동안 한국 사극에서 ‘단종’은 눈물의 상징이었다.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지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우리가 반드시 ‘지켜줘야만 했던’ 유약한 소년 왕이었다. 이는 오랜 시간 대중이 공유해온 단종의 전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왕과 사는 남자’(이하 ‘왕사남’)는 이 오래된 공식을 기분 좋게 뒤집는다.
지난 2월 4일 개봉한 ‘왕사남’은 1457년 마을의 부흥을 위해 유배지를 자처한 촌장 엄흥도(유해진)와 유배된 어린 선왕 단종 이홍위(박지훈)의 이야기를 다뤘다.
30일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왕사남’은 전날 18만 8448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정상을 유지했다. 누적관객수는 1561만 5946명이다. 개봉 이후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며 장기 흥행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된다.
사진제공=쇼박스 단종의 이미지는 1956년 영화 ‘단종애사’ 이후 약 70년간 정형화돼 왔다. 영화 ‘관상’, 드라마 ‘한명회’, ‘인수대비’ 등 대부분의 작품은 단종이라는 인물보다 ‘역사적 승리자’ 수양대군의 야망에 초점을 맞췄다. 권력 투쟁의 중심은 언제나 수양대군이었고, 단종은 그에 대비되는 비극적 존재로 기능하는 데 그쳤다. 그 결과 단종은 비극 속에서 희생되는 수동적인 존재로 소비되곤 했다.
하지만 ‘왕사남’ 속 단종은 다르다. 유배지에서도 체념하지 않고 스스로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단순히 시대의 희생양으로 머무르지 않고, 제한된 상황 속에서도 선택과 의지를 드러내는 주체적인 인물로 재해석된 것이다.
사진제공=쇼박스 특히 단종 이홍위 역을 맡은 배우 박지훈은 삶을 포기한 채 거식에 빠졌던 초반부터, 서서히 눈빛을 되찾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의지를 다져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감정의 진폭을 절제된 연기로 풀어내며 캐릭터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 결과, ‘능동적 단종’이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완성됐다.
사진출처=네이버웹툰 이같은 해석의 변화는 스크린을 넘어 콘텐츠 시장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최근에는 특정 작품의 서사나 캐릭터 해석이 다른 콘텐츠 소비로 이어지는 ‘연쇄 소비’ 현상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왕사남’ 역시 그 흐름의 중심에 섰다.
네이버웹툰에 따르면 영화 개봉 이후 단종을 소재로 한 웹툰 ‘환생했더니 단종의 보모나인’의 조회수는 ‘왕사남’ 개봉 전 동일기간 대비 약 3배 증가했다. 동명의 웹소설 다운로드 수도 3배가량 늘었다. 댓글창에는 “‘왕사남’ 보고 찾아왔다”, “‘왕사남’ 후유증 치료하러 왔다”, “‘왕사남’ 보고 왔더니 이게 뜬다” 등 반응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보모나인과 단종의 서사가 영화 속 ‘주체적인 단종’ 이미지와 맞물리며 강력한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김성수 대중문화 평론가는 “단종은 늘 안타까운 인물로 소비돼 왔지만, ‘왕사남’은 그에게 ‘스스로 운명을 바꾸려는 의지’를 부여했다”며 “관객들은 더 이상 불쌍하기만 한 왕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기 삶의 주인이 되려는 현대적 인간상에 열광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기존 단종의 비극을 다룬 사극이 권력의 승패에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개인의 선택과 내면에 초점을 맞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