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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축구

[프로축구 40년 베스트11 ①] 이동국 “히딩크 감독님 감사합니다”

일간스포츠가 프로축구 40주년을 맞아 전문가 패널의 설문을 토대로 올타임 베스트11을 선정했다. 일간스포츠는 직접 뽑은 40년 최고의 선수 11명 명단을 소개한 후, 한 명씩 자세하게 소개하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1983년 프로축구 수퍼리그 출범 이후 2023년 현재 피치 위를 누비는 현역 선수까지 다양한 각 포지션 최고의 선수들을 만나본다. <편집자주>548경기 228골 77도움. ‘라이언 킹’ 이동국(44)이 프로 생활 23년간 K리그에서 세운 기록이다. 그는 프로축구 출범 40년 역사상 최다 득점자이며 두 번째로 많은 어시스트를 올렸다. 리그 MVP만 4회, 시즌 베스트11에는 5회 선정됐다. 그의 팀도 화려했다. 전북 현대의 왕조 구축에 구심점 역할을 했다. 2009년 전주성에 입성한 이동국은 전북에서만 리그 우승 8회를 이끌었다. 모두 핵심 공격수로 활약하며 이룬 성과라 더욱 값지다. 무엇보다 이동국은 나이를 먹을수록 농익은 기량을 과시하며 K리그 최고의 공격수로 우뚝 섰다. 베스트11 선정에 참여한 전문가 10인 모두 그에게 한자리를 할애하는 데 이견이 없었던 이유다. 지난달 본지와 인천 송도의 이동국FC에서 만난 이동국은 “(40주년 베스트11에) 뽑아주셨으니 감사할 뿐이다. 황선홍, 최용수, 김도훈 등 너무 쟁쟁한 선배님들이 계시는데, 오랫동안 해외에 나가 계셔서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K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공격수이기에 표가 온 것 같다. K리그의 수준이 아시아 정상이고, 약한 무대가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20년 가까이 시즌당 10골 이상 넣었다는 것에서 좋게 봐주신 것 같다”고 덧붙였다.1998년 19세 나이로 포항 스틸러스에서 프로에 데뷔한 이동국은 K리그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수려한 외모에 실력까지 겸비한 그는 미디어와 팬으로부터 높은 관심을 받았다. 그에게는 최고의 한 해였다. 탄탄한 기량을 지닌 이동국은 당시 차범근 축구대표팀 감독의 부름을 받아 1998 프랑스 월드컵에 참가, 네덜란드전 중거리 슛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11골을 넣은 그해 K리그 신인상도 그의 차지였다. 수많은 개인상 중 이동국이 가장 값지게 생각하는 상이다. 당시에는 현재의 영플레이어상과 달리 데뷔 시즌에만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탄탄대로를 걸을 것만 같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당시 이동국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히딩크 감독이 원하는 스타일과도 거리가 있었다는 평이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아픔이 축구화 끈을 더욱 조여 매게 한 자극제가 됐다. 그때를 떠올린 이동국은 “히딩크 감독에게 감사하다. 2002 월드컵 때 탈락시켜줘서 이때까지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때의 자극이 30세가 넘어서 더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던 힘이 된 것 같다. 당시 내가 월드컵을 뛰었다면 그 세계에 빠져서 (선수 생활이) 일찍 끝나지 않았을까 싶다. 히딩크 감독은 축구 외의 인생에서도 큰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 준 감독”이라고 했다.시련을 이겨낸 이동국은 상무에서 군 문제를 해결한 후 2007년 1월 미들즈브러(잉글랜드)에 입단했다. 2001년 베르더 브레멘(독일) 입성 이후 야심 차게 내민 두 번째 유럽 리그 도전장이었다. 그러나 이동국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 1년 반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K리그에 복귀한 그는 전설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특히 전북 이적 첫해인 2009년, 리그 32경기에 나서 22골을 몰아치며 우승을 이끌었다. 2011년에는 29경기에 출전해 15도움을 올리며 도움왕을 차지했다. 두 해가 본인이 생각하는 전성기다. 특히 2009시즌을 23년 프로 생활 중 최고의 해로 꼽았다. 이동국은 “(2009년에) 프로 생활을 하면서 처음으로 우승컵을 들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동국은 끝난 선수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때 전북도 첫 (리그) 우승이었고, 나도 첫 득점왕을 탔다. 전북 팬들도 나와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전북이 강팀으로 올라갈 수 있는 시작점이었던 것 같다”며 “(전성기였던 저 때는) ‘오늘 골을 넣겠다’가 아니라 ‘오늘은 몇 골을 넣을까’란 생각으로 경기장에 들어갔다. 컨디션이 좋았고, 정신적으로도 강했다”고 기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동국이 잘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기심’이 없었던 덕이다. 어느 정도의 욕심은 골잡이들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그러나 이동국은 “나는 골 욕심을 가장 내지 않았던 선수일 수도 있다. 찬스가 와도 나보다 (동료의) 득점 확률이 높다면 주려고 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골도 잘 넣어야 하지만, 도움도 잘 줘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밝혔다. ‘롱런’도 높게 평가받는 이유다. K리그 통산 548경기에 출전한 이동국은 필드 플레이어 최다 출장 기록 보유자다. 이동국보다 많이 뛴 선수는 골키퍼 김병지(706경기)와 김영광(성남FC·588경기)뿐이다. 이동국은 “30대에 접어들면 ‘정상에 올라섰을 때 은퇴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내가 축구화를 신고 축구를 시작했듯 은퇴 시점은 남이 정해주는 게 아니라고 봤다. 매 시즌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가졌고, 내려놓을 게 없다 보니 더 무서워졌다”며 “굳이 피해 가듯 은퇴하는 것보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했다. ‘100세 시대’에 왜 선수들은 똑같이 30대 초반에 은퇴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공격수로서 불멸의 기록을 쓴 이동국은 10년 뒤인 프로축구 출범 50주년 베스트11에도 뽑힐 공산이 크다. 그는 “(요즘에는) 잘하는 선수들이 다 해외에 진출하니 (나보다 좋은 기록을 남길 공격수가) 안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면서도 “나보다 더 잘하는 선수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김희웅 기자 2023.02.20 06:33
예능

'골 때리는 외박' 오나미, "박민과 9월 4일 결혼" 발표

개그우먼 오나미가 SBS 예능프로그램 ‘골 때리는 외박’에서 결혼 날짜를 공개했다. 오나미는 지난 29일 '골 때리는 외박'에서 공개된 다음 주 예고편에서 오는 9월 4일 박민과의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고 최초로 밝혔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에 대한 궁금증을 한껏 끌어올렸다. 이날 방송에서 오나미는 김민경과 소속 팀 FC 개벤져스와 함께 네 번째 손님으로 출연해 유쾌한 목포 여행의 포문을 열었다. 이날 김민경과 오나미는 오프닝부터 높은 텐션으로 등장해 남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40대 이상과 30대로 나눠 차량에 탑승하라는 제작진의 말에 희비가 엇갈린 두 사람은 극과 극 토크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김민경은 조혜련과 이수근의 ‘변기 토크’에 경악하며 “30대 차 가고 싶다. 연애 얘기하고 결혼 얘기하겠지?”라며 차진 리액션으로 재미를 더했다. 반면 30대 멤버들과 함께 케이블카에 탑승한 오나미는 남자친구 박민과의 러브 스토리로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다. 오나미는 “이런 데이트를 진짜 못 해봤다. 코로나 시기여서 차나 드라이브를 주로 했다”며 케이블카를 핑크빛으로 가득 채웠다. 극한의 오션뷰를 자랑하는 숙소에 도착한 김민경과 오나미는 김병지 감독이 깜짝 등장하자 반색하며 기쁨을 드러냈다. 김민경은 목포의 9미로 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에 격한 반응을 보였으며, 만장일치로 퀴즈를 통과해야 먹을 수 있다는 규칙에 남다른 의욕을 불태웠다. 하지만 첫 문제부터 실패하자 어느 음식 하나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는 미련 가득한 모습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가까스로 일심동체 퀴즈에 성공한 이들은 5미 반상을 쟁취했고, 김민경은 꽃게무침을 먹기 위해 비닐장갑까지 장착하고 게살을 섬세하게 음미하며 ‘먹장군’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김민경은 “최후의 마지막 한 끼를 먹으라면 뭘 먹고 싶냐”는 이수근의 질문에 신인 시절 먹었던 간장 계란밥을 꼽아 공감을 이끌었다. 대학로 극단에서 신인 시절을 보냈던 이들은 식권 한 장 한 장을 아껴가며 개그우먼 꿈을 키웠던 시절을 추억했다. 특히 김민경은 “당시 코너가 없으니까 무대에 올라갈 수 없었다. 이름 앞에 개그우먼만 붙었지, 이전과 똑같은 삶이었다”며 신인 시절을 회상했다. 이어 “모든 걸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을 때 수근 선배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셨다. ‘그냥 내비둬’ 코너가 1회부터 너무 잘 됐고 누군가를 재밌게 해주고 개그우먼을 꿈꾸는구나 싶었다”고 말해 안방극장을 뭉클하게 했다. 이어 이진호는 오나미에게 “남자친구가 민경 누나 자세 교정을 해주면 기분 나쁘냐”고 물어 ‘깻잎 논쟁’ 대신 ‘자세 코치 논쟁’이 벌어졌다. 오나미는 흔쾌히 괜찮다고 답했지만, 이수근이 “‘구척장신’ 코치로 간다고 하면?”이라고 되묻자 안 된다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 폭소케 했다. 박정선 기자 2022.06.30 10:00
축구

롤모델 김병지 꽁지머리, 그대로 따라하는 조현우

프로축구 K리그1 울산 현대는 개막 후 2연승으로 선두다. 두 경기에서 7득점, 2실점 했다. 올 시즌 대구FC에서 이적한 골키퍼 조현우(29·사진)가 뒷문을 지킨다. 조현우는 울산 합류 직후 뒷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그는 20일 “김병지 선배님한테 영감을 얻었다. 좋은 (우승) 기운을 받아 팀에 도움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꽁지머리는 1990년대 국가대표 골키퍼였던 김병지(50)의 트레이드 마크다. 앞머리는 짧고 뒷머리는 긴 ‘울프컷’인데, ‘김병지 컷’으로도 불린다. 가수 GD와 지코 등이 따라 했다. 시대를 앞서간 김병지는 꽁지머리였던 1996년 울산의 첫 우승을 이끌었다. 김병지는 “(조)현우가 ‘김병지 컷’을 따라 해 영광이다. 울산이 지난해 준우승해 아쉬웠다. 몸과 마음을 다잡아 우승하겠다는 현우의 의지가 보인다”고 말했다. 김병지는 23세 때부터 꽁지머리를 고수했다. 그는 “당시 무명이었는데,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 긴 머리를 염색했다. 많은 분이 사랑해줬다. 현우도 팬을 즐겁게 하기 위해 내린 결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김병지는 “현우 뒷머리를 보니 아직 멀었다. 3개월은 더 길러야 한다. 그때면 무관중이 아니라, 관중 앞에서 뛸 수 있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조현우는 7세였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김병지 모습을 보며 골키퍼가 되기로 결심했다. 조현우는 “골키퍼가 주목받기 어려운 포지션인데, 김병지 선배님은 멋진 세이브로 존재감을 보여줬다. 저도 그렇게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에서 승리를 지켜낸 조현우는 지난 시즌 뒤 김병지가 뛰었던 울산으로 이적했다. 김병지는 “울산은 김보경을 전북에 보냈지만, 이청용을 보강했다. 양 팀 전력은 비슷하다. 울산은 조현우로 인해 플러스가 됐다. 위기관리 능력이 탁월한 현우가 승점 15~20은 더 벌어줄 거다. 울산이 전북에 2경기 차로 앞서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어 “1996년 우승 때보다 현 멤버가 더 좋다. 고재욱 당시 감독처럼 김도훈 감독도 덕장이다. 이청용 등 팀을 위해 헌신하는 선수도 많다. 그리고 골문을 현우가 지킨다”고 우승 예상 이유를 댔다. 조현우는 “두 경기밖에 치르지 않아 우승을 말하긴 이르다. 앞으로 이런 경기력과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2020.05.21 08:42
축구

월드컵 최고 스타로 떠오른 조현우 "손흥민과 꼭 한번 맞붙고 싶다"

"내가 대단한 선수가 아닌데, 이렇게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K리그에서 좋은 모습으로 보답하겠습니다."한국 축구대표팀 골키퍼 조현우(27·대구 FC)가 2018 러시아월드컵을 마친 소감을 밝혔다. 4일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조현우는 이번 월드컵에서 최고의 스타다. 그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 독일과 조별리그 3차전에서 눈부신 선방으로 2-0 승리를 이끌었다. 독일은 슈팅 26개를 몰아쳤다.조현우는 처음부터 신태용호의 주전 수문장이 아니었다. 지난 2015년 11월 첫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지난해 11월 세르비아와 친선경기에서 김승규 대신 출전한 것이 A매치 데뷔전이었다. 첫 국제 무대를 경험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세계 최고의 '거미손'으로 통하는 마누엘 노이어가 버틴 독일전에서 당당히 최우수선수(MOM)를 차지했다. 외신도 조현우의 선방을 극찬했다. K리그 팬들 사이에선 이미 실력을 검증받았다. 2013년 대구 FC에 입단한 조현우는 2부리그로 강등됐던 팀을 1부리그로 이끌었다. 조현우는 2015~2016년 2년 연속 2부리그 '베스트 골키퍼'로 선정됐다. 그는 지난해 1부리그에 복귀해서도 뛰어난 선방을 이어 갔다. 팬들은 이런 그를 '대 헤아(대구의 데 헤아)'라고 부른다. 스페인 대표팀 수문자 '데 헤아'처럼 머리를 노랗게 염색해 닭벼슬처럼 세우고 경기에 나서기 때문이다. '대구의 데 헤아'에서 '한국의 데 헤아'로 자리매김한 조현우는 오는 8일 FC 서울과 K리그1(1부리그) 경기에서 다시 팬들 앞에 선다. - 인기를 실감하나."귀국하는 순간부터 환호해 주셔서 믿기지 않았다. 주말은 가족과 함께 쉬었고, 그 이후부터 일정에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감사하게 생각한다. 길을 걸어가도 팬들이 알아봐 주셔서 너무 행복하다. '조현우'라는 이름을 알아 주셔서 설렌다." - CF 제의가 쏟아진다는데."자세한 것은 구단, 에이전트와 얘기해 봐야 한다. 확실한 것은 구단과 미팅해 봐야 할 것 같다. CF를 찍는다면 K리그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연합뉴스- 1차전 선발 얘기를 들은 것은 언제인가."스웨덴전 당일 호텔에서 경기장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알았다. 스웨덴이 공중볼에 강한 팀이기 때문에 강점이 있다는 생각에 준비를 많이 했다. 실점했지만 좋은 선방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신태용 감독님도 그런 흐름을 다음 경기에서 이어 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또 투입한 것 같다. 비록 16강엔 가지 못했지만,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한다." - 월드컵 준비는 어떻게 했나."수비수들의 부담을 덜기 위해 더 과감한 플레이를 할 수 있도록 훈련했다. 공중볼을 잡는 범위를 넓히기 위한 훈련이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팬들이 원하는 골키퍼의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잠을 줄여 가며 상대 골잡이들을 분석했다." - 사실 대표팀의 '신데렐라'인데, 언제부터 주전 욕심이 생겼나."처음 대표팀에 뽑혔을 땐, 뽑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A매치를 관전하고, 또 직접 뛰면서 나만의 플레이를 팬들에게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조현우를 알릴 수 있어서 좋았고, 한국 골키퍼도 유럽에서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보여 줘서 기분 좋다. 내가 아니더라도 한국 골키퍼들의 미래는 밝다." - 월드컵 성적에 대한 아쉬움이 있을 것 같다."아시아팀들이 '졸고' 들어가는 것도 있는 것 같다. 이번엔 오히려 독일이 더 긴장하고 있더라. 아시아팀들이 유럽에 나가서 더 경험을 쌓았으면 좋겠다. 선수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고 들어가면 전반전부터 좋은 경기력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하게 된 이유와 의미는."아내가 이 머리를 좋아한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대구 FC 팬들도 정말 좋아하고, 따라해 주시는 분도 많다. 은퇴하기 전까지 이 머리를 고수할 것 같다. 스페인 대표팀 골키퍼 다비드 데 헤아 선수를 좋아하기 때문에 따라 하려고 했다." - 골키퍼 중 롤 모델은."김병지 선배님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자신감을 배우고 싶다. 배포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번에 맞대결한 독일의 마누엘 노이어의 플레이를 보고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을 칭찬하고 싶다." - 유럽 진출에 대한 욕심은."유럽 진출은 민감하지만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꼭 나가서 보여 주고 싶다. 대한민국 골키퍼로서 유럽에 진출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다." - 유럽 진출을 위해 보완해야 할 점은."리그에서 경기를 준비하는 것처럼 월드컵을 준비했다. 리그에서 하는 것처럼 경기했다.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셔서 영광이다. 유럽 진출을 준비한다면, 트렌드에 맞는 발이 좋아야 하고 공중볼도 더 좋아야 한다. 팬들이 내 체형이 말랐다는 말을 많이 해 주시는데, 이 순간부터 체력을 보완하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다." - 아내에게 고맙다는 얘기를 참 많이 했다."대구 FC가 K리그2로 강등됐을 때 힘들었는데 늘 '최고'라고 말해 줬다. 스웨덴전 전날 아내에게 내 마음과 부담감을 털어놓은 손편지를 적고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기도 했다. 팬들도 감사하지만, 내조해 준 아내에게 많이 고맙다. 내게 너무 큰 존재다." - 아시안게임 와일드카드로 뽑힌다는 말이 있는데."연락을 따로 받지 않았다. 좋은 기회가 생긴다면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병역에 대해선 28세 때 상무에 간다는 계획을 세워 두고 있다. 아시안게임에 가지 않아도 상무에서 잘해서 팬들에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상무에 다녀온 뒤 내가 꿈꿔 왔던 큰 무대도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김학범 감독님이 많은 관심을 가져 주셨으면 좋겠다." - A매치 데뷔까지 오래 걸렸다. 희망의 아이콘이다."선수가 경기장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크다. 경기에 못 뛴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표팀에서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을 때도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고 열심히 준비했다. 힘든 상황을 즐겼으면 좋겠다. 후배들도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 K리그에서 붙고 싶은 공격수는."문선민이 두렵다. 많은 것을 가졌기 때문에 기대되는 선수다. 맞붙어 보고 싶은 선수는 손흥민과 꼭 한번 맞붙고 싶다. 손흥민이 은퇴하기 전에 꼭 K리그에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FC 서울과 경기가 있는데, 많은 분들이 찾아 주실 것 같다. 월드컵은 잊어버리고, 월드컵 못지않은 경기력을 보여 드릴 것이다. 준비도 잘할 것이다." 피주영 기자 2018.07.05 06:00
연예

박하선, 루게릭병 환우 돕기 성금 기부

배우 박하선이 루게릭병으로 고통받는 환우들을 돕는데 동참했다.박하선은 최근 서경덕 교수로부터 아이스버킷챌린지를 지목 당한 후 ALS 협회에 성금을 기부하는 것으로 마음을 전했다.그는 자신의 SNS에 '서경덕 교수님으로부터 뜻 있는 일에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참여합니다. 저는 한국 ALS 협회에 기부하는 것으로 ALS 아이스버킷챌린지를 대신하려고 합니다. 루게릭병 환우 여러분께 진심으로 힘과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더불어 이적 선배님·이진희 대표님·윤상현 오라버님과 좋은 일 함께 이어가고 싶습니다'고 세 명을 지목했다.박하선은 루게릭병 환우돕기에 동참한 데 이어 서경덕 교수·축구선수 김병지 등과 손잡고 이달 열리는 인천아시아경기대회 홍보에 나섰다. 유랑단을 구성해 중국·네팔·인도·캄보디아·파키스탄 등 아시아 16개국 50여명을 초청한 후 아시아경기대회 주경기장·모래내시장·차이나타운·월미도·송도 등 인천의 주요 명물을 소개한다. 단순하게 관광지를 소개하는 수준이 아니라 비빔밥·막걸리 등을 함께 먹으며 한식을 알리고 인천과 한국을 전세계에 알릴 계획이다.김진석 기자 superjs@joongang.co.kr 2014.09.01 08:12
축구

‘원클럽맨’ 신화용, 포항에서만 10시즌…김병지 뛰어 넘다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에서만 10시즌을 뛴 '원클럽맨 수문장' 신화용(30)이 40년 구단 역사에 아로새겨질 의미 있는 기록을 세웠다. 신화용은 지난 3일 대구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대구 FC와의 K리그 클래식 원정경기에서 포항의 무실점 승리(1-0)를 이끌었다. 포항에서 세운 56번째 클린시트(무실점 경기)였다. 이를 통해 2001년부터 2006년까지 포항에서 활약한 '클럽 레전드' 김병지(43·전남)의 종전 최고 기록(55경기)을 뛰어넘었다. 2004년 프로 데뷔 이래 햇수로 10년, 경기 수로는 179경기만에 거둔 값진 기록이다. 스타로 주목받은 적은 없지만, 성실한 노력을 통해 대선배가 가지고 있던 값진 기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비가 내려 그라운드가 미끄러웠던 대구전 당일, 신화용의 선방쇼는 유독 빛났다. 대구는 총 7개의 날카로운 유효슈팅을 날렸지만 신화용이 모조리 막아냈다. 전반 39분 상대 공격수 산드로의 페널티킥을 막아낸 장면이 하이라이트였다. 신화용은 몸을 왼쪽으로 던진 상황에서도 골대 한가운데를 향하는 산드로의 슈팅을 반사적으로 쳐냈다. 신화용의 든든한 활약 속에 포항은 후반 35분 노병준(34)의 결승골로 적지에서 1-0 승리를 챙기며 울산 현대를 밀어내고 리그 선두를 탈환했다. 신화용은 이날 경기 MVP로 선정됐다.신화용은 5일 일간스포츠와 인터뷰에서 "그런 기록(한 팀 최다 무실점 기록)이 있는지 몰랐다. 많이 뿌듯하다"고 했다. 이어 "내가 처음 입단했을 때 포항의 주전 골키퍼는 김병지 선배였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우러러 보는 선배"라면서 "프로 22년차로 여전히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뿜어내시는 대선배님의 기록을 물려받아 더욱 기쁘다"며 웃었다.신화용은 2004년 포항에 입단했지만 김병지에 밀려 출장 기회를 얻지 못했다. 2006년 김병지가 서울로 이적한 이후엔 정성룡(28·수원)과의 경쟁에서 뒤졌다. 7년차였던 2009년부터 비로소 붙박이 주전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신화용은 "내가 주인공이 되려고 욕심을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지금도 그저 '결정적인 것만 집중해서 막자'는 생각으로 경기장에 들어간다"면서 "올 시즌엔 0점대 실점율을 지키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신화용은 올 시즌 17경기서 14실점(경기당 0.82골)을 기록 중이다. 김민규 기자 gangaeto@joongang.co.kr 2013.08.05 15:38
스포츠일반

은퇴하는 ‘골동품’ 이창수, 지도자의 길 걸어

국내 4대 프로스포츠 선수 중 최고령인 프로농구 창원 LG 센터 이창수(42·196㎝)가 정든 코트를 떠난다. 198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은 지 26년 만이다. 25일부터 열리는 플레이오프가 그의 마지막 무대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이창수의 별명은 '골동품'이다. 낡고 오래됐지만 여전히 소중하다는 뜻에서 강을준 LG 감독이 2년 전 지어줬다. 그는 1969년생으로 프로야구 이종범(41·KIA)·프로축구 김병지(41·경남)보다 한 살 많다. 야구는 담배를 피우거나 껌을 씹으면서도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 부담이 적다. 축구에서도 40대를 넘어 경기를 펼치는 선수는 움직임이 적은 골키퍼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창수는 좁은 코트를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는 농구에서도 가장 격렬한 골밑을 지키는 센터다. 마흔을 넘어 현역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22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창수의 표정은 밝았다. "은퇴식(20일) 때는 울컥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괜찮더라. 이제 진짜 코트를 떠날 때가 됐나보다"라며 웃었다. -26년 만에 은퇴를 앞두고 있다."은퇴 경기 날 20분 정도 뛰었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더라. 그만큼 긴장했다. 공을 잡기도 버거웠다. 다행히 상대팀(전자랜드) 선수들이 수비를 대충해 7점·5리바운드·3블록슛이나 기록했다(웃음). 팬들과 가족들 앞에서 은퇴를 선언할 때는 정말 울컥하더라. 꿈꾸는 듯한 기분이었다."-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가 생각나는가."언제였더라…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최홍묵 군산고 코치가 다가와 농구 선수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단지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였다. 일명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셈이다."-운동 신경이 좋았나보다."동네에서 농구를 즐기는 정도였다. 막상 농구팀에 들어가니 내가 제일 못하더라. 기본기가 아예 없었다. 군산고에서 2년 동안 기본기만 익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경기에 처음 투입됐다."-대학과 실업, 프로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없다. 단지 성실하다는 것뿐이다. 기록을 봐도 알지 않는가. 하지만 몸 관리를 잘한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다. B형 간염으로 쓰러졌을 때만 빼고. 사실은 아직도 한 시즌 더 뛸 수 있는 체력이다(웃음)."이창수는 1996년 B형 간염 판정을 받아 코트를 떠났다. 의사가 '농구를 그만둬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코트를 한바퀴 도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2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몸관리와 치료를 받은 끝에 1998년 극적으로 코트에 돌아왔다.-매번 주연이 아닌 조연이다. 만족하는가."농구 선수 모두 주연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팀은 혼란에 빠진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리바운드와 수비를 할 때 팀 동료가 빛난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수로 뛸 수 있지 않았나 싶다."이창수가 주전으로 뛴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상대팀 센터를 수비할 때 빛을 발한다. 리바운드·블록슛 등 궂은일을 도맡아 해낸다. 그는 프로농구 14시즌 동안 평균 11분5초를 뛰며 3.2점 1.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창수 하면 서장훈(37·전자랜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맞대결도 자주 펼쳤고, 서장훈의 목을 다치게 했다는 오해도 있다."1994년 당시 연세대에 다니던 장훈이가 우리 팀(삼성전자)과 경기에서 목을 다쳤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나 때문에 장훈이가 다쳤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당시에는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장훈이가 다칠 때 난 반대편에 있었다. 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장훈이 목 부상이 언급돼 미안할 뿐이다. 이제 이 인터뷰를 끝으로 더 이상 그 질문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실제 이창수와 서장훈은 친한 선후배 관계다. 20일 은퇴식 때도 서장훈이 코트에 나와 이창수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간스포츠 1면에 내 이름이 나왔다. 1990년 12월 중순쯤이었다. 경희대 재학 중 동국대와의 경기에서 25리바운드를 잡아내 한국 최다 기록을 세웠다. 다음날 지하철을 탔는데 내 얼굴과 이름이 1면에 나온 신문을 사람들이 보고 있더라. 깜짝 놀랐다. 아직도 집에 그 신문을 보관하고 있다. 허재·이충희 등 유명한 선배님들만 나오는 1면에 내가 나오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웃음)."-지도자가 되면 '제2의 이창수'를 키울 것인가."절대 아니다. 난 '제2의 서장훈'을 키우겠다. 철저한 관리와 프로의식, 그리고 뛰어난 실력으로 똘똘 뭉친 국보급 센터를 발굴하고 싶다. 토종 센터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선수를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다."김환 기자 &#91;hwan2@joongang.co.kr&#93; 2011.03.23 10:39
스포츠일반

‘골동품’ 이창수, 26년 만에 코트 떠난다

국내 4대 프로 스포츠 최고령 선수인 프로농구 창원 LG 센터 이창수(42·196㎝)가 정든 코트를 떠난다. 1985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농구공을 잡은 뒤 26년 만이다. 25일부터 열리는 플레이오프가 그의 마지막 무대다. 은퇴 후에는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이창수의 별명은 '골동품'이다. 낡고 오래됐지만 여전히 소중하다는 뜻에서 강을준 LG 감독이 2년 전 지어줬다. 그는 1969년생으로 프로야구 이종범(41·KIA)·프로축구 김병지(41·경남)보다 한 살 많다. 야구는 담배를 피우거나 씹어가면서도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 부담이 적다. 축구에서도 40대를 넘어 경기를 펼치는 선수는 움직임이 적은 골키퍼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창수는 좁은 코트를 쉴새없이 왔다갔다하는 농구에서도 가장 격렬한 골밑을 지키는 센터다. 마흔을 넘어 현역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22일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창수의 표정은 밝았다. "은퇴식(20일) 때는 울컥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괜찮더라. 이제 진짜 코트를 떠날 때가 됐나보다"라며 웃었다. -26년 만에 은퇴를 앞두고 있다."은퇴 경기 날 20분 정도 뛰었는데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더라. 그만큼 긴장했다. 공을 잡기도 버거웠다. 다행히 상대팀(전자랜드) 선수들이 수비를 대충해 7점·5리바운드·3블록슛이나 기록했다(웃음). 팬들과 가족들 앞에서 은퇴를 선언할 때는 정말 울컥하더라. 꿈꾸는 듯한 기분이었다."-농구를 처음 시작할 때가 생각나는가."언제였더라…너무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이었다. 친구와 길을 걷고 있었는데 최홍묵 군산고 코치가 다가와 농구 선수를 해보라고 권유했다. 단지 또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였다. 일명 '길거리 캐스팅'을 당한 셈이다."-운동 신경이 좋았나보다."동네에서 농구를 즐기는 정도였다. 막상 농구팀에 들어가니 내가 제일 못하더라. 기본기가 아예 없었다. 군산고에서 2년 동안 기본기만 익혔다. 고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경기에 처음 투입됐다."-대학과 실업, 프로팀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실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형편없다. 단지 성실하다는 것뿐이다. 기록을 봐도 알지 않는가. 하지만 몸 관리를 잘한 것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다. B형 간염으로 쓰러졌을 때만 빼고. 사실은 아직도 한 시즌 더 뛸 수 있는 체력이다(웃음)."이창수는 1996년 B형 간염 판정을 받아 코트를 떠났다. 의사가 '농구를 그만둬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코트를 한바퀴 도는 것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2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꾸준한 몸관리와 치료를 받은 끝에 1998년 극적으로 코트에 돌아왔다.-매번 주연이 아닌 조연이다. 만족하는가."농구 선수 모두 주연이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팀은 혼란에 빠진다. 내가 욕심을 버리고 리바운드와 수비를 할 때 팀 동료가 빛난다고 생각했다. 욕심을 버렸기 때문에 지금까지 선수로 뛸 수 있지 않았나 싶다."이창수가 주전 선수로 뛴 적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가치는 상대팀 센터를 수비할 때 빛을 발한다. 리바운드·블록슛 등 궂은일을 혼자서 해낸다. 그는 프로농구 14시즌 동안 평균 11분5초를 뛰며 3.2점 1.9리바운드를 기록했다. -이창수 하면 서장훈(37·전자랜드)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맞대결도 자주 펼쳤고, 서장훈의 목을 다치게 했다는 오해도 있다."1994년 당시 연세대에 다니던 장훈이가 우리 팀(삼성전자)과 경기에서 목을 다쳤다. 경기가 끝나고 나서 나 때문에 장훈이가 다쳤다는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다. 당시에는 어떻게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장훈이가 다칠 때 난 반대편에 있었다. 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장훈이 목 부상이 언급돼 미안할 뿐이다. 이제 이 인터뷰를 끝으로 더 이상 그 질문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실제 이창수와 서장훈은 친한 선후배 관계다. 20일 은퇴식 때도 서장훈이 코트에 나와 이창수에게 꽃다발을 전달했다. -선수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일간스포츠 1면에 내 이름이 나왔다. 1990년 12월 중순쯤이었다. 경희대 재학 중 동국대와 경기에서 25리바운드를 잡아내 한국 최다 기록을 세웠다. 다음날 지하철을 탔는데 내 얼굴과 이름이 1면에 나온 신문을 사람들이 보고 있더라. 깜짝 놀랐다. 아직도 집에 신문을 보관하고 있다. 허재·이충희 등 유명한 선배님들만 나오는 1면에 내가 나오다니.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웃음)."-지도자가 되면 '제2의 이창수'를 키울 것인가."절대 아니다. 난 '제2의 서장훈'을 키우겠다. 철저한 관리와 프로의식, 그리고 뛰어난 실력으로 똘똘 뭉친 국보급 센터를 발굴하고 싶다. 토종 센터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는 선수를 찾아내는 게 최종 목표다."김환 기자 &#91;hwan2@joongang.co.kr&#93; 2011.03.2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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