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야큐와 야구]이치로의 '시즌 17', 일본에선 '야구 그 이상의 존재'
‘연예계의 이치로’ ‘과학계의 이치로’.일본 매체에서 자연스레 쓰이는 수식어다. 물론 이치로는 메이저리그 데뷔 17년 차를 맞이한 스즈키 이치로(44·마이애미 말린스)를 가리킨다. 그는 일본 사회에서 야구라는 범주를 넘어선 존재로 자리 잡혀 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통산 3000안타를 달성하며 야구 인생에 또 다른 이정표를 세웠다.지난 3월 1일 스포츠 중계 채널 스카이퍼펙트 커뮤니케이션은 야구팬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이치로는 '프로야구 사상 가장 좋은 수비수' 부문 1위, '프로야구 사상 최강 타자' 부문 2위에 올랐다. 1위에는 일본 프로야구 통산 868홈런의 오 사다하루 소프트뱅크 호크스 회장이 자리했다. 홈런 타자가 아닌 이치로가 나가시마 시게오, 장훈 등 쟁쟁한 선배 강타자들을 제쳤다.제이스포츠(JSports)는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중계권사이자, 연평균 메이저리그 280여 경기를 생중계한다. 제이스포츠의 제작 PD는 “이치로는 올해로 17년째 일본 사람들이 당연히 (경기를) 챙겨 보는 존재가 됐다. 야구팬이 아니라도 이치로에 대해 물어보면 모두 한마디씩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치로의 중계는 아침 정보 프로그램 같다”며 “아침 출근, 등교를 준비하는 중에도 이치로의 경기는 그냥 TV에 그냥 나와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치로가 일본 프로야구 옛 소속팀과 맺는 관계는 많은 메이저리거를 배출하고 있는 KBO 리그에도 시사점을 준다. 이치로의 데뷔팀인 오릭스 버팔로스(당시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지금도 이치로에게 훈련 장소를 제공하며, 이치로의 이름이 새겨진 클래식 유니폼을 판매하고 있다. 홈구장 교세라돔에도 이치로를 기억하는 공간이 따로 존재할 정도다. 이 구단의 홍보담당자는 “우리 구단에서 그런 선수가 배출됐다는 것은 자랑거리”라며 “외국인 선수와 협상할 때도 '이치로가 일본에서 뛰었던 구단'이라는 타이틀을 어필한다”고 했다.실제로 효과가 있을까. 그는 “KBO 리그와 협상 중이던 선수도 이치로라는 이름을 듣고 우리 쪽으로 한층 협상이 기운 적이 있다. 효과가 있다”고 장담했다. 일본의 메이저리그 칼럼니스트 도요우라 쇼타로는 “일본을 대표하는 인물, 야구계의 시선으로만 그를 논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고 했다.지난해 6월 16일 이치로가 미·일 통산 4257안타를 때려 냈을 때 각계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아베 신조 총리를 비롯해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 일본 연예계의 대모 와다 아키코 등이 축하의 뜻을 전했다. 이치로의 위상은 야구계를 넘어섰다. 일본에서 인기 있는 '이치로 대담'이라는 콘텐트가 있다. 이치로와 일본 사회 중역들이 야구와 노력, 가치관, 기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도요타 자동차 사장인 도요타 아키오, 오릭스그룹 회장인 미야우치 요시히코 등이 '이치로 대담'에 참여한 재계 거물이다. 도요타 사장은 이치로에게 오릭스 시절 등번호 51번을 계속 사용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치로는 “그것(51번)으로 기억되는 사람인데, 바꾸는 것이 쉽지 않다”고 대답했다. 이에 도요타 사장도 “한 가지 관념을 쌓아 가는 것이 중요하다. 도요타의 크라운(자동차 브랜드)이 이치로가 생각하는 51번과 뜻을 같이한다”며 공감하기도 했다.평범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떨까? 중앙조사사는 1992년부터 ‘일본인들의 인기 스포츠’를 조사하고 있다. 올해 보고서에 따르면 ‘누구라도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부문에 이치로는 피겨스케이팅의 아사다 마오, 테니스의 니시코리 케이를 제치고 22.4%의 지지를 받아 1위에 올랐다. 야구계 인사로는 현재 최고 스타인 오타니 쇼헤이가 3.5%, 일본 야구 최대 스타로 손꼽히는 나가시마 시게오가 3.3% 득표에 그쳤다. 또 이치로는 세대별 지지율에서도 20대에서 70대까지 전 연령대 모두 1위에 올랐다. 세대를 불문하고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가 이치로였다.메이지 야스다 생명에서 실시한 신입 사원 입사 예정자들이 뽑은 '이상적인 상사 스타일'에서도 이치로가 1위에 뽑혔다. 이유는 ‘실력이 있다’는 것. 미야모토 가츠히로 간사이대학 교수는 이에 “현재 젊은이들은 상사의 무능함으로 조직이 퇴보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들에게 말 잘하는 상사, 친절함은 필요 없다. 실력적으로 어필이 된다면, 따른다 혹은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며 실력 있는 상사, 즉 이치로 같은 스타일을 따르고 싶은 일본 젊은이들의 심리가 반영돼 있다는 해석이다. 한편,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도쿄의 이시다 히토미는 “그 나이에 통산 최다 안타를 기록한 것과 여전히 미국 투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모습이 감명 깊다”고 이치로를 자랑스러워하는 이유를 함축적으로 말했다. 일본인들 사이에선 2000년대부터 야구를 즐기는 새로운 관점이 생겨났다. 바로 미국 강투수, 강타자들을 상대하는 일본 선수다. 후쿠도메 고스케, 이구치 다다히토, 가와카미 겐신 등 수많은 선수들이 도전했지만, 이치로만 살아남았다. 그는 다나카 마사히로, 다르빗슈 유, 이와쿠마 히사시 등 일본인 메이저리거들이 새롭게 ‘투입’된 뒤에도 여전히 경쟁력을 뽐내고 있다. 제이스포츠 PD에게 이치로를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했다. 그는 ‘시즌17’이라고 했다. 인기 애니메이션, 드라마가 종영하지 않고 새 시즌을 맞듯이, 이치로에게 종영 없는 또 하나의 시즌이 시작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16년 전 4월 2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하며, '시즌1'을 시작한 이치로가 이제 17번째 시즌을 맞이하고 있다. 서영원(프리랜서 라이터)
2017.04.04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