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축구는 토요일 오후 3시, 하지만 TV중계는 없다
한국 프로야구(KBO리그)의 평일 경기는 오후 6시 30분 시작한다. 7·8월 혹서기를 제외한 토요일과 일요일 경기는 보통 오후 5시 또는 2시에 열린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월·화·금요일 경기는 주로 밤에 열린다. 수요일이나 목요일 등 시리즈 마지막 날 경기는 이동시간을 고려해 보통 낮에 진행된다. 야간 경기를 하는 경우 시작 시간은 보통 오후 7시지만, 식전 행사 때문에 5~10분 정도 늦어지기도 한다. 획일적인 KBO리그와는 달리 MLB 팀들은 경기 개시 시간에 더 많은 자율성을 갖고 있다. 홈팀은 날씨, 교통 상황, 마케팅 요소 등에 따라 게임 시작 시간을 조정한다. 이에 오후 7시 20분, 7시 35분이나 8시 15분 등에 경기가 열리는 경우도 있다.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경우 보통 평일 야간 경기를 오후 7시 7분 시작했다. 하지만 2006년 편의점 세븐일레븐(7-Eleven)과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한 후, 화이트 삭스는 세븐일레븐을 의미하는 오후 7시 11분에 경기를 시작한 적도 있다.
야구와 달리 축구는 매일 경기를 할 수 없다. 현대 축구의 종주국인 잉글랜드에서 전통적으로 축구 경기가 열리는 날은 토요일이었고, 경기 시작 시간은 오후 3시였다. 왜 이 시간에 경기가 열리는 전통이 생겼을까? 이는 영국에서 1850년 제정된 공장법(Factory Act 1850)에서 기인했다. 공장법은 산업 고용 조건과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을 규제하는 법으로, 1802년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이후 수차례 개정을 거쳤다. 이후 다른 국가로도 이 법은 퍼져 나갔다. 공장법 1850은 노동자들의 토요일 근무 시간을 줄이는 데 중점을 뒀다. 이 법에 따라 오후 2시까지 모든 근로자는 토요일 근무를 마쳐야 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토요일 오후를 즐길 권리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교회는 노동자들이 술을 마시면서 토요일 오후를 흥청망청 보내는 것을 우려했다. 이에 교회는 이들에게 건강한 활동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축구 클럽 등 스포츠 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보탰다. 오후 3시는 축구 경기가 열리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이었다. 2시에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각 지역 경기장에 도착하기 충분했고, 경기가 끝난 뒤 귀가해도 너무 늦지 않았다. 오후 3시 킥 오프는 조명 시설이 없어 해가 떠 있는 시간에 경기를 마쳐야 하는 당시 시대상에 딱 어울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로써 토요일 오후 3시 킥 오프는 잉글랜드 축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영국에서 토요일 오후 2시 45분에서 5시 15분까지 TV나 인터넷으로 라이브 축구 방송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시간대를 영국에서는 ‘축구 블랙아웃(football blackout)’이라고 부른다. 많은 경기가 오후 3시에 열리지만, 중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프리미어리그(EPL)는 라이브 중계가 가능한 오후 12시 30분이나 5시 30분에 인기 있는 경기를 배치하는 경우가 많다. 얼핏 생각하기에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축구 블랙아웃 제도도 사실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 번리(Burnley) 회장이었던 봅 로드는 TV에서 축구 중계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TV 중계로 인해 팬들이 경기장에 오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특히 그는 “토요일 오후 3시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경기 같은 빅 경기가 TV에 중계되면, 하위리그 팀의 팬들은 그 경기를 보기 위해 자신들이 응원하는 클럽의 경기장을 찾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위리그 클럽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이 말은 결과적으로 맞지 않았다. 공중파에서 시작한 TV 중계는 케이블과 위성 방송을 거쳐 축구 시장과 산업을 엄청나게 성장시켰다. 하지만 1960년대 로드의 주장은 다른 클럽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에 ‘축구 블랙아웃’ 혹은 ‘3PM 블랙아웃’이라고 불리는 제도가 탄생했다.
블랙아웃은 영국 내에서 벌어지는 축구에만 해당하지 않고, 해외에서 벌어지는 경기에도 적용된다. 예를 들어 스페인 라리가의 토요일 경기는 영국 시간으로 오후 5시에 시작한다. 하지만 블랙아웃 제도 때문에 스카이 스포츠는 첫 15분은 보여주지 않고, 5시 15분부터 중계를 시작한다. 블랙아웃 제도의 효용성을 조사한 여러 연구에 의하면 토요일 오후 3시 TV 중계와 팬들이 축구장을 찾지 않는 것에는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고 한다. 아울러 블랙아웃 제도는 하위리그 팀 경기의 관중 수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혀졌다. 팬들은 경제적·시간적 이유로 자신이 응원하는 팀의 많은 경기를 TV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데, 블랙아웃 제도가 이를 막고 있는 것이다.
EPL은 세계에서 가장 상업적인 축구리그다. 유럽 주요 축구리그들도 EPL를 부러워하고 벤치마킹 한다. 하지만 영국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고 효율성이 떨어지는 블랙아웃 제도 덕분에, EPL 경기는 영국 본토보다 해외에서 더 많이 시청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4.07 0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