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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신동주 이번엔 바둑 영상…신격호·조치훈 대국 영상 공개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빚고 있는 장남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이 또 다시 아버지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공개했다. 이번 영상에는 신 총괄회장은 조치훈 9단과 담소를 나누고 바둑을 두는 모습이 담겼다.신동주 전 부회장이 운영하는 웹사이트 '롯데그룹 경영 정상화를 위한 SDJ코퍼레이션의 입장'에는 11일 '조치훈 9단, 신격호 총괄회장 방문 및 대국 영상'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해당 영상은 지난해 12월 4일 촬영됐다고 SDJ코퍼레이션은 밝혔다.영상은 1분 짜리로 첫 30초는 신 총괄회장과 조치훈 9단이 짧은 담소를 나누는 장면이고 나머지 30초에는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모습이 담겨 있다.신 총괄회장은 조치훈 9단에게 "지금 한국에서 바둑 누가 1위인가요"를 물었고 조치훈 9단은 "한국은 이세돌, 나는 많이 밑에요(순위가 낮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어디 살고 있냐'는 질문 등이 이어졌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가운데)이 조치훈 9단(오른쪽)과 바둑을 두는 모습. 신 총괄회장은 약 50년 전 당시 일본에서 바둑 유학 중이던 조치훈 9단을 만나 후원을 시작하면서 바둑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기력은 아마 4단 정도로 알려졌다.신동주 전 부회장 측은 지난 9일에는 일본어 웹사이트 '롯데 경영 정상화를 요구하는 모임'에 '롯데 창업자 신격호의 긴 인터뷰'라는 제목의 신 총괄회장 인터뷰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최근 정신건강 이상설에 휩싸인 신 총괄회장의 건재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신 총괄회장은 현재 여동생인 신정숙씨가 신청한 성년 후견인 지정 법원 심리를 받고 있다. 신 총괄회장은 지난 3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열린 심리에 예상을 깨고 직접 출석,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하지만 현재 신 총괄회장의 정신건강이 여러 정황에서 의심 받는 상황이고 올라온 영상들도 제한된 공간에서 신동주 전 부회장의 인사들로 둘러싸인 상황이라 영향력을 발휘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조은애 기자 cho.eunae@joins.com 2016.02.11 14:29
연예

조치훈·린하이펑, 최다승 최후의 승자는?

조치훈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을까. 지난 23일 일본에서 프로통산 1364승(4무 733)을 거두며 처음으로 일본 최다승 신기록을 달성한 조치훈 9단과 라이벌 린하이펑((林海峰) 9단의 끈질긴 바둑 인생이 관심을 모은다. 조치훈이 신기록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린하이펑이 1승 뒤진 상태여서 언제라도 역전이 가능하다. 두 사람의 인연은 조치훈이 만 5세로 도일한 1961년부터 시작됐다. 조치훈과 린하이펑 모두 기타니(木谷實) 9단 문하에 속했다. 린하이펑은 당시 프로기사였고, 조치훈의 첫 상대가 되어 비공식 경기를 치루었다. 조치훈이 1968년 11세 9개월의 나이로 입단에 성공해 일본기원 최연소입단 기록을 세웠고, 두 사람은 수많은 타이틀을 놓고 40년 이상 대결했다. 이후 조치훈은 일본의 3대 타이틀(기성‧명인‧본인방)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에 세 차례나 올랐으며, 일본 최다 타이틀 획득(71회), 본인방 10연패(1989년∼98년) 등 불멸의 기록을 작성했다. 현재로서는 54세인 조치훈이 68세인 린하이펑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실력이 예전만 못해 예선을 거쳐 타이틀에 도전해야 하는 입장이다. 내년 1월 둘째 주 내에 린하이펑은 한 차례, 조치훈은 두 차례 대국이 잡혀 있다. 조치훈은 31승 19패, 승률 62%로 2010년을 마무리했다.한국기원 측은 "조치훈이 유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린하이펑도 최다승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다"면서 "누군가 은퇴를 해야 일본 최다승의 주인공이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0.12.26 19:33
생활/문화

조치훈, 도일 49년 만에 日 최다승 신기록

'집념의 승부사' 조치훈이 도일 49년만에 일본 최다승 신기록을 이끌어냈다. 조치훈은 23일 일본기원에서 벌어진 제59기 왕좌(王座)전 예선에서 린한지에(林漢傑) 7단에게 189수 만에 흑 불계승을 거두며 프로통산 1364승(4무 733패)을 기록했다. 종전 최다승 기록은 린하이펑(林海峰) 9단이 보유중이었던 1363승(2무 840패)이었다. 조치훈이 일본으로 건너간 시점은 만 5세 때인 1961년. 기타니(木谷實) 9단 문하에 들어간 이후 1968년 11세 9개월의 나이로 입단에 성공해 일본기원 최연소입단 기록을 세웠다. 1968년 승단대회에서 이구치 세이지(井口精治) 초단(당시)에게 첫승을 거두었으며, 1999년 8월 38기 십단전 본선에서 야마다 기미오(山田規三生) 9단에게 불계승하며 1000승을, 2008년 6월 33기 기성전 본선리그에서 왕리청(王立誠) 9단에게 불계승하며 1300승을 달성했다. 1981년 입신(入神)에 오른 조9단은 일본의 3대 타이틀(기성‧명인‧본인방)을 동시에 석권하는 대삼관(大三冠)에 세 차례나 올랐으며, 일본 최다 타이틀 획득(71회), 본인방 10연패(1989년∼98년) 등 불멸의 기록을 작성한 바 있다. 한편 통산 최다승 세계기록은 한국의 조훈현이 9단이 보유 중인 1835승(9무 766패)이다.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0.12.24 14:09
연예

왕시 9단 2연승 "역시 속기 바둑의 달인"

중국의 강호 왕시 9단이 파죽의 2연승을 내달리며 속기 바둑의 달인임을 재확인했다.왕시 9단은 19일 중국 베이징 쿤룬호텔에서 열린 제9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에서 일본의 두 번째 선수 고노 린 9단을 맞아 240수 만에 흑 2집 반승, 전날 한국의 홍민표 6단을 꺾은 상승세를 이어갔다.이로써 한국과 중국은 각각 4명이 남은 반면 일본은 벌써 두 명이 탈락해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됐다. 현재 2라운드를 준비하고 있는 각국 대표는 이창호 9단, 목진석 9단, 조한승 9단 박영훈 9단(이상 한국), 구리 9단, 창하오 9단, 왕시 9단, 후야오 위 8단(이상 중국), 일본의 다카오 신지 9단, 요다 노리모토 9단, 야마다 시미오 9단(이상 일본) 등이다. 이들은 11월 26일부터 부산 농심호텔에서 열리는 대회 2라운드(11.26~12.2)에서 격돌하게 되는데, 한국의 두 번째 선수가 왕시 9단을 상대하게 된다. 이날 대국은 세력 대 실리의 대결로 출발했다. 왕시 9단은 굵은 말뚝을 박으며 영역을 다지는 사이 고노 9단은 발빠른 행마로 곳곳에 전초기지를 만들며 맞섰다. 고노 9단은 '지하철 바둑' '실리 바둑'의 대명사로 꼽히는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고바야시 9단은 지하철 바둑으로 1990년대 조치훈 9단과 쌍벽을 이루며 한때 일본 1~3위 기전인 기성·명인·본인방 등 3대 타이틀을 독식하는 '대삼관'을 달성하기도 했던 주인공이다. 스승의 영향을 받은 고도 9단도 짭짤한 실리 작전을 앞세워 왕시 9단의 세력작전에 맞선 것이다. 그런데 승패의 분수령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 왕시 9단이 흑 29로 하변 백 진영을 압박하려는 순간 고노 9단은 이를 외면한 채 우변 백 30으로 뛰어들어 3선으로 짧게 '기어가는' 악수를 자초하고 말았다. 왕시 9단이 기다렸다는 듯 기꺼이 우변을 고노 9단에 내주면서 외곽으로 두터운 철조망을 두르고 지뢰밭을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변 백 대마가 살기는 했지만 생불여사(生不女死·살아도 산 것이 아니라는 뜻)의 신세였고, 우변을 내준 대신 기회를 잡은 왕시 9단은 우변에 철벽처럼 단단하게 세워진 방어막을 바탕으로 공격을 개시했다.먼저 삶을 확신할 수 없는 하변 백 진영에 공습을 감행하면서 중앙에서 우하귀로 이어지는 세력을 더욱 단단하게 굳혔고, 또한 좌하귀의 백에 대해 삶을 강요하는 상황까지 몰고갔다. 불과 100수가 넘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흑의 절대 유리가 한눈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고노 9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후반 끝내기 수순에서 왕시 9단이 좌하귀에 흑 141로 파고 들며 143으로 패를 유도하자 기다렸다는 듯 반격에 나섰다. 고노 9단으로서는 이 패만 잘 활용한다면 주변에 어정쩡하게 머물던 흑 돌들을 그대로 생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렇게 되면 단숨에 역전까지 가능한 분위기였다.그래도 전날 한국의 차세대 주자 홍민표 6단을 꺾은 왕시였다. 이같은 결정적인 순간에도 냉철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깨끗이 물러나 좌변 흑 161로 백 한 점을 잡으면서 주변을 안정시키는 방법으로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다. 바둑은 240까지 진행되며 계가까지 갔으나 반면 10집 내외의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왕시 9단이 반면 9집으로 2집 반을 남기는 승리를 거뒀다. 베이징=박상언 기자 사진설명대국 후 계가를 마친 왕시 9단(오른쪽)과 고노 린 9단. 두 선수의 얼굴은 표정만 봐도 누가 승자인지 알 수 있을 만큼 대조를 보이고 있다. ◇제9회 농심 신라면배 세계바둑 최강전  1라운드 제4국   중국 베이징 쿤룬호텔  1007년 10월 19일○고노 린 9단(일본) ● 왕시 9단(중국) 2007.10.19 19:09
스포츠일반

‘세계 최고도박사’ 차민수 “도박은 100% 실력”

차민수(57)씨는 최근 영화 를 두 번이나 봤다. 돈 안 들이고 잘 만들었다는 생각을 했다. 암흑세계 뒷방의 속이는 기술에 관한 리얼리티가 돋보인 반면. 판돈을 뻥튀기한 것이 조금 거슬렸다. 도박의 고수에게는 일반인에게 안 보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는 이른바 ‘월드 클래스 플레이어’다. 전세계 최고 도박사 10명에게만 붙여진다는 영예로운 칭호이다. 그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그의 도박인생은 일본·미국 영화사가 영화화하자고 할 만큼 극적이고 파란만장하다. 빅히트 드라마 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그의 카지노 스토리를 5일부터 ‘ 차민수의 히든 카드’라는 제목으로 본지에 연재한다. ▨드라마가 된 미국 생활 육성 고백 차민수는 4남매 중 막내이자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그에게 바둑·태권도·기타·피아노·쿵푸(7단)·바이올린 등 무려 15가지의 과외를 시켰다. 그런 아들을 어머니는 집밖으로 내쫓았다. ‘노는 것 좋아하는’아들을 두고볼 수 없어서였다. 결국 그는 1976년 미국으로 갔다. 그는 미국 생활 초기에 운명처럼 두 명의 미국인 스승을 만났다. “78년 나에게 바둑을 배우러 온 칩 존슨(67)을 통해 포커가 학문이라는 것을. 노름이 공부라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확률 공부는 기본이었다. 어떤 때 베팅하고. 참아야 하는지를 배웠다.” 79년 만난 단 게롯(작고)에게서는 속임수 맛을 살짝 보았다. “그때 카드에는 800여 가지나 되는 속임수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도박세계가 공부만 갖고 되는 게 아니고.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곳임을 알았다.” 85년은 그가 도박사로 새로 태어난 해였다. 그가 이혼하면서 모든 재산을 아내에게 주고 손에 쥔 것은 달랑 18달러. 거처도 없이 차에서 먹고 자면서 5년 동안 끊었던 포커를 다시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기도박을 했다. 20달러 내기로 다섯 판을 이겨 100달러를 쥐었다. 1개월 만에 3만 달러를 벌어 겨우 집을 마련했다. 하지만 일류 도박사를 만나 그동안 모은 돈을 몽땅 날렸다. 자신이 이 세계에서는 하류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독공수련에 들어갔다. “포커 종류만 해도 15가지이다. 모두 잘해야 진정한 고수다. 존슨이나 게롯에게 배운 건 기초에 불과했다.” 그는 3년 동안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드디어 3년 만인 88년에 ‘차민수학’이라고 불릴 만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책에 다 있지만 프로가 되는 것은 읽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체득해야 한다”고 말한다. 승률이 80%는 돼야 프로라는 것. 그는 전성기였던 87~97년 10년 동안 90%의 승률을 자랑한다. ▨ 1년에 7개월 일하고 5개월 여행 라스베이거스로 그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땁니까?” 그는 “쇼핑이나 하십시오. 시간 지나면 옷은 남습니다. 카지노는 절대 못 이깁니다. 왜? 카지노는 자금이 무한대고 기계적으로 하는 거대조직입니다. 그런데 잠 못 자고. 판단력 흐리고. 자금도 적고 모든 게 열세인 상황에서 어떻게 이깁니까”라고 대답한다. 역대 도박사 중 돈을 가장 많이 번 5명 중 한 사람이고 세금을 가장 많이 낸 그는 “도박이란 결코 운이 아니고 100%가 실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도박을 어떻게 정의할까. 단순하고도 명쾌했다. “져서 아프고 생활의 리듬이 깨지면 무조건 도박이다.” 재벌이 1000만원 잃는 것은 안 아프지만 200만원 버는 사람이 20만원을 잃으면 속이 쓰리고. 생활의 리듬이 깨진다. 능력을 벗어나는 큰 액수로 베팅하는 것이 바로 도박이라는 것. 그는 1년에 7개월을 일하고. 5개월을 여행 다닌다. 일할 때면 1개월에 20여 일을 승부사로 산다. 이기고 지는 것에 덤덤하다. 져도 당황하지 않고. 이겨도 기뻐하지 않는다. 져도 내일 맑은 정신으로 이길 자신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프로이다. 도박을 공부. 학문으로 생각해서일까. 그는 평생 한국기원 전문기사라는 단 한장의 명함만을 가졌다. 그는 프로 4단으로 대국장에 10년 동안 안 나갔지만 엄연한 프로기사다. 1989~90년 2년 연속 후지쓰배 8강에 진출하고. 조치훈도 꺾은 바 있다. 2년 아래인 조훈현 국수와도 친하고. 박치문 중앙일보 전문위원. 김인 9단과도 친교가 있다. 박명기 기자 사진=이영목 기자 2006.12.03 20:39
경제

한국 바둑 산증인 조남철 9단 타계

한국 현대 바둑의 개척자이자 산증인 조남철 9단(사진)이 2일 강남구 일원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3세. 고인의 유해는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장례는 5일 한국기원장으로 치러진다. 1923년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서 출생한 고인은 37년 십대의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 문하생으로 입문한 뒤 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전문 기사가 됐다. 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다 44년 귀국한 고인은 해방 직후인 45년 11월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해 현대 바둑의 효시가 됐다.  고인은 48년 명인전 우승을 시작으로 국수전 9연패를 이룩하는 등 50~60년대 무적시대를 구가하며 한국 바둑을 이끌었다. 통산 30회 우승. 고인이 반상에 남긴 업적은 이 뿐만이 아니다.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 용어를 우리말로 옮겼고 등 30여 권의 저서는 그 자체가 오롯이 한국 바둑의 역사였다. 고인은 바둑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상연 5단과 조치훈 9단 형제가 그의 조카로 집안의 단수를 모두 합치면 38단이나 된다.   최근 고인은 노령으로 거동이 불편해 바깥 출입을 삼가고 집에서 칩거하고 있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최충순(80) 여사와 딸 영수(54)·영민(51)씨, 아들 송연(49)씨 등 1남 2녀가 있다. 정재우 기자 2006.07.03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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