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드래곤즈의 왼쪽 수비수 윤석영(22)은 외모가 곱상하다. 플레이 스타일도 기술을 앞세워 부드럽게 공을 찬다. 패스워크와 날카로운 크로스가 장점이다. 이때문에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다. 지난달 '윤석영 팬미팅' 때도 여성 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드러움 뒤에 강한 근성이 숨어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축구를 시작했다. 늦은 시작은 아니지만 그는 "축구를 늦게 시작해서…"라는 생각을 갖고 10년을 달렸다. 악바리 같이 자신의 목표를 하나씩 채웠다. 런던 올림픽에서 주전 왼쪽 풀백으로 활약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후 유럽의 러브콜을 받는다는 보도가 쏟아졌다. 제2의 이영표로 각광을 받고 있다. 21일 광양에 위치한 드래곤즈 하우스에서 윤석영을 만났다.
-지난 17일 이란과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A대표팀에 데뷔했다.
"2009년 전남에서 발을 맞췄던 (곽)태휘형, (정)인환이형과 함께 뛰어 편했다. 또 올림픽을 함께 한 선수도 많았다. 경기는 잘했는데 0-1로 패해 아쉬웠다. 그래도 공항에서부터 팬들이 응원해주니, '이제 정말 국가대표팀이구나'라고 실감했다."
-축구를 늦게 시작했다고.
"아버지께서 내가 축구를 하면 좋겠다고 하셨다. 나도 축구를 제대로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집안에 축구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야구 선수는 있나) 그렇다. 아버지의 사촌 동생의 아들. 즉 내 6촌이 기아 타이거즈의 투수 윤석민(26)이다. 한 번도 본적은 없다.(웃음)"
-어떻게 장흥까지 내려가게 됐나.
"원래 고향은 수원이다. 뛰어노는 것을 워낙 좋아했고, 축구가 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수소문해서 장흥초와 인연이 닿았다.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어간 것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게 힘들지 않았나.
"전혀 아니다. 축구가 너무 재밌었다. 내가 큰 뒤 아버지께서 '처음에 축구할 때 석영이 네가 조만간 힘들어서 전화를 할 줄 알았다'고 하더라. 난 축구화 사달라는 전화를 제일 많이 했다."
-초등학교 6학년을 1년 더 다녔다고 들었다.
"6학년 졸업 수학여행까지 다녀왔었는데, 김한성 장흥초 감독님이 1년을 더 배워보는게 어떻냐고 물었다. 기본기가 너무 부족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첫 리프팅(축구의 기본. 온 몸으로 공을 튕겨 떨어트리지 않는 것)을 했을 때 22개였다. 다른 친구들은 100개 씩 거뜬하게 할 때였다. 처음부터 배운다는 마음으로 1년 유급을 했다. 빠른 90년 생이라 후배들과 어울리는데 문제는 없었다."
-먼저 축구를 시작한 동료들을 어떻게 따라잡았나.
"장흥초는 오전 7시에 단체운동을 시작했다. 난 전날 9시에 잠들어 6시에 혼자 일어났다. 운동장에 나가 리프팅을 했다. '오늘은 100개를 해봐야지'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달려나간 기억이 있다. 매달 100개씩 늘어 초등학교 6학년을 마칠 때에는 1000개를 넘겼다."
-중학교 때는 어땠나. 기본기가 좋아져서 필요없었을텐데.
"더 열심히 했다. 장흥중은 오전 6시에 운동을 시작해 아침 운동은 포기했다. 대신 끝까지 남아 맨 마지막까지 훈련하려고 했다. 당시엔 체격이 왜소한 편이었다. 홀로 복근 운동과 팔굽혀펴기를 해서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데 중점을 뒀다. 또 크로스와 슛 연습을 했다. 매일 슛 10개를 구석에 꽂아 넣지 않으면 숙소로 들어오지 않았다."
-슈팅 연습? 처음부터 측면 수비수를 본 것이 아닌가.
"아니다. 고1 때까지 중앙 공격수와 측면 공격수를 번갈아가면서 봤다. 골도 제법 넣었다. 고등학교 때는 오버헤드킥으로 골까지 넣은 기억이 있다.(웃음) 인생 최고의 골이다."
-중학교 때 성적은 어땠나.
"장흥중은 정말 잘 했다. 김동군 감독님이 일화에 계시다가 장흥중으로 왔다. 그전에는 피지컬 훈련을 많이 했는데, 김 감독님은 패스 등 기본적인 훈련에 집중하셨다. 기술이 많이 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비수가 된 사연은.
"고3이었던 주전 형이 부상을 당했다. 그 자리에 대신 뛰었다. 꽤 잘해서 당시 박경훈 감독이 이끄는 청소년 대표팀에도 뽑혔다. 윤빛가람 등과 함께 뛰었다."
-왼쪽 수비수면 체력적으로 쉽지 않았을텐데.
"어렸을 때부터 체력은 좋았다. 워낙 활동적이었다. 오른쪽 눈썹에 상처도 뛰어 놀다가 난 것이다.(웃음) 초등학교가 시골에 있어 사람이 없었다. 축구를 하던 내가 학교 육상대표로 소년체전에 나가 800m 전남 기록도 세웠다. 2분 20초로 당시 전남 신기록이었다. 아직도 정확히 기억한다."
-청소년 대표팀에서 좌절도 있었다고.
"처음 발탁돼서 1주일간 훈련을 했는데, 딱 느꼈다. 떨어졌다고. 그래도 바로 돌아와 개인 훈련을 했다. 이후 U-16대표팀이 싱가포르에서 부진하고 돌아왔다. 이때 상비군 60명을 다시 뽑았다. 40명을 추렸고, 다시 2차 선발에는 20명만 남았다. 그리고 남은 20명이 기존의 대표선수와 연습경기를 가졌다. 이때 내 인생의 최고의 경기를 펼쳤다."
-올림픽이 인생 최고의 경기가 아니었나.
"하하, 그날 경기가 없었다면 올림픽에 나도 없었다. 당시엔 오른쪽 수비를 봤는데, 여태까지 축구하면서 가장 잘한 경기다. 오른발로 크로스를 올려 어시스트도 했고, 치고 들어가 날카로운 왼발슛도 날렸다. 이후 대표팀에서 탈락한 적이 없다."
-성장 과정에서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아버지가 나를 강하게 키우셨다. 중1 때였나 숙소에서 도망친 기억이 있다. 중학교 때는 성장과정이라 1학년은 작고 3학년은 크다. 당시 3학년 형들이 무서웠다. 1주일 동안 도망을 나와 아버지에게 돈을 달라고 전화를 했다. 보통 아버지들은 '어서 학교로 돌아가라'고 호통을 치실텐데, 우리 아버지는 '조금만 놀고 들어가라'고 타이르셨다. 자유스럽고 강하게 키운 것이다. 내 축구 인생에서 유일한 외도였다."
- 어렸을 때부터 대표팀을 꿈꿨던 것인가.
"아니다. 태극마크를 생각하고 시작한 축구가 아니다. 그 자체를 즐겼다. 매일 매일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채워나갔다. 오늘 약점을 내일 보완했다. 그냥 축구를 잘하고 싶어서 열심히 했는데 어느덧 태극마크가 달려있었다."
-맨체스터 시티, QPR 등 이적설이 무성하다. 이제 해외진출을 노리는데.
"우선 전남이 먼저다. 그래도 꿈은 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 중하위권 팀에 가서 '인생 최고의 경기'를 다시 펼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 들어가고 싶은 막연한 꿈은 있다. 노력하면 기회는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