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스타 PD의 명성과 내공은 무시할 수 없다. 영화 '역린' 이후 4년만에 스크린으로 컴백한 이재규 감독이 '완벽한 타인'을 통해 명장의 노련함을 다시 한 번 뽐냈다.
'역린' 역시 연출가로서 후회가 남는 작품은 아니지만, 드라마 PD가 아닌 영화 감독으로서 첫 출발에 많은 교훈과 반성을 얻게 만든 것은 사실. 절치부심 4년간 갈고 닦아 내놓은 작품은 신선함을 바탕으로 웃음과 감동, 현실적인 메시지까지 담아낸, 지금 현 시대 관객들에게 가장 통할 수 있는 영화다.
개봉하자마자 박스오피스 1위를 석권하며 압도적 흥행 레이스를 펼치고 있는 '완벽한 타인'은 '휴대폰 잠금해제'라는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약 한 달 반이라는 짧은 촬영기간 동안 짧고 굵은 작품으로 완성됐다. 같은 공간, 7인의 등장인물로 현 사회의 문제점들과 인간상을 담아내는 것은 물론, 선물같은 목소리 출연 등으로 영화적 재미까지 더했다. 감독에게도, 배우들에게도 도전이나 다름 없었던 작품의 결말은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해피엔딩이 됐다. 올해 영화계 최고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완벽한 타인'은 충무로의 숨구멍이자, 만들어줘서 감사한 영화로 자리매김 할 전망이다.
- '완벽한타인'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얼떨떨하다. 무엇보다 배우 분들이 좋게 봐 주셔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한다."
- 원작이 있다. 각색하는데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주변에서 내가 지켜보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을 바탕으로 인물 설정을 바꿨다. 나 같거나, 아내 같거나 혹은 내 친구 같은.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내 주변에도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조진웅 배우가 연기한 석호 에피소드는 내 이야기가 많이 담겼다. '당신, 나 사랑하긴 해?'라는 대사는 내가 아내와 대판 싸웠을 때(웃음) 했던 대사고, 극중 석호처럼 나 역시 연출료를 다 날려 3년간 우울증을 앓기도 했다. 딱딱할 수 있는 말들을 조진웅 배우가 너무 잘 소화해 주셔서 감사하다."
- 스토리만큼 캐스팅도 신선하다. 충무로 베테랑 배우들과 이서진을 만나게 했다 "유해진 배우나 조진웅 배우는 영화계에서는 정말 내로라하는 베테랑 아닌가. 연출부, 제작부도 '준모 역할로 이서진을 생각한다'고 했더니 백이면 백 1초 정도 아무 말이 없더니 '신선한데요?'라고 답하더라. 낯설지만 신선한 분위기가 우리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와도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 캐스팅에 어려움은 없었나. "배우들에게 일단 원작을 다 보여줬다. 그리고 '원작은 이런 장점이 있지만, 이런 단점이 있다. 시나리오는 1차적으로 이렇게 나왔으나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우려했던 지점들의 대부분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정리했고, 나머지 한, 두가지만 촬영 단계에서 정리했다. 순서상으로는 석호를 연기한 조진웅 배우가 가장 먼저 캐스팅 됐고,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큰 어려움은 없었다."
- 고향친구(남자) 넷에 아내(여자) 셋, 부부 셋에 친구 하나의 구도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가 있다면 석호는 배가 움직이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닻으로 생각했다. 준모와 세경(송하윤)은 파도를 일으키고, 태수(유해진)와 수현(염정아)은 그런 배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처음엔 태수와 수현에게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상황과 설정을 모두 염두한 캐스팅이다."
- 영화에서는 배우 윤경호가 최고의 반전이자 복병이다. "영배(윤경호) 같은 경우는 숨어있다 반전을 주는 역할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얼굴, 예쁘거나 잘생기지 않은 사람을 원했다. 그래야 그를 둘러싼 에피소드가 관객들에게 더 편안하게 다가갈 것 같았다. 나는 TV·영화를 보다가 어떤 배우가 연기를 잘 하거나,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으면 꼭 메모를 해 둔다. 그런 배우가 90~100명 정도 된다. 윤경호 배우도 그 중 한 명이었다."
- 실제 이미지와 미묘하게 다르다. "맞다. 배우와 배역 사이에 약간씩 차이가 있다. 유연해 보이는 유해진은 서울대 법대 출신의 고지식한 남자로, 똑똑한 이서진은 단순무식한 캐릭터를 맡겨 버렸다.(웃음) 뜨거운 조진웅도 영화에서는 잔잔한 느낌이다. (염)정아 씨는 늘 세련미 넘치지만 수현 같은 구석도 있다. 비슷한 듯 다르게, 다르지만 어울리게 각각의 타입을 조율했다."
- 성소수자 에피소드도 등장한다. "원작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다. 뭐라 그럴까. 밝히기 누군가에게는 큰 문제가 아닌 이야기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는 가장 드러내기 쉽지 않은 비밀이자 털어놨을 때 상대방의 반응을 예측하기 힘든 비밀이다. 결국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들도 사람이고, 친구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건 우리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다양성과 현실성을 모두 담아내고 싶었다."
- 결말에 대한 호불호가 갈린다. "등장하는 모든 인물, 모든 부부에게 비밀과 결핍이 있다. 남들이 봤을 땐 완벽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기승전결'이 있다면 하나씩은 빼는 것을 택했다. 다 보여주면 밥을 떠먹여주는 꼴이 될 것 같더라. 상상의 여지를 남겨주고 싶었다. 예를 들어 준모와 세경 같은 경우는 하필 '결'이 빠졌다. 사실 그들의 결말이 암시가 될만한 장면이 있었는데 촬영까지 다 하고 최종적으로 빼 버렸다."
- 상상과 선택은 관객의 몫이니까. "원작의 결말은 훨씬 빠르고 차갑게 끝난다. 말도 안 되게 오랫동안 돌고 있는 반지를 변곡점으로 앞 이야기가 현실일 수도 있고, 뒷 이야기가 현실일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앞 이야기가 판타지, 뒷 이야기가 판타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러 문제들이 있지만 문제점을 안고 타협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다 말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파국으로 치닫더라도 문제를 명확하게 인지하는 것이 맞지 않냐고 되묻는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말 그대로 생각하기 나름 아닐까."
- 만족도는 어떤가. "'이런 작품이 나왔으면 좋겠다' 상상했던 것이 거의 비슷하게 나왔다. '관객들이 어떻게 봐 주실까' 불안하면서도 기뻤던 이유다. '역린'도 같은 마음으로 만들었고, 결과도 그렇게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관객들과 소통하지는 못했다. 약간의 시행착오가 있었고 '어떤 것을 더 잘해야 하나'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 스타 PD, 이재규라는 이름에 쏟아지는 신뢰에 대한 부담은 없었나. "다 과거의 이야기다.(웃음) 그땐 안 느낀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 '나 부담스러워 했구나. 책임감이 어마어마했구나' 싶더라. 스스로 부끄러우면 안되고,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심리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 하고 싶은 작품을 해 왔다고 생각하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아주 옛날에 '네 멋대로 해라' 인정옥 작가 '옥탑방 고양이' 구선경 작가와 국정원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를 준비했다. 몇 개월을 준비하다 최종적으로 무산됐는데, 만약 그 때 그 작품을 했다면 작가들의 드라마와 내가 연출한 '다모'는 세상에 안 나왔을 수도 있다. 작품도 운명이라 생각한다. '베토벤 바이러스'도 1년간 의학 드라마를 준비하면서 취재하다 지쳐 '조금 더 편안하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드라마를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었던 작품이다. 당시 기형도 시인의 '먼지 투성이의 푸른 종이'라는 시가 너무 좋았고, 그 시가 '베토벤 바이러스'의 기원이 됐다."
- 차기작도 준비 중이다. "첩보 액션 영화 한 편과,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좀비물을 준비 중이다. JTBC를 통해 선보여지게 될 것 같다.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꽤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데 이 작품도 남다른 신선함과 독특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러 갈래로 조사하며 준비하고 있다. 기대해 주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