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역사학자/작가 유정희(남, 38)
-다음은 ‘고조선 논쟁’으로 유명한 유정희(남, 38, 작가/역사학자 : 『18세기 프랑스 지식인이 쓴 고조선, 고구려의 역사』, 『하왕조, 신화의 장막을 걷고 역사의 무대로』, 『드래곤볼, 일본 제국주의를 말하다』, 『그레이스 켈리와 유럽 모나코 왕국 이야기』, 『러시아 역사학자 유 엠 부틴의 고조선 연구』 등을 저/감수) 선생이 직접 쓴 ‘특별기획 칼럼 ⑤부’이다.
“How can you pretend, Mr Flory, that you are not the natural superior of such creatures?” “플로리. 당신은 당신이 어떻게 저런 짐승들 보다 태생적으로 우월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이오?”
이 말은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소설인 『버마에서의 나날들(Burmese Days, 1934)』에 등장하는 대화이다. 1920년대 영국 식민지였던 버마(현재 미얀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소설인 ‘버마에서의 나날들’은 영국 제국주의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작품으로 오리엔탈리즘 연구에 있어서도 고전으로 읽히고 있는 명작이다.
실제 버마에서 경찰생활을 했던 저자 조지 오웰은 자신을 대변하는 주인공인 플로리(Flory)라는 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플로리는 백인 영국인이지만 제국주의의 침탈을 비판하는 인물이다. 그는 버마에서 목재상으로 일하며 백인들만 소속된 지역 클럽에 속해있지만, 동시에 버마인들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특히 그는 인도인 의사 베라스와미(Dr Veraswami)와 절친하게 지내는데 이 둘 사이의 대화가 이 소설의 백미이다.[1]
플로리가 백인이지만 영국 제국주의의 침탈을 비판하는 인물이라면, 베라스와미는 유색인종으로 동양인이지만 영국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인물이다. 그는 영국이 버마에 경제개발과 문명을 가져다 주었다며 영국을 칭송한다.
그런 그의 가장 큰 바람은 지역 백인 사교클럽에 들어가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클럽의 백인들은 유색인종인 베라스와미를 혐오하지만, 놀라운 점은 그가 그런 백인들의 태도마저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서구문명을 찬양한다는 점이다.
위에 인용된 문구는 베라스와미가 플로리에게 건넨 말로, 길거리를 헤매는 열등한 버마인들을 우월한 서구백인들과 같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베라스와미의 이런 역설적 태도는 동양인이 서구중심주의를 자신의 처지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다. 자신이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신이 속한 문화나 시스템이 열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 같이 잠재력이 뛰어난 인물이 이렇게 힘든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속한 문화와 시스템이 저열하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다”라고 해야 자신의 힘든 현실이 정당화되는 까닭이다.
문명학자이자 비평가인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 1935~2003)’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에서 ‘서구와 비서구(Occident/Orient),’ ‘서구적 자아와 비서구적 타자(us/them),’ ‘목소리를 낼 권리가 있는 자와 침묵해야 하는자(vocal/silent)’의 논리가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형성되었고, 서구는 이를 이론적 틀로 공고하게 다듬어나갔음을 지적한 바 있다. 베라스와미의 태도는 이런 서구의 태도를 비서구에 속한 타자가 추종하였을 때, 그것이 어떻게 더욱 왜곡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2]
자기 문화의 열등함을 스스로의 정체성을 방어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의 눈에 ‘우리’는 서구처럼 창의적이어서는 안된다. ‘감히’ 서구가 시도하는 도전에 동참하려 하는 것도 불손한 일이다. 만약 이런 비서구의 서구에 대한 도전이 성공한다면, 창의적이지도 못하고 용기도 없이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신의 암담한 현실이 스스로의 개인적 잘못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3]
‘아스달 연대기’를 둘러싼 지난 몇 달간의 여론을 지켜보며 『버마에서의 나날들』 에 등장한 플로리와 베라스와미의 논쟁이 떠올랐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아스달 연대기가 했던 참신한 시도들, 예를 들면 각 종족의 언어를 새롭게 만든다던가, 도시국가의 탄생을 인류학적으로 재구성한 것들, 신화와 전설의 탄생을 복원하려는 시도 등은 분명 서구적인 시도를 우리 나름의 도전적 해석을 통해 구현하려한 나름의 노력이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재정적인 이유나 경험의 부족으로 허점이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조롱에 가까운 근거 없는 비난을 해대는 목소리는 제2의 베라스와미와 같은 맹목적인 자기문화비하 이외에는 그 이유를 찾기 어려운 태도였다. 즉, 아스달 연대기와 같은 창의적인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런 창의적인 시도를 지금까지 하지 못한 자들의 스스로의 우울한 현실이 정당화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가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자문화 비하의 풍조는 사실 우리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보아도 유사한 태도가 존재한다. 오리엔탈리즘의 폐해는 그만큼 크고 깊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자국민의 비난을 뚫고 한 번 서구의 인정을 받은 컨텐츠는 보다 적극적으로 밀어주는 ‘태세전환’적인 문화도 우리 안에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다.
일단 ‘국가대표’적인 성격을 띈 인물이나 컨텐츠에 대해서는 헌신적인 지지를 해주는 보상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이유로 ‘아스달 연대기’의 성공을 더욱 더 빌고 싶다. 만약 ‘아스달 연대기’가 실패한다면 이 드라마가 받았던 조롱과 비난과 같은 차가운 시선을 겁낸 나머지 아무도 창의적인 시도를 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 번 성공의 물꼬만 튼다면, 한국 드라마 컨텐츠는 새로운 시도를 겁내지 않는 창의성의 실마리를 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스달 연대기’는 지난 3주간(part3) 분명한 반등을 이루어냈다. 과도한 비난과 몰상식한 조롱은 크게 줄었고, 분명한 호평을 끌어내었다. 침묵하던 평론가들도 차츰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제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 드라마의 시즌 2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석 [1] George Orwell, Burmese Days: A Novel (Wilmington: Mariner Books, 1974). [2] 자세한 내용은 Edward W. Said, Orientalism (New York: Pantheon Books, 1978)을 참조. [3] S.R. Moosavinia et al., “Edward Said’s Orientalism and the Study of the Self and the Other in Orwell’s Burmese Days,” Studies in Literature and Language Vol 2, no. 1 (2011): 103-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