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 26일. 롯데는 내부 자유계약선수(FA)였던 장원준과 재계약에 실패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4년 총액 88억원을 제시했다"며 구체적인 조건도 적시했다. 장원준은 이틀 뒤 4년 총액 84억원에 계약하며 두산으로 이적했다. 롯데가 제시한 총액보다 적은 금액에 계약이 이뤄진 것이다.
장원준은 이듬해 1월 기자회견에서 "좋은 환경에서 야구를 하고 싶었다.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4억원을 덜 받더라도 팀을 옮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장원준의 롯데 잔류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롯데와 협상하기 전부터 '수도권 팀에서 뛰고 싶다'는 그의 의중이 다양한 루트로 알려졌다.
프로 스포츠는, 특히 FA 계약은 '머니게임'이다. 첫째도 돈, 둘째도 돈이다. 아무리 포장해도 부정할 수 없다. 합당한 대우를 받길 바라는 선수 개인의 선택을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계약을 좌우하는 요인이 꼭 돈만은 아니다. 복수의 구단이 영입전에 뛰어들었고, 제시받은 금액 차가 크지 않다면 선수는 다른 요인에 눈을 돌릴 수 있다.
지난 11일 4년 최대 42억원을 받고 SK와 계약한 최주환(32)은 새 출발을 선택한 두 가지 배경을 짚었다. 한 가지는 '2루수 보장'이다. 최주환은 2017년, 데뷔 12년 만에 규정 타석을 채웠다. 이전까지 그는 타격에 비해 수비가 약한 선수로 평가됐다. 그러나 출전 기회가 늘어나며 수비력까지 향상됐다. 최주환도 "약점(수비력) 꼬리표는 떼어냈다고 생각한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최주환은 꾸준히 2루수로 뛰는 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고려했다.
올 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정근우는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2루수로 남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했다. 그는 한화 소속이었던 2018년부터 주 포지션인 2루수 대신 1루수와 외야수로 뛰었다. 2차 드래프트로 LG 유니폼을 입은 2020년에는 2루수로 복귀해 251이닝을 소화했다. 선수에게 포지션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일 때가 있다.
최주환도 "SK는 2루수로서의 내 가치를 높게 인정해줬다"고 했다. 다른 구단들은 최주환을 지명타자나 1루수로 활용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계약 금액(총액 42억원)을 웃도는 오퍼도 있지만, 최환은 명분을 좇았다. 여기에 민경삼 SK 대표이사가 최주환과 식사하는 자리를 만드는 등 그를 세심하게 배려했다는 점도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난 10일 원소속팀 두산과 재계약한 허경민은 계약 기간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4년(총액 65억원) 뒤 선수 옵션(기간 3년·총액 20억원)을 행사할 수 있다. 사실상 7년 계약이다. 역대 FA 최장 계약 기록을 썼다.
허경민은 계약 후 일간스포츠와의 통화에서 "7년이라는 계약 기간으로 인해 책임감을 크게 느낀다"고 했다. 4년 뒤 선수 옵션 행사는 기정사실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두산은 사실상 7년 계약을 통해, 허경민이 4년 뒤에도 꾸준히 좋은 기량을 유지해줄 거라는 기대를 담았다. 허경민도 구단의 제안을 고맙게 생각했다.
허경민처럼 프랜차이즈 선수로 남는 데 가치를 두는 선수는 많다. 지난해 야수 FA 대어로 평가된 전준우가 대표적이다. 그는 1월 8일 원소속팀 롯데와 기간 4년, 총액 34억원에 계약했다. 침체한 시장 상황을 고려해도 예상보다 적은 금액이었다. 한 에이전트는 "조금 더 기다렸다면 전분우는 40억원 이상의 금액에 다른 구단과 계약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전준우는 롯데 잔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고 전해진다.
반면 두산 왕조의 주역 양의지(NC)는 도전을 선택했다. 그는 2018년 12월, NC와 FA 계약(4년 총액 125억원)을 했다. 당시 두산도 양의지에게 서운하지 않을 만한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듬해 1월 열린 기자회견에서 "변화를 주지 않으면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더 나은 선수가 되고 싶었다"며 이적을 선택한 배경을 전했다. 양의지는 2018년 정규시즌 최하위였던 NC를 올해 통합 우승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