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은 9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PO·3전 2승제) 1차전에서 승리했다. 외국인 투수 둘이 모두 이탈하면서 최원준, 곽빈과 대체 선발 김민규만으로 마운드를 지켜야 했다. 포스트시즌 6경기에서 선발 투수가 단 23과 3분의 2이닝(평균 3.94이닝)만 소화했지만, 김태형 감독의 현란한 불펜 기용으로 마운드를 지켜내고 있다.
뒷문의 핵심은 홍건희와 이영하다. 선발의 빈자리를 멀티 이닝 소화로 메우고 있다. 둘 다 포스트시즌 총 4경기에 등판해 홍건희가 4경기, 이영하가 3경기에서 멀티 이닝을 책임졌다. 이닝도 길지만, 등판 순서도 다양하다. 불펜 에이스 홍건희가 대표적이다. 정규시즌엔 이영하의 뒤를 이어 7, 8회를 막고 마무리 김강률로 이어주는 셋업맨 역할을 주로 담당했다. 하지만 가을야구에서는 선발 투수가 흔들리는 경기 중반 승부처에 올라와 불을 껐다. 5회 1사 만루 상황에 올라와 병살타로 위기를 막아낸 PO 1차전이 대표적이다. 이영하 역시 마찬가지다. 2회부터 5회, 6회, 8회까지 등판 시점이 매번 다른 데다 3분의 1이닝에서 4이닝까지 이닝 소화도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잘 던지는 불펜 투수가 9회 마무리, 그다음 투수가 7, 8회 셋업맨 역할을 맡던 기존의 불펜 통념과 상당히 다르다.
단순히 혹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김 감독의 기준은 명확하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카드를, 가장 위험할 때 쓴다. 김 감독은 지난 2일 와일드카드(WC) 결정 2차전을 앞둔 인터뷰 때 전날 호투한 이현승에 대해 "8, 9회가 아니라 가장 급할 때, 가장 중요할 때 기용한다"며 "뒤로 둘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PO 1차전 승리 후에도 "홍건희가 무너지면 끝이었다"며 최고 승부처 때 불펜 에이스 카드를 썼다고 밝혔다.
낯설지만 새로운 방식은 아니다. 미국 메이저리그(MLB) 클리블랜드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2016년 불펜 에이스 앤드류 밀러를 마찬가지 방식으로 활용했다. 그해 최고의 불펜 투수였던 밀러를 마무리가 아닌 중간 투수로서 승부처 때마다 기용하며 월드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이후 MLB에서는 2018년 밀워키 필승조였던 조쉬 헤이더, 2021년 LA 다저스의 블레이크 트레이넨 등이 위기 상황(High leverage)을 막는 불펜 에이스로 활약하며 팀 승리를 지켜냈다.
쉬운 방법은 아니다. 가변적인 등판 시점에 선수들이 흔들릴 수도 있고, 피로도가 쌓여 무너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두산은 PO 1차전까지 승리하며 최소한의 성공을 거뒀다. 곰의 탈을 쓴 여우, 김태형 감독의 노련함이 가을의 마운드를 지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