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철 감독이 이끄는 야구대표팀이 5일 일본 오사카에 있는 마이시마 버팔로스 스타디움에서 가볍게 훈련했다. 일본에의 첫 공식 일정이었다. 대표팀은 여기서 두 차례 평가전을 벌인 뒤 도쿄로 이동,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1라운드를 치른다. 오는 9일 호주전이 첫 경기다.
미국 애리조나 투손에서 진행된 대표팀 캠프 분위기는 밝고 부드러웠다. 이강철 감독은 소속팀 KT 위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선수들과 친근하게 소통했다. 그러나 결전지에 도착한 뒤로는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 어느새 전쟁을 앞둔 장수 같아졌다.
이강철 감독의 의지는 한국야구위원회(KBO) 보도자료에 담긴 출사표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라운드의 전사가 되겠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 감독은 고대 로마 시대의 대정치가이자 장수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의 명연설을 인용했다.
카이사르의 저서인 『갈리아 전기』에 따르면, 그는 거대하고 야만적인 게르만족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이렇게 역설했다. “게르만은 우리 선조가 쳐부순 바로 그 민족이다. 우리에게는 게르만족을 전멸시킬 수 있는 뛰어난 전략이 있다.”
맞서 본 적 없는 거인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자는 독려였다. 우리는 이미 그들을 이긴 적이 있다는 역설이었다. 2006 WBC 4강,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 WBC 준우승을 이뤄낸 선배들처럼 2023년 대표팀도 국민에게 명승부를 선물할 수 있다고 응원한 거다. 이강철 감독은 “우리 유니폼에는 ‘승리의 경험’이 새겨져 있다”고 강조했다.
현재 대표팀에는 김광현‧양현종‧김현수 등을 제외하면 한국 야구의 황금기를 경험한 선수가 거의 없다. 처음 대표팀에 뽑힌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팀은 오는 10일 메이저리그(MLB) 스타들이 즐비한 일본을 상대한다. 젊은 한국 선수들에게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 다르빗슈 유(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같은 투수는 게르만족 같은 공포일 것이다. 2라운드에 진출한다면 만날 것으로 보이는 쿠바‧네덜란드의 전력도 한국보다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강철 감독이 출국에 앞서 출사표를 낸 이유는, 갈리아 전쟁을 앞둔 카이사르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상대를 만나기 전에 공포에 먼저 지는 걸 막고 싶은 것이다. 2013년과 2017년 WBC에서 한국은 1라운드 통과에도 실패했다. 이 감독은 가까운 패배의 기록을 묻어버리고, 찬란한 승리의 기억을 소환했다.
큰 대회를 앞두고, 특히 전력상 언더독일 경우에는 리더의 한마디가 흐름을 바꿔놓는 경우가 많다. 2006년과 2009년 WBC를 이끌었던 김인식 감독이 짧은 말로 긴 여운을 만들 줄 알았다.
김인식 감독은 2009년 대표팀 감독을 맡고 “나라가 있어야 야구도 있다”고 일갈했다. 당시 대표팀 코치진과 선수 구성이 어려웠던 상황을 통타한 거다. 당시 프로팀 감독들은 대표팀 코치로 오길 꺼렸고,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불참했다. 흩어진 이기심을 하나로 모으는 데 김인식 감독의 말처럼 강렬한 수사법은 없었다.
2009년 WBC 대표팀은 예상을 깨고 또다시 3라운드(4강)에 진출했다. 이때 김인식 감독이 “위대한 도전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결승 진출 또는 우승을 목표로 내건 것보다 더 커 보였다. 대표팀은 결승전 연장 승부 끝에 일본에 패했으나, 그 여정은 충분히 위대했다.
2009년 이후 대표팀은 수성에 실패했다. 가장 최근에는 도쿄 올림픽 노메달(4위)로 국민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이제 지켜낼 성이 없다. 다시 도전하는 입장이다.
이강철 감독은 최근 기자와 만나 이런 말을 했다. “한국 야구가 자꾸 위기라고 하는데, 난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 선수들이 정말 노력하고 있어요. 잘할 겁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프로팀 감독은 대표팀을 맡기 꺼렸다. 전력은 예전만큼 좋지 않은데 책임과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반면 이강철 감독은 손익 계산하지 않고 “정말 영광”이라며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그리고 선수들과 자기 자신을 다잡기 위해 격문에 가까운 출사표를 냈다. 이강철 감독의 기대대로 2023년 WBC는 한국 야구의 새 기회일 수 있다. 잘못하면 더 큰 위기일 수도 있다. 이제 카이사르의 또 다른 명언처럼 “주사위는 던져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