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차정숙’으로 너무 큰 사랑을 받아 행복한 나날을 보냈어요. 마침 ‘댄스가수 유랑단’과도 겹쳐 과거 가수와 배우 활동을 병행했던 그 시절과 똑같이 맞아가는 느낌이에요. 저에게는 지금이 가장 새롭고, 재밌는 순간이에요.”
말이 필요 없는 레전드다. 가수 겸 배우 엄정화가 데뷔 31년 차에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음악과 연기 중 한 분야도 놓치지 않고 최고의 커리어를 찍은 그는 최근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과 tvN 예능 프로그램 ‘댄스가수 유랑단’을 통해 다시 한 번 날개를 달았다.
최근 서울 강남구 사람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만난 엄정화는 “이렇게 큰 기쁨을 느껴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며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얼마 전 ‘댄스가수 유랑단’에서 고대 축제에 갔는데, 학생들이 ‘차정숙!’이라며 함성을 지르더라고요. 그래서 ‘어, 나 차정숙!’이라고 대답했어요. 너무 반갑고 기뻤어요.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 제 연기를 봐주는 느낌이요.”
‘닥터 차정숙’은 4일 최종 16회로 화려하게 막을 내렸다. 첫회 4.9%로 시작해 15회까지 최고 시청률이 20%대에 육박했다. 엄정화는 극중 의대 졸업 후 20년 동안 가정주부로 살다 레지던트에 도전한 중년 여성 ‘차정숙’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의학 드라마로 보이지만 ‘닥터 차정숙’은 차정숙의 새 도전과 꿈을 이루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졌다. 엄정화는 ‘닥터 차정숙’을 두고 “막막한 상황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응원”이라고 정의했다.
“‘닥터 차정숙’은 결국 ‘내가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남편이나 자식같이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온전히 내가 돼서 살아가는 걸 보여준 거죠. 20년 동안 주부로 살았던 정숙이가 다시 자아를 찾아 의사가 되는 것처럼요.”
극중 차정숙의 서사는 다소 비극적이다. 남편 서인호(김병철)가 대학 시절 첫사랑 최승희(명세빈)와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며 3년간 불륜 관계를 유지했고, 혼외자까지 둔 것. 다만 차정숙에겐 조금이나마 숨을 쉬게 해주는 틈이 있다. 아빠를 나무라고 자신의 편을 드는 자녀들과, 서브남으로 항상 곁을 맴도는 로이킴(민우혁)의 존재다. 엄정화는 실제 차정숙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 같으냐는 질문에 “바람 핀 남자에게는 얄짤없다”며 “제 심정으로는 로이킴한테 가고 싶다”고 고백해 웃음을 안겼다.
“저는 정숙이가 더 이해가 가요. 첫사랑이었어도 어쨌든 결혼해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는데, 외도를 한 인호가 진짜 나쁜 거죠. 인호와 승희, 둘 중 한 사람이라도 ‘우리 이러면 안 돼’라고 멈췄어야 해요.”
엄정화는 정숙과 실제 자신이 닮은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과거 갑상선암을 앓았던 그는 정숙이 간 이식을 받이 위해 수술대에 오르는 장면에서 “내가 여기 또 올라왔네”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마도 정숙이 느꼈을 감정은 무서움과 외로움이었을 거라고 추측한 그는 정숙의 캐릭터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냈다.
“정숙이 가진 성격 자체가 참 따뜻해서 좋았어요. 정숙이 사람들에게 건네는 위로나 응원을 대사로 말할 때마다 그 감정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표현한 것 같아요. ‘아, 정숙의 이 말이 다 진심이었으면 좋겠다’라면서요.”
사전제작으로 지난 1월 촬영이 끝난 ‘닥터 차정숙’은 공교롭게도 5월 말 첫방송된 ‘댄스가수 유랑단’과 방영 시기가 겹쳤다. ‘댄스가수 유랑단’은 엄정화와 김완선, 이효리, 보아, 화사가 함께 전국을 돌며 무대를 펼치는 예능으로, 가수 엄정화가 아직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90년대 최고의 여자 댄스가수였던 엄정화는 어느덧 50대에 활동하는 몇 안 되는 여성 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50대 가수가 음반을 내는 건 워낙 드문 일이잖아요. 그래서 가끔 후배들한테 ‘언니, 길을 터주세요’라는 얘기를 들어요. 그럴 때 정말 기쁘죠. 후배들이 많이 의지하고 있으니까 더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아요.”
올해 55살, 아직 미혼인 엄정화는 결혼관도 확고해졌다. 비혼주의는 아니지만, 결혼은 필수가 아닌 선택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결혼은 나이에 조바심 갖지 말고 원할 때 해야 하는 것 같아요. 남들이 정한 시기 말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의 타이밍에 하는 게 올바른 것 같아요.”
30년의 세월 동안 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만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엄정화에게도 그늘은 있었다. ‘닥터 차정숙’를 만나기 전에는 줄어드는 작품 수에 배우로서 갈증을 느꼈고, 가수 활동 중 ‘드리머’(2016)와 ‘호피무늬’(2020) 발매 당시에는 마지막 음반이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슬럼프를 이겨내고 엄정화는 다시 최고의 스타로 도약했다. 그는 꾸준히 활동을 해온 원동력에 대해 “이 일을 너무 좋아해서”라며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 때는 30살이 넘어가면 여가수는 발라드를 부르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운 좋게도 38살까지 왕성하게 활동했죠. 그래서 길게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일을 너무 사랑하니까, 지치지도 않았던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