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캡처 2024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텍스트힙’이라는 단어와 함께 책을 읽는 행위가 다시금 ‘멋진 취향’으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지난달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민음사 편집자들의 이야기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민음사TV 유튜브 채널은 구독자 5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으며, 최근 공개된 민음사의 매출과 영업이익 성과는 출판계 안팎에 오랜만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습니다.
출판계 일부의 성과와 이러한 열풍은 분명 의미 있는 신호이지만, 이것이 출판 산업 전체의 전면적인 회복을 뜻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화려한 성과 이면에는 AI시대의 본격적인 도래와 함께 가시화되고 있는 구조적 위기감이 깊게 감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판은 단순히 종이에 잉크를 묻혀 상품을 생산하는 제조업이 아닌, 문명이 스스로를 기록하고 갱신해 나가는 ‘인간적인 마찰’의 과정입니다. 문제는 AI 역시 인간의 창작물을 흡수하며 진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식 접근성의 혁명’이라는 환호성 뒤에는, 인간의 지식 자산을 원료로 성장한 AI가 그 저작권과 창작 생태계를 어떻게 존중하고 지속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오랜 기간 KBS1 라디오 ‘라디오 매거진 위크 앤드’의 ‘일요일은 책과 함께’ 코너를 진행하며 책과 독자 사이의 소통을 이어온 김성신 출판평론가의 인터뷰를 통해, AI 대전환 시대가 마주한 출판 저작권 문제를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 책은 AI의 땔감이 아닌 ‘종자’
AI와 출판은 흔히 이질적인 산업으로 여겨집니다. 하나는 첨단 기술의 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편집자와 저자, 서점과 종이책으로 이어지는 오래된 세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성신 출판평론가는 AI를 “출판의 진화”라고 정의했습니다.
“출판은 퍼블리싱(Publishing)이잖아요, 어떤 지식이나 정보들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공공의 것, 퍼블릭하게 전환시키는 것, 대중의 것으로 만드는 거죠. 한 문명이 생산한 모든 지식과 정보가 언어로 전환되고, 후대에 이어지도록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 출판의 원래 역할이거든요.”
지식을 저장하고 재가공해 전달하는 역할은 오랫동안 출판의 고전적 영역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AI는 인간이 입력한 프롬프트를 바탕으로 더 빠르고 더 강력하게 결과물을 도출하며 출판의 기능을 대체하고 있습니다. 김 평론가는 AI를 출판의 외부에서 출판 생태계를 공격하는 적이 아니라, 출판이 감당하던 고유의 기능을 흡수한 ‘진화형’의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진화한 존재가 이전 존재를 대체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지만, 그 진화한 존재가 자신을 가능하게 한 토양까지 태워버린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공급망과 순환구조가 끊기는 거예요. 사람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고, 이를 통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역사에 이름이 남을 수도 있다는 희망과 가능성이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그 가능성 자체가 아예 막혀버리면 어떤 바보가 그런 수고를 기꺼이 감당하겠느냐는 거죠.”
창작의 동기가 통째로 증발해 버리는 문제를 짚던 김 평론가의 비유는 곧 ‘아마존 밀림’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냥 아마존 밀림을 싹 밀어 벌목해 버리면 당장은 불을 땔 수 있어서 따뜻하겠지만, 그 다음은 도대체 어떡할 건가요?”
◇ 합리적인 약탈 속 끊어지는 ‘지식의 번식력’
김 평론가는 AI 기업의 무단 학습 행태를 설명하며 ‘약탈’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책과 지식을 학습 원료로 삼으면서도 그 대가가 저자와 출판 생태계로 환원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순한 기술 활용이 아니라 명백한 약탈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종이책을 썰어서 AI에 집어넣는 행위는, 아무리 합법적으로 돈을 주고 책을 샀다고 하더라도 본질이 다릅니다. 소비자가 읽으라고 판 책이지, AI를 학습시키라고 판 게 아니잖아요.”
그가 진정으로 우려한 것은 단순한 ‘보상 누락’을 넘어 ‘지식의 번식력’이 끊기는 문제였습니다.
“AI 산업에서 벌어들이는 막대한 돈이 정작 저작권 시장으로 다시 유입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나무를 베어 쓰기만 할 뿐 심지 않는 벌목과 똑같은 거죠. 당장은 자원이 되겠지만, 결국 지식의 재생산은 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러나 김 평론가는 이 ‘약탈’을 단순히 ‘나쁜 일’이라고만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AI 모델 경쟁이 몇 년이 아닌 몇 개월 단위로 벌어지는 상황 속에 무엇보다 빠르게 데이터를 확보하는 속도전이 중요한 기업들에게 ‘합리적 선택지’가 되어버린 서글픈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했습니다.
김 평론가는 이에 대한 구조적 대안으로 ‘출판 소버린 AI(Sovereign AI)’를 제안했습니다.
“출판 생태계는 고유의 시스템을 유지하되, AI 기업이 책을 학습용으로 활용할 때는 정당한 사용료를 지급하도록 하는 거죠. 그래서 AI 산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이 다시 출판계로 흘러 들어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 그것이 지금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면서도 ‘출판 소버린 AI’ 구상 역시 문제의 완전한 해법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이를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방어선'이라고 표현한 그는, “지식의 가임(可妊) 기능 자체를 복구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연금을 주는 일에 더 가깝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담긴 저작물은 이미 지나간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사유를 낳는 거룩한 ‘종자’입니다. 그 종자를 모두 태워버린 뒤에는, AI 역시 더 이상 배울 수 있는 ‘숲’을 잃게 될지 모릅니다.
결국 AI 시대 저작권 논의의 본질은 “기술을 막을 것인가,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이분법적 선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작물 위에서 성장한 기술이 그 성장의 과실을 다시 인간의 창작 생태계로 어떻게 돌려보낼 것인가에 있습니다.
김지욱 ㈜메이저세븐이엔엠 대표 ▶ 저자소개=서강대학교 언론대학원 석사. 현재 (주)메이저세븐이엔엠의 대표로 음악 저작권과 콘텐츠 현장에서의 음악 저작권 관련 업무 및 자문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JTBC ‘싱어게인’,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tvN ‘태풍상사’, ‘폭군의 셰프’, SBS ‘우리들의 발라드’, Mnet ‘보이즈플래닛’ 등 다수 프로그램 및 콘텐츠의 음악 저작권 관리 업무를 맡아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