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색 짙은 트롯 ‘녹차 따는 울 어머니’(강운 작사·송결 작곡)라는 노래를 구수하게 부르고 있는 강운은 자칭 ‘포잡’(Four Job) 가수다. 투잡이나 스리잡도 아닌 포잡이라니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궁금증을 일으킨다.
강운은 일당 16만원을 받는 덤프트럭 보조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가수 활동을 하는 틈틈이 OBS W, GMTV, IHQ Show 등 케이블채널에서 방영 중인 ‘조영구 전국 가요스타 쇼’의 조연출로 무대진행도 맡고 있다. 거기에 아내가 경기도 용인시 송전리에서 운영 중인 ‘대운 아나고’라는 곰장어구이집에서 숯불 피우는 일까지 돕고 있으니 포잡 가수라는 주장이다.
강운은 지난 2022년 4월 방광암 진단을 받고 입원 중 “이대로 떠나는 건 억울하다. 앞으로 후회하지 않을 일이 뭐가 있을까”라고 궁리하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수의 꿈을 이루자는 생각으로 가사를 쓰기 시작했다. 20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가 고생하시는 모습이 생각나 눈물을 흘리며 쓴 가사가 ‘녹차 따는 울 어머니’였다. 아는 후배를 통해 작곡가 송결 선생에게 보여주니 “가사가 너무 좋다”면서 곡을 붙여줬고 덕분에 녹음을 하고 발표를 해 가수의 꿈을 이뤘다. ‘녹차 따는 울 어머니’를 듣다보면 그의 어머니가 일당을 받고 녹차 밭에서 녹차 잎을 따는가 하면 갯벌에서 꼬막을 캐는 등 온갖 고생을 하신 모습이 눈에 선하다.
강운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해평리 시골 마을에서 3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명은 강형길. 원래 부잣집이었다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교를 다녀오면 나무를 하러 다녀야 할 정도로 가난하게 자랐다.
외지로 돈 벌러 떠난 누님들이 막내만은 가르쳐야 한다며 돈을 보내줘 벌교상고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2학년에 올라갈 때 누님들의 돈이 오질 않아 학업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가서 당감동에 있던 동양고무의 신발공장에 취직했다. 이후 앨범공장, 섬유공장, 금은방 세공일, 붕어빵 장사, 군고구마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DJ의 멋진 모습에 반해 자신도 DJ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1981년 부산 서면에 있던 나이트클럽 백악관과 원투쓰리에서 DJ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후 20년 간 전국을 떠돌며 나이트클럽 DJ로 활동을 했다. 나이트클럽 DJ 일을 하면서도 낮에는 거리의 장사꾼으로 나설 정도로 억척같이 돈을 벌었다.
1991년 나이트클럽에 손님으로 온 여성과 결혼했으나 2001년 이혼했다. 그 과정에서 전 아내의 카드 빚 수억원을 떠안아 빚쟁이가 됐다. 그 빚을 갚기 위해 트럭운전을 배워 트럭 기사로 일하다가 다시 나이트클럽 DJ로 2011년까지 일했다.
재혼을 한 아내와 함께 대구 시내에서 막창식당을 운영하면서 호박나이트클럽에 직접 투자하고 메인 DJ로 일하며 제법 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횟집까지 개업할 정도였다.
그러나 과욕이 문제였다. 하루는 아는 선배가 찾아와 경기도 오산에 1000평 규모의 나이트클럽이 생겼다는데 한번 가보자고 했다. 그 선배는 나이트클럽을 함께 인수해 운영해보자고 제안했고 아내와 누나들이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거의 전 재산을 털어 투자를 했다.
개업하자마자 손님들이 몰려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손님이 부쩍 줄었다. 입구로 나가보니 그 선배가 젊은 손님들은 받을 수 없다면서 돌려보내고 있었다.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며 다 받아들이자고 얘기했지만 선배는 젊은 사람들은 입장시키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다. 두 동업자의 의견이 맞지 않으니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개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망하고 말았다.
빈털터리가 되자 죽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두 살된 아들 대운이를 위해 다시 힘을 냈다. 아내는 식당에 취직하고 자신은 폐기물업체 덤프트럭 기사로 운전을 시작했다. 부부가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아들 이름을 딴 식당 대운 아나고를 개업했고 10년째 운영하다 포잡 가수까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