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① 나그네 하나
박지효 기자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여로에게.
길을 가다가 지쳐버려서, 잠시 성곽 안으로 들어왔어.
성을 찾은 것도 오랜만이라, 그 김에 네게도 편지를 남겨.
내가 길에서 뭘 봤는지 알려주려면, 편지가 세 장이라도 모자랄 테니까, 이건 차차 얘기하도록 하자.
잠시 숨 좀 돌리면서, 벽난롯가에서 네가 알려준 콩포트를 만들어 먹었어.
콩포트는 잼이랑 다르게 설탕이 많이 들어가지 않아서 오래 보관할 수 없다며?
난 이것도 너무 달아서 혀가 아릴 지경이었는데,
잼이란 건 얼마나 달까.
그것도 다시 만나게 되면 알려줘.
네가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나는 길을 가다가도 언제든지 다시 성 안으로 들어올 테니까.
명색이 겨울인데, 몸 상할 일 없길 바라.
여로 가운데서 다시 너를 만날 때까지, 안녕히.
-한으로부터.
낯선 변화의 시작
자욱한 연기.
시야가 흐릿할 정도로 짙은 안개 속, 나는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죽은 듯 고요한 사위는 어떤 소리가 들려올 때보다도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명도가 그리 낮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별다른 광원이 보이지 않아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 누구 없나요. 당장이라도 맹수가 튀어나올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공포감이 피워낸 미약한 목소리는, 광활한 공간에 비해서는 너무나 작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도움을 청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무력감에 들었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향한다. 그래, 어차피 아무도 없었는데. 무얼 바라고 그리 크게 소리친 걸까. 허탈과 자조는 쉬웠다.
이상한 합리를 진리로 품어버린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냥, 이대로 무(無)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어도, 아무 문제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아니, 정확히는,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순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뿌연 안개 너머로, 어떤 인영이 눈에 들었다.
머리와 발, 길게 뻗은 긴 지팡이. 그것이 사람의 인영이라는 것은, 그리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흐린 시야로 관찰해도, 잔뜩 남루한 나그네의 행색. 긴 망토로 온몸을 감싼 나그네는 아무런 징조도, 목소리도 없이 발치에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저자는 누구일까. 나는 홀린 듯이 나그네에게로 손을 뻗었다. 분명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저 고요한 나그네를 바라보고 있자니, 이름 모를 슬픔과 향수(鄕愁)가 가슴 깊이 흘러들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 마냥.
성말라 있던 볼 위로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나는 그를 붙잡기 위해 미력한 손을 뻗었다.
요동 없던 감정의 골이 오작동하기라도 한 듯, 이름 모를 애상이 공간 전체를 향해 번지던 그 순간.
“… 그러니 여러분들도 꿈꿔 마지않던 곳이겠죠? 이곳에 앉아 있을 정도면, 우리 학교에 오기 위해 이를 갈았을 테니까요.”
번뜩 현실로 돌아온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강단에 선 교수는 강당에 앉은 학생들을 둘러보며 한창 강연에 열중하고 있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잠시 허우적대던 나는 침을 삼키며 허리를 좀 더 곧추세웠다.
… 울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뭐 때문에 울었지? 볼을 쓸어봤지만, 물기라곤 하나 없이 건조하기만 하다. 요즘 잠이 한창 부족하다 싶었는데, 아예 눈 뜬 채로 졸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나마 수업 중은 아니었다는 게 다행이려나.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졸업 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상급 학교의 입학 설명회. 최종 지원이 멀지 않았기에, 강당에 모인 아이들의 모종의 어떤 긴장이 감돌았다. 아마 이 안에 있는 사람 중 가장 태연할 수 있는 건 침을 튀기며 제 학교의 명성을 말하는 저 교수뿐일 터다.
“알다시피 우리 학교의 졸업생들은 대부분 정부 소속 연구원이 되어 학문을 계속 발전시켜 나가거나, 의료원에서 인간을 살리는 일을 하죠.”
교수가 손짓하자 프롬프터가 파란빛의 홀로그램을 띄웠다. 실험실에서 페트리 접시를 들고 있거나, 인간 모형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의 형상. 교수는 주먹을 꼭 쥔 채 낮게 탄성을 지르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이것들은 사회에서 가장 선망받고, 존경받는 직업들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그 직업의 발판이 되는 우리 학교에 올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죠? 뭐. 그나마 이곳에 앉은 여러분들이 올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긴 하지만, 절대 쉽게 올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하하, 그렇게 긴장한 표정 지을 거 없습니다.”
어차피 못 올 사람은 못 와요. 교수가 홀로그램을 지우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얼굴은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다만 그 갑작스러운 정색에서는 모종의 경고나… 가소로움 따위가 읽힐 뿐이었다.
어차피 못 올 사람은 못 온다. 잔인하게 들리지만 사실이었다.
“미래를 갖고 싶다면 지금을 희생하세요. 그것이 가장 빨리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럼 이상으로 설명회를 마치겠습니다.”
마지막에 던진 경고는 학생 모두를 향한 것이었다. 학생들은 얼굴에 떠오른 긴장감을 지우지 못한 채로, 소극적인 박수를 쳤다. 학생들은 강단에서 내려오는 교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붕 뜬 듯한 공기. 학생들은 저마다의 각오를 가진 채로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는, 주변이 부산스러운 와중에도, 그곳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미래를 갖고 싶다면 지금을 희생하라. 그 엄숙한 경고가 심장에 머물러 있다가 공기를 타고 위로 올라가 머리를 시끄럽게 울렸다.
“야, 뭐해. 나가자.”
“아, … 응.”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치고 나서야 나는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을 드니, 붉게 상기 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하급 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던 한결이다. 꿈꾸던 무언가를 마주한 사람처럼, 한결은 드물게 눈을 빛냈다.
“너무 멋지지 않아? 요새 포인트 많이 깎여서 좀 시들시들했는데, 정신이 확 들었어.”
“글쎄… 당연한 얘기이긴 하니까.”
“에이, 재수없는 놈. 원래 잘하는 새끼는 다르다 이거야?”
한결이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렸다. 그 거친 손길을 익숙하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나는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조용하다는 걸 깨닫고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 멀지 않은, 당도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미래. 한결처럼 흥분감에 얼굴을 붉히거나, 강당을 나가던 애들의 낯빛에 서린 긴장이 마음을 차갑게 했어야 맞는데. 심장은 아무런 고동도, 징조도 없이 잔잔하기만 했다.
“그게 아니라, 그냥… 아니야. 다음 수업 준비하자.”
나는 굳이 한결에게 이 기이한 느낌을 말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다시 의지를 불태우는 애한테 나는 별로 흥분되지 않는다, 따위의 부정적인 말을 뱉을 수가 없었으니까.
“애들 나가면서 하는 얘기 들어보니까, 역시 생명 기술 개발 쪽이 인기가 많긴 한가 봐. 다들 이 학교 가고 싶다고 하던데.”
“난 잘 모르겠는데. 너도 이 학교 원하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아무래도… 돈도 많이 벌고, 교수님 말씀대로 사람들 인식도 좋고.”
한결이 하나, 둘 손을 꼽으며 장점들을 나열했다. 오늘 입학 설명회는 생명 과학 분야에 있는 상급 학교에서 주최했고, 한결의 말대로 생명 분야는 인기가 많은 직종이었다. 비슷한 설명회와 달리 유독 술렁거렸던 아이들의 반응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인기가 많은 만큼 경쟁은 치열했고, 아이들의 꿈이 좌절되는 경우도 가장 많은 분야이기도 했지만.
“뭘 모르는 것처럼 얘기해. 너도 이 학교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작년까진 그랬지. 근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 꼭 여기를 가야 하나 싶기도 하고.”
머뭇대며 꺼낸 말에 한결이 눈을 크게 떴다.
“너 성적 괜찮잖아. 여기 안 가면 어딜 가려고?”
“좀 다양하게 생각해 보려고. 첨단 공학이나 항공 우주 쪽도 괜찮고… 어쨌든 생명 쪽만 인정받는 건 아니니까.”
“와… 역시 공부 잘하면 학부를 골라갈 수도 있구나. 여러 군데 지원하려면 포인트도 많이 필요하잖아.”
자랑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한결이 경탄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머쓱해져서 손을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고민의 폭이 넓어진 것도 이상한 심리 작용이 날 지배한 결과였으므로, 내보여서 좋을 것은 없었다.
띠링. 그때, 알림 소리와 동시에 눈앞에 메시지가 하나 떠올랐다. 발신자는 담임 선생님이었다.
무슨 일이지? 나는 살짝 긴장한 상태로 메시지의 잠금을 풀었다. 하지만 얼마 나지 않아 맥이 탁 풀린다. 긴장한 것이 우습게도, 메시지에는 수업이 끝난 후 교무실로 오라는, 간단한 문장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 한결아. 나 최근에 뭐 크게 실수한 거 있던가.”
“네가? 딱히 모르겠는데. 왜?”
“담임 선생님이 수업 끝나고 오라고 하셔서.”
“에이, 뭐 시킬 일 있으니까 부르셨겠지. 너 반장이잖아.”
한결이 긴장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정말, 단순히 그런 거면 좋겠다. 나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알림을 지웠다. 어쨌든 수업 하나를 더 견뎌야 했고, 불안감 때문에 집중하지 못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다하며 교실로 향했다. 뛰지 않는 심장의 고동도 애써 뇌리에서 지우려 노력하면서.
-
위태롭던 세상이 뒤집혔던 날을 기억하는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다. 핵 분쟁, 나날이 나빠지는 국가 간의 갈등, 줄어가는 자원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속도로 증가하는 인구. 숱한 문제들이 이미 병들어 가던 위태로운 지구를 덮었던 혼란의 나날들. 결국 지구가 택한 것은 일순간의 파멸이었다. 모든 도의를 편리에 희생시키고는 이기심밖에 남지 않은 인간에게 분노한 환경이, 결국 인간을 집어삼킨 것이다.
셀 수 없을 만큼의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파멸은 본질적으로 인간보다 공정했던 것인지, 그가 아가리를 벌린 곳은 동서고금의 구분이 없었다. 지구 면적의 절반이 넘는 곳이 갈라지고, 불타고, 물에 잠기고 나서야 만족한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절반을 훌쩍 넘는 인류가 죽고, 문명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나 인간의 씨앗은 한 번 짓밟힌 것으로 좌절될 만큼 미약하지 않은 모양이었는지, 인간들은 초록빛이 고작 삼분의 일 남짓밖에 남지 않은 황폐한 지구에서 또다시 문명을 피워냈다.
파멸 직후의 문명은 생활 수준이 중세 시대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미 한 번 고도의 성취를 이뤄낸 적 있던 인간들은 빠르게 본래의 발전 수준을 회복하는 것을 넘어 최첨단 사회를 이끌어냈다. 놀라운 것은, 그러기까지 이 백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게 한 발전은 과거 이기심으로 화를 입은 것을 교훈 삼아, 타아(他我)를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자연을 해치지 않고 발전하는 방법은 다름 아니라 자연에서 출발한 과학에 있었고, 그 본질을 통해 어느 한 곳이 무조건 무언가를 내어놔야 하는 자기 파괴적인 방식을 넘어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첨단 사회라고 불리는 현재는 과학을 토대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믿기 힘든 그 흐름은 교무실 한쪽 벽면에 자랑스레 나열되어 있었다. 마치 훈장 마냥, 혹은 그 안의 풍경이 쉽게 이루어 낸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경고 마냥.
파란 스크린 위에 떠올라 있는 그것을 멍하니 좇던 나는 문득 길어지는 빛에 시선을 옮겼다. 단정한 칸막이가 세워진 책상, 여러 대의 컴퓨터. 빛이 닿는 모든 것에 지는 햇살이 내려앉는다. 노을이 지는 하늘은, 하늘의 시야가 닿지 않는 실내까지도 부드럽게 안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노을이 물들인 창문과 교무실 풍경을 가늠하듯 비교했다.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이 주홍빛으로 물드는 찰나의 순간은, 사무적인 풍경에 그 어떤 신비성을 부여한다.
노을이 지고 나면 생기는 이런 필연처럼, 이 세계에는 보이지 않아도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들이 있었다.
“얼마 전에 걔 자퇴한 거, 포인트 떨어져서 그런 거래. 상급 학교 갈 점수가 안 돼서.”
“헐… 그 애가 그러면 우린 어떡해. 행동 더 조심해야 하는 거 아냐?”
가령, 교무실의 얇은 벽 너머 들리는, 이 학교의 학생들 사이에 조용히 녹아든 공통적인 대화 같은 것. 나는 괜스레 툭, 툭 바닥을 찼다. 분명 익숙한 대화들인데, 황혼을 맞으며 듣는 저것들은 말 하나하나 무게추가 되어 가슴에 달렸다.
그래, 이 학생들 안에는 그런 ‘지배자’가 분명히 존재한다. 다만 그것은 노을처럼 아름답지 않다는 게 문제였고, 이 학교의 대부분은 그것이 존재하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목적지 모를 어딘가로 끌려간다는 게 문제였다….
“아, 여명아. 이미 와 있었구나.”
“… 안녕하세요.”
한창 상념에 빠져들던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눈에 익은 회색 카디건이 보인다. 30대 중반 정도, 짙은 피로를 숨기지 못해 조금 남루한 얼굴. 입학 설명회가 끝난 후, 날 교무실로 부른 담임 선생님이었다.
“이리 앉으렴. 멍하니 있던데,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아니요… 다들 똑같이 힘들 시기인데요, 뭘.”
뭘 새삼스레. 나는 예의란 단어를 찾아볼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삼켰다. 보건 선생님이라 그런 걸까. 다정이란 개념이 낯선 이 학교에서, 선생님은 드물게 연민이란 것을 지닌 사람이었다.
피로에 찌든 몰골로 다니면 칭찬을 해주는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게, 담임 선생님의 입에서는 걱정 어린 말들이 먼저 나오곤 했으니. 온통 냉한 이 학교에서, 찰나라도 온기가 느껴진다면 보통 이 선생님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물론 피로하지 않은 몰골로 다니는 아이들이 더 드물었기에, 선생님의 입에선 걱정이 마를 날이 없었다. 다정의 파편을 지닌 사람은 드물고, 드문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기에, 선생님의 뒤에는 항상 우려 섞인 말들이 따라다니곤 했다. A반 쌤, 그러다 얼마 못 가 나가떨어져요. 이맘때 애들 피곤한 게 당연하지 뭘 그리 유난을 떨어.
뭐, 나라고 그다지 다르게 생각한다는 건 아니다. 다정이란 것은, 이곳에서 그리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었으니까. 흘러가는 삶을 지탱하기에도 이미 충분히 바쁜데, 다정의 파편을 하나하나 주워 모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것은, 이 학교에 있는 누구라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다만 그 지배자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요즘은, 얘기가 조금 다를 뿐이었다.
그 어떤 것이든, 근본적인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이 우선이었는지, 원래부터 다정을 터부시하는 것이 맞았던 건지. 온갖 것들이 뒤죽박죽 뒤엉켜 고요했던 수면에 돌을 던졌다. 파문이 한 번 일고 나면, 그 후에는 진리에 의문을 품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정말 그 주황빛 노을 같은 이치는, 대부분 가지지 못하는 여유가 있을 때 주워 모을 수 있는 것이었는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지…
“여명아?”
아.
“… 죄송합니다. 집중을 못 했어요. 다시 한번만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목소리를 인지한 순간, 아연한 가슴이 사고를 뚝 멈춘다. 살짝 높은 시야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선생님의 시선이 어딘가 척척하고 진득하게 느껴진다. 나는 주먹을 꼭 쥐며, 쿵쿵 뛰는 가슴의 고동을 내리누르려 노력했다.
언제부턴가, 인지할 새도 없이 빠져드는 잡념이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었기에, 나는 아득한 기분을 느끼며, 잠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웬일로 네가 딴 생각을… 어제 잠은 충분히 잤니?”
“요새 한창 평가 시즌이라… 집중할게요. 죄송합니다.”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에 죄송하다는 말이 따라붙는다. 진정성 없어 보이는 사과가 화자인 내가 봐도 과도하게 느껴지긴 했으나.
‘모범생’의 태도로는 이 편이 나았다. ‘지금 선생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한 것은 실수였고, 앞으로 더욱 주의해 번복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라는 함의를 내비치면, 적어도 예의가 없거나 성실하지 못한 학생으로 낙인찍히는 것은 면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 모쪼록 건강 관리 잘해야 한다. 평가 포트폴리오 최종 제출까진 꽤 많이 남았으니까, 지치면 안 되지.”
선생님이 입꼬리를 어색하게 당겨 웃었다. 조금 씁쓸한 미소였다.
“아, 내가 부른 이유는… 우리 반에 전학생이 한 명 올 거란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서.”
“… 전학생이요?”
태도 불량을 별달리 지적받지 않았다는 안심도 잠시, 의외의 단어에 눈이 크게 뜨였다. 선생님은 의문을 그리 오래 끌고 가지 않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이 시기에 전학을 오는 게 흔치는 않지만, 전국 시험 성적이 워낙 좋아서 학교에서 이례적으로 받아줬다고 하는구나. 마침 네 방에 자리가 나서, 앞으로 너와 같은 방을 쓰게 될 거야. 무엇보다 반장이니 적응을 좀 도와줬으면 해서 말이다.”
좀 갑작스럽긴 하지? 선생님이 동의를 구하듯 덧붙였다. 아니, 갑작스럽다기보단… 나는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온 정보를 정리했다.
가능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적이 뛰어나다는 전학생이 왔고, 마침 룸메이트가 자퇴해 자리가 난 내 방을 쓰게 될 거고… 말마따나 갑작스러운 소식이 놀랍긴 했으나, 하나하나 뜯어 살펴보니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우리 학교는 시험 성적 말고도 면접을 거친 후에야 전학을 받는다. 따라서 아무리 나쁜 상황을 가정해도 크게 사회성이 떨어지는 애는 아닐 테고, 어차피 앞으로는 각자의 일이 바쁠 테니 서로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을 거다. 이 변화가 내 생활에 그리 큰 영향을 주진 않을 것 같다는 얘기였다. 학교생활에 필요한 표면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기도 했고.
약간의 침묵 뒤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선생님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큰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은 건 덤이었다.
“잘 도와준다면 솔선수범으로 포인트도 지급이 될 테니 힘내렴. 사감 선생님께 전학생 이름이 들어간 것으로 방 이름표 다시 받아두고.”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말이 끝나자, 나는 상투적인 인사와 함께 살짝 목례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인트 받을 명목이 더 생기는 건 좋은 일이었으므로, 내겐 오히려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쁘지도, 짜증이 나지도 않던 그 무감한 순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다. 변하는 건 없을 거라고.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②회에서 계속)
박지효 기자 jihyop@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