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이 생성형 AI와 엔터테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제작 효율성의 극대화와 창작의 본질이라는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음원 프로듀싱부터 버추얼 아이돌,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기술 도입은 제작비를 크게 낮추고 자본 장벽을 허물며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생존 무기와 IP 확장성을 제공하고 있다. 본 기획 시리즈 [K팝과 AI 혁명]은 K팝 프로덕션의 세 가지 핵심 축인 작곡가 작업실, 버추얼 아이돌·팬덤, 뮤직비디오 제작 현장을 들여다보고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술이 허무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인간 창작자의 가치와 K팝의 미래를 짚어본다.
한국디지털디엔에이센터에서 촬영된 사진을 AI로 작업하는 과정. 사진=IS포토
9월 서울 모처의 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메라 렌즈도, 흙먼지 날리는 대형 세트장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웅성거리는 키보드 소리와 모니터 열기 속에서 10여 명의 제작진이 빽빽하게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모니터마다 수많은 컴퓨터 명령어와 작업 창들이 복잡하게 떠 있었고, 그 너머에서는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최근 공개 3일 만에 조회수 130만 회를 돌파한 그룹 어센트의 ‘이프 아이 다이 투모로우’ 뮤직비디오를 비롯해 가수 박재범의 콘서트 영상, 그룹 키라스의 ‘타타’ 뮤직비디오가 탄생하고, 현재도 K팝 그룹들의 뮤직비디오 제작이 한창인 찹스틱 스튜디오 현장을 찾았다. 프롬프트에 글자를 입력해 영상을 만드는 과정. 사진=IS포토
◆영상 초보도 감독이 되는 공간
현장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스튜디오를 채운 10여 명 직원들의 다채로운 이력이었다. 보통 뮤직비디오나 대형 그래픽 제작사라고 하면 수십 년 경력의 베테랑 스태프와 엄청나게 비싼 장비를 다루는 전문가가 필수적이지만, 이곳은 달랐다. 뮤직비디오를 한 번도 만들어본 적 없는 비전문가 출신들 또한 AI 도구를 손에 쥐고 제작의 핵심 역할을 맡고 있었다.
현장에서 만난 신종무 찹스틱 스튜디오 부대표는 “기존의 화려한 3D 그래픽 작업은 수년 동안 기술을 익혀야 하고 엄청나게 비싼 컴퓨터 장비가 필요했지만, AI 제작 환경에서는 영상에 대한 감각과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뛰어난 연출을 할 수 있다”며 “이곳은 다양한 분야에서 온 크리에이터들이 모여 각자의 아이디어를 AI로 구현하며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작업실에서는 컴퓨터에 연출하고 싶은 장면을 글로 적어 입력하자마자 몇 초 만에 영상 시안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무런 체계 없이 AI를 쓰면 쓸 만한 영상을 얻기 힘들지만, 이곳에서는 기획 단계부터 세밀하게 글과 명령어를 조율해 만든 영상의 대부분을 실제 뮤직비디오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품질을 끌어올렸다.
◆멤버 얼굴 왜곡 없이 깔끔하게…제작비는 10분의 1로 뚝
스튜디오에서는 계열사인 한국디지털디엔에이센터에서 제작한 정밀 입체 촬영 데이터를 기반으로 생성형 AI 작업이 이뤄진다. 그동안 AI로 만든 영상은 인물의 얼굴이 어색하게 변하거나 기괴하게 왜곡되는 문제가 자주 일어났는데, 이 스튜디오는 입체 스캔 기술로 확보한 원본 데이터를 AI 작업의 든든한 기준점으로 삼아 그 문제를 해결했다.
동그란 구 모양의 스튜디오에서 멤버들을 360도 방향에서 입체적으로 촬영해 실제 골격과 다양한 표정 데이터를 미리 확보해둔 덕분이다.
최민 한국디지털디엔에이센터 이사는 “디지털 DNA와 생성형 AI의 결합은 제작비 장벽을 크게 낮춰 중소 기획사와 신인 아티스트에게도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한다”라며 “향후 뮤직비디오뿐만 아니라 광고, 영화, 드라마, 공연 등 다양한 분야로 활용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만든 ‘디지털 분신’ 데이터를 AI에 입력하면, 멤버들의 실제 얼굴과 표정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배경만 멸망한 도시나 대규모 재난 현장으로 마음껏 바꿔치기할 수 있었다.
AI와 입체 촬영 기술의 결합 덕분에 제작비와 기간도 파격적으로 줄었다. 기존 특수효과(VFX) 방식의 뮤직비디오에 들어갈 비용과 비교하면 약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기획부터 완성까지 걸린 시간도 단 3주에 지나지 않는다. 대형 기획사가 아닌 중소 기획사나 신인 가수도 아이디어만 좋으면 대작 뮤직비디오를 만들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어센트 뮤직비디오 ‘이프 아이 다이 투모로우’를 AI로 만드는 과정. 사진=IS포토 어센트 뮤직비디오 ‘이프 아이 다이 투모로우’를 AI로 만든 결과물. 사진=뮤직비디오 캡처
◆기술보다 중요한 건 ‘팬들의 마음’ 읽는 디테일
K팝 뮤직비디오 작업에서 진짜 경쟁력은 바로 깊이 있는 ‘팬덤 연구’에 있다.
직원들은 그저 AI 영상을 만들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기획 단계부터 작업 시간의 상당 부분을 팬들의 니즈와 반응을 분석하는 데 할애한다. 멤버들의 작은 습관이나 생일, 취향은 물론 팬 커뮤니티에서 주고받는 반응까지 꼼꼼히 살피며 영상 구석구석에 숨겨놓을 디테일을 고민한다.
찹스틱 스튜디오의 경우도 크리에이터들이 팬덤 연구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은 덕분에, 학교 장면 속 폴라로이드 사진이나 멤버를 상징하는 소품 등이 프롬프팅을 거쳐 영상 속에 정교하게 녹아들었고 이는 팬들 사이에서도 큰 호응으로 이어졌다.
신종무 부대표는 “아이돌 뮤직비디오는 기술적으로 화려하게 만드는 것보다, 팬들이 봤을 때 ‘우리 가수의 매력이 잘 살았다’고 느낄 수 있는 포인트를 잡는 게 훨씬 중요하다”며 “결국 기술은 팬들이 사랑하는 아티스트의 매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