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이 생성형 AI와 엔터테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제작 효율성의 극대화와 창작의 본질이라는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음원 프로듀싱부터 버추얼 아이돌,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기술 도입은 제작비를 크게 낮추고 자본 장벽을 허물며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생존 무기와 IP 확장성을 제공하고 있다. 본 기획 시리즈 [K팝과 AI 혁명]은 K팝 프로덕션의 세 가지 핵심 축인 작곡가 작업실, 버추얼 아이돌·팬덤, 뮤직비디오 제작 현장을 들여다보고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술이 허무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인간 창작자의 가치와 K팝의 미래를 짚어본다.
노지훈 감독. 사진제공=본인
“수많은 경험과 인풋을 통해 키워낸 판단력이야말로 AI 시대에 창작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예요.”
영상 제작 및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생성형 AI라는 테크놀로지가 급격히 침투하고 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영상이 뚝딱 완성된다”, “CG 인력과 현장 생태계를 완전히 대체할 것이다” 등 대중과 시장의 기대 및 우려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하지만 최근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노지훈 감독은 이러한 시선을 일축하며, 테크놀로지가 거세게 몰아치는 영상 제작 현장에서 인간 창작자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AI가 단 몇 초 만에 수천 장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시대라 할지라도, 그중 어떤 결과물이 비전에 부합하는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일 예술적 가치를 지녔는지 가려내는 최종 열쇠는 결국 창작자의 ‘취향’과 ‘안목’에 달려있다고 강조했다.
노 감독은 영상 제작사 스튜디오 사피엔스의 대표이자 한성대학교 ICT융합디자인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인 연출가다. 무성영화 ‘10월 31일’로 베를린·LA·도쿄 영화제 및 뉴욕 시네마토그래피 어워즈에 공식 선정되며 주목받았다. 이승기, 멜로망스, 정승환, 이무진, 데이식스 원필 등 정상급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했으며, 원필의 ‘안녕, 잘가’로 2022 베를린 MV 어워즈에서 수상했다. 이처럼 영화, 뮤직비디오, 글로벌 기업 광고를 아우르며 뛰어난 연출 감각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지난해 가수 박혜원의 ‘영하’ 뮤직비디오에 AI 기술을 선제적으로 도입해 독보적인 영상미로 화제를 모았다.
노 감독을 만나 현장에서 체감하는 AI의 진짜 한계와 효율, 그리고 창작자로서 바라보는 영상 생태계의 미래에 대해 들어봤다.
AI를 향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제작 시스템 전체를 AI가 단숨에 대체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용도 줄고 인력도 필요 없으니 기존 제작 방식의 완벽한 대체재가 아니냐는 시선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노지훈 감독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필드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버튼 하나 누르면 뚝딱 완성된다’는 건 현장을 잘 모르고 하는 오해예요. AI는 세밀한 디테일을 다루는 마이크로 컨트롤이 어렵기 때문에 원하는 단 하나의 컷을 얻기 위해 수많은 시도와 프롬프트 수정, 포토샵 합성 등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갑니다. 도저히 원하는 컷이 안 나와서 ‘차라리 직접 촬영하거나 CG 팀에 맡기는 게 돈과 시간이 덜 들었겠다’ 싶은 순간도 존재하죠.”
사진제공=박혜원 ‘영하’ 뮤직비디오 캡처
서정적인 영상미가 돋보인 박혜원의 ‘영하’ 뮤직비디오 작업 당시를 떠올린 노 감독은 “인물에 AI를 적용할 때 발생하는 ‘불쾌한 골짜기’ 현상 때문에 실사 촬영을 베이스로 두고, 손에서 얼음이 피어나거나 사슴이 등장하는 등 데이터가 풍부한 자연물·동물 위주로 후반 작업(VFX)에 선택적 결합을 시도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미국 사막 연출 작업에서도 편집 프로그램과 연동된 생성형 AI로 불꽃을 합성하는 식으로 활용했다”라며 “AI는 촬영과 편집을 보존하고 보조하는 툴일 뿐, 세밀한 제어와 디렉팅은 결국 인간 창작자의 피나는 노력이 수반된다”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제작 현장에서 AI가 가진 진정한 효용성은 어디에 있을까. 노 감독은 ‘기획 단계의 시각화’와 ‘특정 컷에서의 제작비 절감’을 꼽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 정보 검색에 도움을 받기도 하고, 특히 과거에는 레퍼런스를 찾아 짜깁기하거나 아티스트에게 의뢰해야 했던 콘셉트 아트 작성을 생성형 AI로 수분 만에 구현할 수 있습니다. 기획안 작성 시 전체적인 톤앤매너를 직관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게 된 거죠.”
최근 작업 중인 신규 프로젝트를 언급한 노 감독은 “가수의 출연 없이 가상 인물과 메타포 위주의 비주얼로만 구성하는 AI 뮤직비디오를 작업 중”이라며 “K팝이나 패션 필름처럼 독창적인 비주얼을 선호하는 분야에서는 AI 특유의 이질적인 느낌을 오히려 ‘힙하고 실험적인 요소’로 승화시키기도 한다”라고 전했다.
사진제공=박혜원 ‘영하’ 뮤직비디오 캡처
그러나 인간의 안목이나 창작자의 주관 없이 오직 AI 알고리즘에만 의존해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내비쳤다.
“대중과 팬들의 심리는 대단히 역설적입니다. AI 기술의 뛰어남에는 감탄하면서도, AI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버튼 누르면 나오는 것’으로 치부하며 그 콘텐츠의 예술적 가치나 노력을 낮게 평가하곤 해요. 1시간 30분~2시간짜리 영화 전체를 AI로 채우면 피로도도 극심해지고 극장 티켓값에 상응하는 가치를 느끼기 어렵습니다. 팬들이나 대중이 사랑하는 건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창작자의 고유한 취향과 ‘휴먼 터치’, 그리고 진정성입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AI 도입의 또 다른 이면은 ‘신인 육성의 부재’와 ‘품질 저하’다. AI가 보조 업무를 척척 해내면서 신인 연출자가 현장 경험을 쌓을 기회가 사라지는 데다, 전문가들의 집단지성 대신 1인 제작에 의존할 경우 영상 전반의 퀄리티가 하향평준화될 수 있다는 우려다.
“과거에는 어시스턴트나 하위 스태프 단계를 거치며 현장 노하우를 쌓았지만, AI가 보조 영역을 대체하면서 신인 연출자들이 경험을 쌓고 판에 진입할 수 있는 사다리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존 프로덕션은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분야별 전문가들의 집단지성으로 깊이 있는 퀄리티를 만들어냈지만, 1인이 AI로 겉핥기식 제작을 하게 되면 전반적인 영상의 평균 퀄리티가 하향평준화될 위험도 크다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노지훈 감독. 사진제공=본인
기술 상향평준화 시대, 노지훈 감독이 그리는 영상 창작자의 지향점은 ‘기술의 노예’가 아닌 ‘명확한 비전과 안목을 갖춘 지휘자’다.
노 감독은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연출관을 언급하며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비전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그걸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AI는 인간 창작자를 전면 대체하는 주체가 아니라, 창작자의 비전을 실현하도록 돕는 강력한 새로운 도구이자 장르라는 의미다.
“과거 카메라와 사진이 나왔을 때 미술이 사라질 거라 우려했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작가가 존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화나 영상 제작은 혼자 뚝딱 결과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스태프, 배우와 소통하며 만들어가는 ‘과정’ 그 자체에 고유한 가치가 있죠.”
끝으로 그는 “영상에 대한 기본 이해와 나만의 취향을 단단히 다져나간다면, AI는 비전을 실현해 줄 가장 든든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