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 OK금융그룹 회장은 지난 4월, 한국배구연맹(KOVO) 총재 및 총재추천위원회를 향해 '6대 혁신안'을 보냈다. 야구·축구·농구 등 다른 구기 종목들이 콘텐츠 파워를 강화하는 동안 배구는 큰 위기에 빠졌다고 봤고, 이에 경쟁력 제고를 위해 주요 정책을 제언한 것이다.
2012년 네이밍 스폰서로 드림식스(현 우리카드)를 후원하고, 이듬해 남자배구 '7구단' 읏맨배구단을 창단하며 구단주로 배구계 리더가 된 지 14년째, 최윤 회장이 이토록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한 건 처음이었다.
KOVO는 지난 시즌 V리그가 60만 관중을 돌파했다고 알렸다. 하지만 내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방송 시청률은 0.5%대에 머물고 있고, 화제성도 줄었다. 남자배구 세계 랭킹은 25위까지 밀렸다. 9월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녀 대표팀 모두 메달 획득에 실패할 만큼 국제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
최윤 회장은 국내 리그 성장, 국제 경쟁력 강화, 선수 가치 상승이라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 운영 기구와 각 배구단이 얼마나 절실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반문하며 "지금은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고 팬 중심의 체질 개선에 나서야 할 골든 타임이다. 특히 (운영 기구) KOVO가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라고 일갈했다.
개혁의 첫걸음, 배구팬과 접점 확대
최윤 회장이 현재 V리그 운영에서 가장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문은 경기 수와 편성이다. 그는 "랠리 한 번에 체육관 전체가 숨을 멈추는 매력적인 종목이 배구다. 그러나 팬들이 경기장을 찾을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타 종목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 크게 아쉽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정규리그 기준 팀당 36경기만 치르는 현행 제도를 개선해 적어도 42경기, 장기적으로는 54경기까지 늘려야 한다고 봤다.
2027~28시즌부터 외국인·아시아쿼터 보유 선수가 종전 2명에서 3명으로 확대되며 국내 선수 출전 시간 감소와 경쟁력 약화가 우려되고 있다. 최윤 회장은 "경기 수가 늘어난다면, 외국인 3명으로 한 시즌을 온전히 치를 수 없기에 국내 선수 출전 시간도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수준 높은 외국인 선수들과 치열하게 붙으며 성장해 국제 무대 경쟁력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주말 경기 편성 비율도 크게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V리그는 토요일과 일요일, 각각 남녀부 한 경기씩만 열린다. 전체 경기 일정의 3분의 1 수준. 최윤 회장은 "유원지나 백화점에도 평일 방문객은 적다. 학생·직장인 모두 (평일 경기 시작 시간인) 오후 7시에 맞춰 이동하기 어렵다. 몇몇 팀 홈은 경기장 접근성도 떨어진다"며 "응원하는 팀의 주말 홈경기를 한 달에 1번, 한 시즌에 6번만 갈 수 있는 셈이다. 이런 프로 스포츠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윤 회장은 주말 관중이 평일 대비 150~170% 정도 많은 점, 일본 SV리그도 주말 2연전 편성을 도입해 관중과 입장 수익이 크게 증가한 점, 무엇보다 지난 시즌 읏맨배구단이 홈(부산)에서 치른 주말 6경기 모두 매진을 달성한 점을 근거로 변화 추진의 필요성을 어필했다.
목표는 팬 퍼스트, 고정관념·편의주의 버려야
최윤 회장도 방송사 중계 편성, 경기장 대관, 심판·진행 요원 등 운영 인력 배치 등 주말 경기 확대에 따른 현안이 적지 않다는 걸 안다. 이에 대해 그는 "레거시 미디어(TV) 중계에 제약이 있다면,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나 유튜브 등 뉴미디어 플랫폼을 활용할 수 있다. 경기 시간도 탄력적으로 두는 등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팬 퍼스트에 원칙을 두고 머리를 맞대결 지혜로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다.
최윤 회장은 KOVO가 팬 중심의 리그 운영을 펼친다면, 각 배구단이 향상된 자생력을 바탕으로 배구 발전을 위해 재투자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를 위해 배구를 '겨울철 스포츠'로 단정하지 말고, 필요하다면 프로야구와 리그 일정이 겹치더라도 정규리그 운영 기간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고정관념을 버리고, 프로 리그로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집중하는 얘기였다.
최윤 회장은 그동안 배구뿐 아니라 럭비·골프·농아인야구 등 많은 종목 구단을 운영하거나 후원했다. 올림픽·아시안게임 선수단장·부단장도 맡아 현장 지원에 힘을 쏟기도 했다.
그는 경쟁하고 협동하며 리더십을 배울 수 있는 스포츠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있다. 성적 지상주의에 매몰된 기형적 구조 속에서도 국제 대회마다 기적적인 성과를 낸 한국 스포츠의 과거와 현재에 감탄하면서도, 이제 학교 체육도 선진국형 시스템이 정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동안 기력과 기백을 통해 기적을 만들었다. 이제는 그게 통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모든 학생이 자연스럽게 스포츠를 경험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전문 선수의 길을 선택한 이들에겐 충분한 훈련 시간과 체계적인 육성 지원이 보장돼야 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학교 체육까지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최윤 회장이기에 유소년 배구 육성 방향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소신을 갖고 있다. 그래서 개혁 의지가 전혀 없는 배구인들이 변화가 마뜩잖아 대는 핑계에 동의할 수 없다. 최윤 회장은 "과거의 편의주의나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과감한 개혁과 투명한 제도를 확립해야 한다. '어렵다'라는 이유로 이 과제를 더 미룰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각 배구단 최고 의사결정권자들(구단주)이 직접 한자리에 모여 거시적인 관점에서 인식을 공유하고 협의하는 긴밀한 '구단주 협의체' 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한 팀의 구단주가 아니라, 배구계 전체를 위한 제언이었다. 지금이 한국 배구의 위기이자 기회, 즉 골든 타임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안희수 기자 anheesoo@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