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10건
스타

‘영원한 맨발의 청춘’ 故신성일, 오늘(4일) 6주기

고(故) 배우 신성일의 6주기가 찾아왔다.고 신성일은 지난 2018년 11월4일 전남대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향년 81세. 앞서 2017년 6월 폐암 3기 진단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았으나 투병 끝에 하늘나라로 떠났다. 사망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레드카펫에서 건강한 모습을 보여 안타까움을 더했다.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신성일은 이후 ‘맨발의 청춘’, ‘동백 아가씨’, ‘5인의 건달’, ‘별들의 고향’ 등 청춘 멜로영화로 1960∼80년대를 휩쓴 인기 스타였다. 1979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을 역임한한 그는 ‘연애교실’, ‘어느 사랑의 이야기’ 등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출연작만 524편, 감독 4편, 제작 6편, 기획 1편 등 다작한 영화계의 큰 별이었으며 2000년 16대 총선에 당선돼 의정활동도 펼쳤다.고 신성일은 동시대 인기 배우 엄앵란과 결혼해 1남 2녀를 뒀다.이주인 기자 juin27@edaily.co.kr 2024.11.04 08:24
연예일반

故 신성일, 오늘(4일) 사망 4주기… 계속 기억될 영화계 큰 별

배우 신성일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흘렀다. 신성일은 지난 2018년 11월 4일 폐암 투병 끝 눈을 감았다. 향년 81세. 고인은 지난 2017년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아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사망 전날부터 병세가 위독해져, 치료를 받아오던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전남대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고 신성일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명작에 출연, 당대 최고 스타로 우뚝 올라섰다. 1964년에는 배우 엄앵란과 세기의 결혼식을 올려 화제를 모았다.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김다은 기자 dagold@edaily.co.kr 2022.11.04 10:29
연예

지지 않는 별이 되다…'사람이 좋다' 故 강신성일의 마지막 모습

고 신성일의 마지막 모습이 '사람이 좋다'를 통해 공개된다. 13일 방송될 MBC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배우 故 강신성일의 마지막 모습을 전한다. 1960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한국 영화의 상징이자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대배우 故 강신성일이 지난 4일 별세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임종에 대해 故 강신성일의 둘째 딸 강수화는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기 전 아버지의 투병 생활에 대해 털어놓는다.故 강신성일이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공식 행사인 2018 부산국제영화제의 비하인드 스토리 역시 만날 수 있다. 두 명의 간호사를 대동한 채 양 팔에 진통제를 맞고, 목까지 전이된 암 세포 때문에 목 보호대를 착용해야 해야 할 만큼 힘들었던 그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이유가 드러난다. 이장호 감독과 약속한 내년 크랭크인 예정인 영화 '소확행'에 대한 애정과 사망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고 그가 건재함을 알리기 위함. 한국 영화계의 거성 故 강신성일이 타계 3주 전에 보인 진솔한 모습과 영화에 대한 열정을 들여다본다.이 밖에도 한국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대배우이자 청춘의 아이콘이었으며, 미워하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故 강신성일과 그 가족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도 확인할 수 있다. '사람이 좋다'는 오늘(13일) 오후 8시 55분에 방송된다.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tbc.co.kr 2018.11.13 09:35
무비위크

신성일, 암 투병 중 별세..'맨발의 청춘'이 '별들의 고향'으로 [종합]

한국영화계의 큰 별, 배우 신성일이 타계했다. 신성일은 4일 새벽 전남의 한 병원에서 타계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판정을 받은 후 항암 치료를 받아왔다. 3일 오후 신성일의 사망설이 보도되며 오보 소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결국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신성일은 1960~1970년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스타이자 원조 미남 배우다. 1957년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에 높은 경쟁률을 뚫고 전속배우가 되며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했다. 당시 신상옥 감독으로부터 신성일이란 예명을 받았다. 이후 신필름을 나와 1964년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활동하던 배우들이 중후한 매력을 가진 것과 다르게 신성일은 카리스마 있는 반항아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청춘 스타로 자리매김한 후 '떠날 때는 말 없이'(1964), '불타는 청춘'(1966), '별들의 고향'(1974) 등 무수히 많은 히트작을 남겼다. 주연작만 500편을 넘겼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8년간 개봉한 1194편의 작품 중 324편이 그의 출연작이었다. 그와 함께 연기 호흡을 맞춘 여배우만 119명에 달했다. 연기 뿐 아니라 제작과 연출에도 도전해, '연애교실'(1971), '어느 사랑의 이야기'(1971),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1971)을 제작하고 연출했다. '그건 너'(1974)를 연출하고, '코리안 커넥션'(1990), '남자시장'(1990), '물 위를 걷는 여자'(1990),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 '안개 속에서 2분 더'(1995) 등을 제작했다. 많은 활동을 한 만큼 화려한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 1964년 제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아시아영화제, 황금촬영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청룡영화상 등 국내 다수의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과 남우조연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최근까지도 영화인으로 대중 앞에 섰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영화팬들과 만났다. 당시 신성일은 인터뷰를 통해 "젊은 친구들이나 나 하나쯤 몰라도, 관심 없어도 세상 사는데 큰 문제가 없겠지만 나이 좀 드신 분들은 내 영화를 보면서 자랐다. 그들에게는 의미있는 일이고 또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온 신성일이다"고 밝혔다. 또한, 암 투병 중에도 작품 활동 계획을 전하기도 했다. 영화 '행복'에 대해 "따뜻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다시 쓰고 있다. 내년 봄에 촬영 들어가려고 한다"고 이야기했고, "두 번째 작품은 김홍신의 소설 ‘바람으로 그린 그림’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다. 김홍신과 이야기를 하다가 영화저작권까지 다 받았다. 이렇게 2년 간의 일정이 잡혀있다"고 말했다. 쉬지 않고 영화와 함께해온 신성일은 결국 계획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무수히 많은 작품과 한국영화사에 써내려온 역사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1964년 당대 최고의 톱 배우 엄앵란과 결혼한 고인은 장남 강석현씨, 장녀 강경아씨, 차녀 강수화씨 등 슬하에 1남 2녀를 뒀다. 고인의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4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6일 진행되며 장지는 경북 영천이다. 박정선 기자 park.jungsun@jtbc.co.kr 2018.11.04 09:33
연예

신성일, 폐암으로 위독 "빈소 예약 후 취소"

영화배우 신성일이 폐암으로 위독한 상태다.3일 오후 신성일이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불과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사망은 아니며 현재 위독한 상태라고 정정됐다.신성일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한 후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수많은 히트작에 출연하며 '국민 배우'로 불렸다. 폐암을 앓아왔으며 지난달 부산국제영화제에 모습을 드러냈다.김진석 기자 superjs@joongang.co.kr 2018.11.03 20:31
연예

[속보] 영화배우 신성일 폐암으로 별세

배우 신성일이 3일 폐암으로 별세했다. 82세. 신성일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지방에서 항암 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이날 사망했다. 빈소는 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 31호실에 마련됐다. 유족들은 현재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조문객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성일은 1960년 영화 ‘로맨스 빠빠’로 데뷔,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 여자’ 등 수많은 히트작을 배출하며 국민 배우로 이름을 남겼다. 온라인 일간스포츠 2018.11.03 20:09
연예

[청춘은 맨발이다-136] 대구U대회 사건

2000년 1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나는 대구를 위해 발벗고 뛰었다. 95년부터 연임한 문희갑 시장은 나와 경북고 동기로서 든든한 동반자였다.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낸 문 시장의 핵심 사업은 99년 시작한 '밀라노 프로젝트'와 2003년 8월 10일 열리는 대구하계U대회였다. 밀라노 프로젝트는 대구를 세계적인 섬유·디자인 도시로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대구하계U대회(이하 U대회)는 부산아시안게임(2001)과 한·일월드컵(2002)에 자극을 받아 유치한 유일한 국제행사였다. 이런 국제행사가 출범할 때 시(市)가 주도권을 갖는 국제대회 체육진흥법이 마련된다. 엄청난 광고사업권이 따라붙기에 대구시가 사업자를 선정하고 사업자가 제공하는 기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U대회를 앞두고 진흥법 적용 기간이 짧은 편이었지만 대구시로선 당장에 300억원 확보가 가능했다. 문 시장은 U대회 유치 및 진행을 위해 체육진흥법이 발효되도록 나를 재촉했다. U대회를 앞두고 잇따라 악재가 터졌다. 2002년 10월 문 시장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되면서 공천도 받지 못한 채 3선에 실패했다. U대회는 전적으로 문 시장의 작품이다. 무소속으로 당선된 문 시장은 3선을 위해 연임 끝무렵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 사건으로 문 시장이 낙마하면서 한나라당은 유력한 공천자를 잃었고, U대회는 데미지를 입었다. 급조된 조해녕 신임 시장 체제는 2003년 8월 10일의 U대회를 앞둔 그해 2월 19일,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을 겪었다. 이 사건으로 20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시정의 모든 업무는 사망자 및 실종자 유족·부상자 가족 대표들의 시위로 인해 마비됐다. 전국의 성금과 대구시의 보상금으로 가족들에게 1인당 1억~6억원이 돌아가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우여곡절 끝에 U대회를 마무리했다. 그 해 평창이 동계올림픽 유치 1차 투표에서 탈락했다. 새 진흥법을 가질 수 있는 평창이 기회를 잃으면서 대구시는 U대회 체육진흥법 연장법안을 추진하도록 날 독려했다. 4년 연장하면 약 1000억원의 기금이 들어온다. 나는 문광위원회 상임위원으로 U대회 연장법안을 상정했다. 열린우리당 간사가 연장법안에 반대하고 있었다.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우리당의 소위원회 간사를 찾아가 "대구 좀 살려줘"라고 익살스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한나라당 소속이지만 상대당 의원들과 개인적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자 주위의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강 의원 좀 도와주라고"라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곧바로 열린우리당 간사 쪽에서 조정안이 들어왔다. 4년 기한을 2년 기한으로 조정하고, 여·야로 구성된 문광위 법안 소위원회와 문광위를 통과시키고, 법사위에서 법안 제안 설명을 해 통과시켰다. 그 결과 506억원의 기금이 떨어졌다. 기존의 300억원을 합쳐 모두 806억원의 기금을 따낸 것이다. 나는 2004년 8월 9일 그 공로로 체육훈장 맹호장을 받았다. 그해 의원 임기가 끝났다. 2005년 2월 19일 대구지검에서 "21일 출두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당시 옥외광고업자인 전홍의 박정하 회장이 부산아시안게임과 한·일월드컵·U대회의 광고사업권을 위해 60억원의 로비 자금을 조성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나는 박 회장에게 1억 7800만원의 정치 후원금을 받고 영수증을 내주었다. 검찰은 이를 대가성으로 보았다. 21·23일 조사를 받고, 25일 대구구치소에 구속 수감됐다. 난 이의를 달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법을 어기면 누구든 대가를 치러야 한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1.11.03 07:00
연예

[청춘은 맨발이다-130] 친구의 배신

믿는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마음에서 피가 난다. 그 상처는 지금도 나와 엄앵란에게 남아있다. 1981년 3월 11대 국회의원 선거 패배 후 많은 빚쟁이가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동부이촌동 현대APT에서 우리 아랫층에 살던 내 경북중·고 동창 손모가 있었다. 서울시내 지점장으로 꽤나 성공한 친구였고, 집안에 좋은 일 있으면 서로 기뻐하고 나눠먹는 사이였다. 선거 당시 내게 얼마의 돈을 빌려준 그 친구가 부도 직후 엄앵란이 운영하는 대구의 식당 '나드리예'로 찾아왔다. 손님이 한창 많은 점심 시간이었다. 손모는 손님들 앞에서 "엄앵란이 이리와"라며 야수처럼 덤벼들었다. "너 장사 다해 먹고 싶어? 오늘 6시까지 돈 마련해 놓아. 아니면 아버지 사람 80명 풀어 이 식당에서 매일 같이 데모할거야." 몸서리 친 엄앵란은 그 날 당장 다른 곳에서 빌려 손모의 돈을 절반 갚았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은 어찌 된거냐"는 엄앵란의 하소연을 듣지도 않고 보름 내에 잔금을 마련해놓으라고 엄포를 놓았다. 손모는 채무 회수일 사흘 전부터 자신의 여든살 아버지를 우리 식당에 보냈다. 나드리예 현관에 드러누워 있던 손모의 아버지는 내 머리채를 꽉 잡고 흔들어댔다. 나는 여든 노인에게 머리채를 잡힌 상태에서 쌍욕을 들으며 오른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친구 아버지라는 사람이 이토록 아들 친구를 욕보여도 되는 것인가. 한 대 치면 사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노인 때리면 내 인생 끝난다'는 생각에 꾹 참았다. 그 와중에 또다른 악재가 터졌다. 이번엔 내가 협회장으로 있던 배우협회 문제였다. 79년 3월 내가 협회를 인수했을 때, 전임 협회장인 장동휘는 선거에서 사용한 식대 250만원을 배우협회 채무로 남겨놓았다. 나는 내 돈으로 그 빚을 청산했다. 장동휘는 배우협회 재정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후임 협회장인 내게 회계장부를 넘겨줄 수 없었다. 그는 회계장부를 자신이 가져가는 조건으로 협회 사무실 점거를 풀었다. 나도 새 집행부를 꾸리려면 장동휘와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원수가 된 장동휘의 끄나풀 장모가 협회 운영비를 횡령했다고 나를 검찰에 고발했다. 내 회장 임기 2년 동안 협회는 9000만원 가까운 운영비를 만들었다. 그러나 11대 국회의원 선거로 협회에 신경쓰지 못한 사이, 사무국장이 운영비 2500만원을 유용한 것이다. 선거운동 경황 중 내가 사인을 했기에 그 책임은 내게 돌아왔다. 법원에서 1차 진술 후 2500만원의 10%인 250만원을 벌금으로 내라는 판결이 나왔다. 나는 '노 판사'라는 분에게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지금 돈은 없습니다." "어떻게 할 거요?" "(감옥에) 집어넣으세요. 몸으로 때우겠습니다." 나는 감옥행을 각오했다. 노 판사는 잠시 생각하더니 "가라"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는데 아무 소식이 없었다. 나는 꺼림직한 기분으로 노 판사실에 전화해 처리 상황을 물었다. 그 쪽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무슨 벌금이요? 징수가 돼 있는데요?" 난 엄앵란에게 이 일에 대해 전혀 알리지 않았다. 알고 보니 내 신변 처리를 고심하던 노 판사가 엄앵란에게 사정을 이야기했고, 그녀가 대신 그 돈을 물은 것이다. 이 사태로 협회장을 하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났다. 그 즈음 70년대 중반 미국으로 간 선배 최무룡이 귀국해 협회장을 하고 싶다는 의견을 비춰왔다. 최무룡은 자기 이름으로 된 2500만원 짜리 수표를 배우협회에 내고 협회장이 됐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1.10.26 07:00
연예

[청춘은 맨발이다-88] 남정임 보호 작전(하)

신성일이 남주인공을 맡은 영화 '백발백중'(1966년)에 출연한 여배우들 고은아·남정임·전양자·문희(사진 오른쪽부터). 남정임의 또렷한 외모가 두드러진다. 1969년 겨울, 배우인지 가이드인지 모를 정도로 남정임을 보호하다 서울로 돌아왔다. 지나치게 책임감에 사로잡혀 여행의 흥취라고는 제대로 느껴보지도 못했다. 공항엔 남정임의 어머니가 마중나와 있었다. 나는 "아무 일 없이 인계합니다"라며 남정임을 어머니의 품에 안겨주었다. 그제서야 한숨을 놓을 수 있었다. '설원의 정'의 제작자이자 돈많은 재일교포 니시야마도 남정임을 어떻게 해보지 못했다. 그러나 71년 무렵 어느날 남정임의 약혼 발표가 터져나왔다. 임방광이라는 재일교포와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나로선 아쉬웠다. 그렇게 공들여 니시야마로부터 보호를 했는데 결국 재일교포와 결혼하다니…. 남정임은 결혼하면서 일본으로 떠나 아예 종적을 감춰버렸다. 남정임은 신인 시절부터 자기 의사를 주저없이 밝히는 성격이었다. 실제 생활이든, 스크린이든 감정 표현이 솔직했다. 당돌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꾹 참고 넘어가는 다른 여배우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남정임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 하나. 어느 날 한 제작부장이 스케줄 문제로 남정임의 집을 찾아갔다. 그 과정에서 트러블이 생겼는데, 남정임은 그 자리에서 냅다 자신의 하이힐을 벗어 제작부장의 이마를 갈겼다고 한다. 66년작 '백발백중'의 스틸 사진을 보면 외모에서부터 그런 성격이 확 드러난다. 남정임의 결혼 후 일본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76년 무렵 제1회 도쿄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은 정진우 감독은 시부야의 NHK 방송국 1㎞ 거리에 자리한 한 불고기집을 찾아갔다. 남정임이 결혼한 재일교포 집안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정 감독은 66년 나와 남정임 주연의 '악인시대' '초연' 등을 합작하며 남정임을 최고의 배우로 인정하는 사람이었다. 남정임은 식당에서 발다닥에 불이 나게 뛰어다니고, 시아버지는 그녀를 다그치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재일교포나 재미교포는 돈이 많고, 대단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허상이었다. 김수용 감독을 대동한 정 감독은 그 날 숙소로 돌아와 울었다고 한다. 자신들이 공들여 키운 여배우가 '저 꼴이 무엇인가'하고. 정 감독은 그 다음 날 오후 2시에 다시 찾아가 남정임을 만났다. 남편과의 관계도 좋은 것 같지 않았다. 결국 남정임은 정 감독의 설득으로 이혼을 하고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해 정 감독이 운영하는 우진필름에서 정소영 감독의 작품 '나는 고백한다'로 재기했다. 한국 생활 땐 현 대한도시가스 고문인 노승주가 그녀를 따라다녔다. 정 감독은 노승주를 불러 "너, 남정임에게 또 다시 상처 주면 죽어"라고 했고, 노승주는 "남정임을 사랑하니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78년 그녀는 노승주와 재혼했다. 나는 이미 남정임이 노승주와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였다. 노승주는 나와 절친한 김동건 아나운서를 깍듯하게 형님으로 부르며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나와도 형·동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사이였다. 어느날 첫번째 아이 돌잔치한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노승주·남정임 부부는 여러 분위기로 보아 내게 연락을 안할 수는 없었다. 오랫동안 못 만났던 아쉬움을 아기 돌잔치에서 달랬다. 내가 알기로 그녀는 노승주와 잘 살았다. 92년엔 남정임이 유방암에 걸려 사망했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했다. 빈소에도 문상을 갔다. 40대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그녀. 얼마나 내 마음이 아팠는지 모른다. 지금도 남정임이 삿포로그랜드호텔 벽을 두드리던 소리를 잊을 수 없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1.08.24 07:00
연예

[청춘은 맨발이다-68] 대한극장 혈투

이만희 감독과의 호흡은 하드보일드한 액션에서 진가를 발했다. 1960년대에 가장 어려운 촬영 분야가 액션이었다. 조금도 보태지 않고, 러닝타임 1분 20초의 액션을 만들어내려면 밤새도록 찍어야만 했다. 외국은 풀샷 카메라, 클로즈업 카메라, 좌우의 카메라로 동시에 촬영했다. 그러나 우리는 카메라 하나 가지고 찍으니 배우가 얼마나 고달픈지 몰랐다. 여러 각도의 움직임을 일일이 재현해야 했다. 게다가 치고, 박는 신은 주로 밤 촬영 분이다. 이 감독과 나는 별 말 없이 '흑맥'(65) '원점'(67) '휴일'(68)의 고된 액션 신을 소화했다. '흑맥'에서 주인공 독수리가 맥주홀에서 싸우는 장면이 있었다. 카메라는 맥주홀 스탠드를 걸치고 홀 전체를 비추도록 설치됐다. 이 감독은 내가 여러 번 얻어맞다가 스탠드에 세워진 맥주병들을 팔로 치면서 쓰러지는 장면을 요구했다. 내 머리가 카메라 앞에 쳐박히는 연출을 의도했다. 얼마나 열심히 촬영했던지, 나 역시 정신이 없었다. 이 감독의 "컷" 소리에 눈을 떴다. 팔에 맞아 깨진 맥주병의 삐죽삐죽한 날이 내 코 바로 앞에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조금만 더 고개를 숙였더라면 영락없이 얼굴이 찢겼을 것이다. 열중하고 집중력을 가지면 하늘이 상처 하나 안나게 도와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계기가 됐다. '흑맥' 이후 2년만에 이 감독·문희와 다시 뭉친 '원점'은 신성일 액션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이소룡이 탑에서 압둘 자바와 대결을 벌이는 영화 '사망유희'를 대단한 액션으로 꼽는 분들도 많겠지만, 난 '원점'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 '원점'에서 석구(신성일)는 자신의 조직 보스에 의해 제거 대상이 된다. 밤의 여인 선(문희) 역시 보스의 암살지시를 받고 석구를 설악산으로 유인한다. 난 석구가 조직원들과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이는 장면을 곳곳에서 촬영했다. 밤의 한기 속에서 충무로 대한극장 사무실 3층부터 지하 1층까지 4개층을 결투 무대로 삼았다. 때리고, 맞고, 굴러떨어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 감독은 매층마다 카메라 앵글과 라이트를 바꾸어 분위기를 달리했다. 이소룡이 '사망유희'에서 상대를 깨면서 올라갔다면, 나는 적을 쓰러뜨리면서 아래로 향했다. 대역도 없고, 카메라는 한 대뿐. 모든 걸 나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 감독이 배우를 아끼는 마음은 대단했다. 본인이 직접 카메라 앞에서 실연해주기도 한다. "신짱, 괜찮아?" 여섯 살 위의 이 감독은 나를 '신짱'이라 불렀다. 운동으로 단련된 내 몸은 쇳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아주 멀쩡했다. 계단에서 그렇게 굴러 떨어지는데도 상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적이 아닌가 싶다. 한숨 돌려세운 이 감독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카메라 앞으로 돌아갔다. 촬영이 끝났을 땐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감독은 단 한 컷도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 감독이었다. 이 감독에게 'OK' 사인을 받으면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즐겁게 일했기에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짜증 나면 사고가 따라온다. 64년 '욕망의 결산' 때 내가 부산 태종대에서 당한 사고를 생각해보라. 가장 싫어하는 상황 속에 나를 밀어넣었다가 배우 생활을 끝마칠 뻔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새벽 거리로 나섰다. 상쾌했다. 내 인사법은 간단했다. "짱구형, 바이 바이." '짱구형'은 유달리 머리가 큰 이 감독에게 내가 지어준 애정 어린 별명이었다. 이 감독은 손을 들어 간단히 인사하고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정리=장상용 기자 [enisei@joongang.co.kr] 2011.07.27 07:00
브랜드미디어
모아보기
이코노미스트
이데일리
마켓in
팜이데일리
행사&비즈니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