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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투비 불참'으로 급변경된 '런닝맨표' 혈액형 전쟁

'런닝맨표' 혈액형 전쟁이 펼쳐진다. SBS '런닝맨' 멤버들은 평소 팬미팅에서 비투비 커버 무대로 눈길을 끌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는 두 팀의 컬래버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제작진 역시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비투비 컴백에 맞춰 '런닝맨 vs 비투비' 특집을 기획했다. 최근 진행된 녹화에서 멤버들은 오프닝부터 지난 '런닝구 프로젝트' 무대 의상을 그대로 착용하고 '너 없인 안 된다' 노래를 부르며 비투비와 컬래버레이션에 기대를 높였다. 하지만 녹화 당일 비투비 멤버의 코로나 확진으로 인해 컬래버 녹화가 성사되지 못해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멤버들은 비투비의 '비'에서 혈액형 'B'를 연상, 'B형 vs A&AB형' 컨셉트로 현장에서 즉흥 변경했고 B형 팀은 유재석·하하·양세찬 A&AB형 팀은 지석진·송지효·김종국·전소민으로 유례없는 혈액형 레이스를 펼쳤다. '유재석은 자기 생각만 하고 인기 없다'는 지석진의 선제공격을 시작으로 두 팀 간 유치한 정면 승부가 예고됐다. 심지어 김종국은 '장꾸미'가 폭발한 유재석에게 "지금 혈액형을 (직접) 확인하고 싶냐"며 피 터지는 앞날을 예고해 보는 이들도 긴장하게 만들었다. 방송은 27일 오후 5시. 김진석 기자 superjs@joongang.co.kr 2022.03.26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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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류대장' 뜨거웠던 1라운드, 39개팀 2R 진출…열띤 경쟁

'풍류대장'이 국악계 별들의 전쟁, 그 뜨거웠던 첫 번째 라운드를 마쳤다. 지난 12일 방송된 JTBC '풍류대장-힙한 소리꾼들의 전쟁' 3회는 1라운드 51개팀의 신명나는 크로스오버 경연이 화려하게 끝났다. '팬텀싱어3' 준우승자 고영열은 압도적 무대로 시청자들을 홀렸다. "국악이 옛 대중음악"이라면서 "현 대중음악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소리꾼들이 한마음으로 모였고 그래서 나도 나왔다"라고 남다른 각오를 드러냈다. 그는 한영애의 '루씰'을 파워풀하게 열창해 올크로스를 받았다. 즉흥적으로 노래하는 구음 시나위 한판은 국악의 멋들어짐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김종진은 "무대가 깨지는 줄 알았다. 다른 프로그램 준우승까지 하신 분이 국악의 대중화를 위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인정한다"라고 칭찬했다. 국악 3대 경연대회인 전주대사습놀이, 동아국악콩쿠르, 임방울 국악제를 휩쓴 실력자들이 많아 전현무의 농담처럼 누구나 있는 혈액형처럼 보일 지경인 '풍류대장'. 전주대사습놀이 최연소 장원이자 트로트 오디션 출신 '판소리 하는 트로트 남자' 강태관도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를 구성지게 소화해 올크로스를 받았다. 송가인의 대학 후배인 강태관은 대학 시절 카리스마 넘쳤던 선배 송가인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학교 다닐 때 제일 무서워했던 선배님"이라면서 "코로스가 별로였을 때 '아야 한명씩 해봐야~'라고 하면 제일 무서웠다"라고 폭로했다. 송가인은 "조용히 학교 다녔다"라고 해명한 뒤 "(올크로스) 축하한다잉"이라고 뒤끝 있는 칭찬을 해 웃음을 안겼다. 폭발적인 끼를 끌어올린 남자 가야금병창 임재현의 무대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전국에 250명의 가야금병창이 있다면 남자는 10명뿐이라는, 그래서 산삼보다 귀한 남자 국립민속국악원 소속 가야금병창이 만드는 묵직한 소리는 압권이었다. 그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하여가'의 랩을 힙하게 국악적으로 소화해 올크로스를 받았다. 음을 이어가는 국악 소리에 익숙한 까닭에 랩이 서서히 밀렸지만 이마저도 멋이 넘쳤단 평가를 받았다. 1회 국악 에미넴 최예림이 시청자들을 울렸다면 3회는 한 많은 소리꾼 신동재가 눈물샘을 자극했다. 생계 때문에 판소리를 접고 공사 현장에 나가 일을 배웠던 신동재는 "소리꾼이 판에서 못 놀면 바보다. 이왕 준비한 판이라면 제대로 놀아보겠다"라고 힘찬 각오를 표현했다. 그는 리쌍의 '독기'와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를 밥벌이 때문에 국악을 포기했던 자신의 이야기로 개사했다. 희로애락과 진심이 가득한 무대에 심사위원들은 올크로스로 화답했다. 송가인은 "우리 소리꾼의 삶을 이야기해주는 것 같았다"라면서 특히 '웃으라면 웃었고 걸으라면 걸었지'라는 가사에 공감했다고 칭찬했다. 김종진은 "선배로서 살짝 말씀드리겠다.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어도 음악을 해야 한다. 이젠 슬픈 눈빛보다는 웃음을 가져주시면 좋겠다"라고 용기를 줬다. 소리의 경지에 오른 소리꾼들에게 올크로스가 이어졌다. 먹고 살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었지만 다시 소리로 뭉친 밴드 소리맵시는 심청가 중 심봉사를 유혹하는 뺑덕의 이야기를 창작곡으로 만든 '뺑더가'로 올크로스를 받았다. 특히 레이찰스의 '히트 더 로드 잭(Hit The Road Jack)'을 조화롭게 섞어 신명나는 한판을 만들었다. 국립창극단 출신 류가양은 춘향가의 '갈까부다' 대목에 클래식을 접목해 묵직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며 올크로스를 받았다. 난생 처음 노래를 하며 춤을 춘다는 최효주. 임방울 국악제 대상인 그는 선미의 '24시간이 모자라'를 격렬한 안무와 함께 소화해 5크로스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퍼포먼스의 장인 솔라는 공감 어린 심사를 했다. 춤추면서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격려한 후 "스카프가 미리 떨어져 멘털이 흔들릴 수 있는데 끝까지 계속 했다"라고 칭찬했다. 최효주는 "솔라 심사위원님이 집어주시니깐 감정이 복받쳤다"라면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국악경연대회 4관왕이자 국악콘텐츠 BJ인 서은미는 이소라의 '제발'을 애절하게 소화해 5크로스를 받았다. 화음을 맞추기 어려운 국악으로 화음을 만드는 어려운 도전도 있었다. '국악계 SG워너비'가 되고 싶다는 심풀은 SG워너비의 '살다가'를 불러 5크로스를 챙겨갔다. 월드뮤직밴드 도시는 악동뮤지션의 '다이노소어(DINOSAUR)'를 생소한 국악기인 27관 생황을 곁들여 청량하게 소화하며 6크로스를 받았다. 대전시립연정국악원 이윤아는 마마무의 '딩가딩가'를 남도민요 '진도아리랑'과 섞어 끼 넘치는 퍼포먼스를 펼치며 6크로스를 받았다. 정가 K-POP 밴드 잔향은 오마이걸의 '돌핀(Dolphin)'을 청량감 가득하게 만들어 6크로스, 글로벌 국악쇼 MC인 장서윤은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를 흥보가와 춘향가를 섞어 5크로스를 얻었다. 청와대 공연을 한 실력파 밴드 촘촘은 클론의 '빙빙빙'을 몽환적으로 편곡해 5크로스를 받았다. 1라운드 총 51개팀의 무대는 '시간순삭' 순식간에 끝이 났다. 조선팝창시자 서도밴드, 국악계 아이돌 김준수, 국악 에미넴 최예림, 국악 싸이 최재구가 큰 화제를 모은 가운데 어마어마한 실력자들이 쏟아졌다. 우승후보가 너무 많아서 큰일이라고 심사위원 이적이 걱정할 정도였다. 2라운드 진출팀은 총 39개팀이었다.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실력자들이 많아 올크로스만 20개팀이 받았고 그 중 10개팀에게 톱10의 자리가 주어진다. 톱10은 2라운드에서 큰 혜택이 있을 예정이다. 이날 방송 말미에는 톱10이 앉을 위용 넘치는 의자가 공개됐고 심사위원들이 톱10을 선정하기 위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모습이 담기며 궁금증을 자아냈다. 1라운드를 씹어먹은 소리꾼들 중 누가 톱10에 오를지는 19일 화요일 오후 9시 '풍류대장' 4회에서 공개된다. 3회 시청률은 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 전국 3.8%, 수도권 3.4%를 기록하며 호응을 이어갔다. '풍류대장'은 2라운드에 진출한 39팀을 대상으로 파이널 온라인 사전투표에 돌입한다. 사전 투표 방법은 '풍류대장'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황소영 기자 hwang.soyoung@joongang.co.kr 2021.10.13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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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앤씨아(NC.A) “제2의 아이유 좋지만, 2인자 느낌은 싫어”

연예계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를 꼽자면 '단언코' 가요계다. 한 해에만 줄잡아 100여팀이 데뷔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2000년대 후반부터 K-POP 절정기를 보내면서 자리를 잡은 선배들은, 신인들이 넘어서기 힘든 벽이다. 그래서 과거에 비해 완성도 높은 신인들이 등장해도, 살아남는 것은 '소수'인 것이 요즘 가요계 현실이다.하지만 어디든 예외는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신인 여성 솔로 가수 앤씨아(17·본명 임소은)는 그 '소수'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은 신인이다. 더욱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벌써부터 '대박'의 기운이 느껴진다.17살 소녀라고는 믿기 힘든 허스키한 매력의 보이스. 그와는 정반대의 귀엽고 앳된 외모. '노래로 인정받는 가수가 되고 싶다'는 바람직한 멘탈 등이 모여 앤씨아의 성공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직접 발굴해 트레이닝시키고, 데뷔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한 소속사의 신뢰도 소녀의 앞날을 환히 비춘다. 앤씨아라는 이름은 '뉴 크레이티브 아티스트'의 이니셜을 따왔다. 앤씨아가 모두의 바람대로 K-POP의 동력에 창의력을 더하는 새로운 아티스트가 될 수 있을까. 최근 같은 소속사의 유리상자 박승화가 작곡한 상큼 발랄한 곡 '교생쌤'으로 데뷔한 앤씨아를 만났다.▶음악하고 싶어, 부모님과 하루에 한 번씩 싸워-알고 보면 시골처녀라고."분당에 잠깐 살다가 오산으로 내려갔다. 아직 재개발이 되지 않은 지역인데 10년 넘게 살았다. 시골처녀 맞다. 하하. 데뷔를 앞두고 서울로 혼자 이사와서 심심하다."-음악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됐나."사실 취미로만 좋아했다. 직업이 될꺼라는 생각은 못한 것 같다. 부모님도 내가 공부를 하길 원했다. 근데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갑자기 바뀌었다. 음악이 너무 끌리는 거다. 다비치·FT아일랜드 선배님 노래를 많이 들었다. 그 때도 아이돌 음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음악을 하기 위해 뭘 제일 먼저 했나."부모님 몰래, 집에서 홈 레코딩을 했다. 녹음 프로그램이랑 마이크 등 싼 장비를 구입해서 녹음했다. 좋은 환경은 아니었지만 녹음을 해서 친구들에게 들려주니, 완곡을 듣고 싶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드라마나 노래 가사를 응용해서 작사도 시작했다. 엄청 공들여 쓴 가사가 있다."-부모님 반대가 심했다던데."음악하고 싶다는 얘길 못했다. 근데 한림연예예술학교로 진학하고 싶어서 말을 꺼냈더니, 당연히 안된다고 하셨다. 부모님과 엄청 싸웠다. 하루에 한 번씩은 그랬던 것 같다. 결국 엄마는 포기했고, 아빠는 예고에 붙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리고 예고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아빠는 그 이후로도 반년 정도는 반대를 했던 것 같다."-예고에 시험 보러 가는날 엄청 떨렸겠다."오산에 오래 살아서, 서울 지리를 몰랐다. 다행히 큰 고모가 서울에 계셔서, 할머니와 시험 하루 전날 올라갔다. 시험이 오전 8시까지인데 학교엔 6시에 도착했다. 아무도 없더라. 실기에서 다비치의 '두 번 헤어지는 일'을 불렀는데, 잘 본거 같았다."-지금의 소속사와는 어떻게 만나게 됐나."중학교 3학년때 음악 학원을 다녔다. 원장님이 내가 노래하는 동영상을 찍어서 지금 회사 대표님에게 보여줬다. 겨울에 소속사를 찾아가 오디션을 보고 합격했다. 나중에 들었는데 대표님이 매니저 언니에게 내 연락처를 던져주고는 꼭 잡으라고 했다고 하더라."-소속사에서 러브콜이 왔을 때 처음엔 튕겼다고 들었다."회사가 싫어서는 아니었다. 예고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뭔가 학교에서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었다."-데뷔한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의 반응도 궁금하다."앤씨아란 이야길 듣더니, 처음에는 게임 회사 이름 같다고 놀렸다. 회사에서 이름을 가지고 회의를 많이 했다. 이소은 선배님이 계셔서, 내 이름은 못쓰겠구나 했는데, 결국 대표님의 의견으로 앤씨아가 결정됐다."-제 2의 아이유란 이야기는 어떻게 생각하나."싫지는 않지만, 계속 그렇게 불리는건 싫다. 2인자의 느낌이니까."-시크한 이미지가 있다."혈액형은 오형인데, 원래 말을 좀 길게 안하는 편이다. 이게 잘못되면 까칠해 보일수도 있더라. 친구들도 '은소 시크해'라고 자주 이야기 한다. ‘말 좀 예쁘게 해봐’라고 충고하는 친구들도 있다."-데뷔 전 운동을 많이 했다고."5㎏ 정도 뺐다. 헬스를 다니면서 웨이트와 유산소 운동을 엄청 했다. 식이요법도 했는데 아침에는 우유 마시고, 점심은 샐러드, 저녁에도 샌드위치로 버텼다. 데뷔를 앞두고 최후의 만찬이라며 대표님이 소고기를 사주셨는데 진짜 많이 먹었다. 근데 조금만 먹으라고 핀잔을 주시더라."▶예쁜척, 귀여운척에 손발 오그라들 것 같아-신인 가수들이 굉장히 많다. 앤씨아만의 생존전략은."솔로라서 더 눈에 띄지 않을까. 노래도 최신 유행하는 노래와는 조금 다르다. 살짝 손발이 오그라든다고 할까. 10대는 공감하지 못해도, 20~30대는 공감하는거 같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점을 예쁘게 봐주셨으면 한다."-신곡은 교생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내용이다. 시크한 성격으로 표현하기 많이 힘들겠다."예쁜척 귀여운척이 너무 힘들다. 특히 노래에 '오빠'란 말이 엄청 나오는데 힘들어 죽겠다. 친척 중에 오빠 한 명이 없다. 그래서 노래를 부를 때는 배우 이종석 선배님을 떠올린다. 선배님을 엄청 좋아해서 나오는 드라마, 영화를 다봤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분보다는 매력있는 분을 더 좋아한다. 혹시 만나게 된다면 '오빠'라고 해줄거다."-신곡을 처음 받고 어떤 느낌이었나."처음에 멜로디를 받고는 어떤 가사가 붙어야 좋을지 생각했다. 대표님이 '교생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가사를 써오라고 하셨다. 근데 경험이 없다보니 공감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공감과는 거리가 있는데 그래도 노래는 좋다." -배우 정만식이 티저 영상에 출연했다."내 얼굴을 공개하기 전에는 정만식 선배님이 립싱크하는 버전의 티저가 먼저 나왔다. 내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분이라, 내가 더 예뻐보일 수 있는 효과가 있는거다. 하하. 선배님이 '7번방의 선물' 이후에 예능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고 계신다. 요새 갑자기 '핫'해지셔서 우리끼리는 '아저씨 잘하고 계세요'라며 응원하고 있다."-어떤 가수가 되고 싶나."길고 굵고 하고 싶다. 하하. 유명해지면 좋겠지만 그건 두 번째 인거 같고 노래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가수가 되고 싶다. 유명하지 않아도 인정받는 가수가 되고 싶다."-돈을 많이 벌게 된다면."할머니에게 드리고 싶다. 친할머니가 한 분 계신데, 나를 엄청 예뻐하신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할머니에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자랐다."-데뷔 전 논란의 사진과 글 때문에 '한 방에 훅간' 연예인도 많다."문제될 건 없지만 혹시나 해서 다이어리부터 방명록, 사진까지 모두 내렸다. 트위터는 몇달 전에 탈퇴했다. 내가 워낙 말을 '쎄'게 하는 편이라…. 하하. 친구들에게도 물어봤는데 걱정할 건 없겠더라. 지금은 말이든 행동이든 둥글게둥글게 하고 있다."-10년 뒤의 앤씨아를 상상하자면."27살이다. 노래를 계속 하고 있으면 좋겠다.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하고 싶다. 실용음악과에 가려고 준비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나도 대학에 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엄동진 기자 kjseven7@joongang.co.kr 2013.08.2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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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중토크①] 정우성 “나는 만만치 않은 수다쟁이”

흔히 미남배우들이 여성팬들의 지지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우성(40)은 다르다. 여성들의 애정공세는 물론이고 남성들의 동경어린 시선까지 한 몸에 받는다. 데뷔할 때부터 그랬다. 반항기가 다분해보이는 남성적인 면모와 대충 걸쳐입은 옷자락, 헝클어진 헤어스타일로 야성적인 매력을 드러냈다. 때로는 먼 곳을 응시하는 우수어린 눈빛으로 여성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하기도 했다. 그만큼 거쳐온 작품도 다양하다. '비트'(97)와 '태양은 없다'(99)에서 반항기 넘치는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더니 '내 머릿속의 지우개'(04)에서는 사랑에 목숨거는 '로맨틱남'으로 등장했다. '무사'(01)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08) 등의 영화를 통해 고난도의 액션연기를 소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해 JTBC 드라마 '빠담빠담…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고 전과자가 된 인물을 연기하며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털털한 모습을 보여줘 극찬을 들었다. 이번에 들고 나온 영화 '감시자들'(조의석·김병서 감독, 3일 개봉)에서는 데뷔후 처음으로 악역을 맡아 눈길을 끈다. 경찰 특수감시반과 맞대결을 펼치는 범죄조직의 우두머리 제임스를 연기했다. 과하지 않게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며 영화를 돋보이게 만든 정우성에게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감시자들'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 때문인지 술자리에서 만난 정우성은 한껏 들떠있었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애써 시간을 내 일간스포츠와 술잔을 기울였다. 여름철 더위를 잊기 위해 얼음처럼 차가운 맥주를 택했다. ▶'감시자들' 4년만의 한국영화, '런닝맨' 출연까지 적극 홍보-2009년 '호우시절' 이후 4년만에 내놓은 한국영화네요. 유독 홍보에도 열심히 참여하는 것 같아요."제가 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어요. 신나면 신나는대로 표현하고 기분 나쁘면 그대로 드러나기도 해요. 오랜만에 들고 나온 한국영화인데다 작업 자체도 즐거웠어요. 영화 작업은 항상 즐거운데 이번엔 특히 깃털같은 옷을 입고 날아다니는 느낌이었어요."-예능프로그램 '런닝맨'까지 출연하는걸 보고 놀랐어요. "1997년 '비트'를 찍었을때도 이영자씨와 홍진경씨가 진행하던 SBS '기쁜 우리 젊은날-영자의 전성시대'에 출연해 영화를 홍보했던 기억이 나요. 그 전에도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다만 리얼 버라이어티는 '런닝맨'이 처음이었죠. 두렵진 않았는데 재미없는 제가 나가서 시청률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어요. '내가 왜 '런닝맨' 시청률을 올려야겠다는 고민까지 해야되냐'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어요.(웃음) 다행히 방송후 시청률이 오르고 반응이 좋아 기분 좋아졌죠."-'감시자들'에서 우성씨가 맡은 제임스 캐릭터의 개인사가 좀 더 나왔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어요."안 그래도 제가 출연을 결심하면서 영화사 측에서 제임스의 과거사를 추가하고 분량도 늘이겠다는 말을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영화가 엉망이 될 것 같아 오히려 제가 '절대 안 된다'고 거부했어요. 기획방향과 확연히 다른 작품이 될 것 같아 조심스러웠어요. 또 제 캐릭터가 악당이라 굳이 이 친구의 악행을 미화시킬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나쁜놈'은 그냥 '나쁜놈'일 뿐이니까요."▶'아테나'는 아쉬운 드라마, '빠담빠담' 노희경 작가와 재회 가능성 열려있어 -말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보기와 다르네요."수다 떠는걸 좋아해요. 특히 작품 이야기하는걸 즐기죠. 배우가 자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잘 할줄 알아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거든요. 술자리에서 저를 처음 본 사람들은 괜히 오해를 하는 경우도 있어요. 말 없어 보이는 녀석이 이미지와 달리 행동하니 놀라는거죠."-장편영화 감독 데뷔는 언제쯤 가능할까요."2008년 즈음 장편영화 감독으로 데뷔하겠다고 알렸다가 벽에 부딪쳤어요. 단편영화와 광고 연출에는 손을 댔는데 장편 프로젝트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예요.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끝낸후 회사까지 차려놓고 감독데뷔 준비를 했는데 그 사이에 '시티헌터' 등 글로벌 프로젝트 제안이 들어왔아요. 배우로서 욕심이 나더군요. 인지도를 더 높인후 감독으로 나서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연기를 좀 더 보여주려고 했다가 막상 일이 예상대로 착착 진행되지 않아 좀 꼬였어요. 배우가 본업인데 감독데뷔 욕심에 본업을 포기할순 없다고 생각해요. 양치기소년 될것 같아 '언제 데뷔하겠다'는 약속은 안하려고요.(웃음)"-한동안 충무로에서 작품을 내놓지 못하고 어렵게 선택한 드라마가 SBS '아테나'였잖아요. 그런데, 솔직히 실망스러운 면이 많았어요."글로벌 프로젝트 때문에 한국영화 출연제의를 고사하고 감독데뷔 준비도 미뤘다가 막상 일이 진행이 안돼 고민이 많았어요. 슬슬 조바심이 나던 와중에 더 많은 분들 앞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에 드라마 '아테나'를 택했죠. 하지만, 저 역시 그 작품에 아쉬움이 컸어요. 시놉시스만 있고 대본이 없는 드라마였죠. 액션신이 등장하는데 '내가 왜 여기서 싸워야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해가 안돼 힘들었어요. 그런 아쉬움을 해소하기 위해 '빠담빠담'에 출연했어요."-'빠담빠담'에서 보여준 연기가 참 인상 깊었어요. 노희경 작가님과 다시 작업해봐도 좋을 것 같은데요."안 그래도 노희경 작가님이 얼마전 '감시자들'의 VIP시사회에도 직접 찾아오셨어요.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궁금하니 더 자주 보여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앞서 '배우 정우성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미안하다'는 말도 하셨는데 함께 작업해본 이후 저에 대해 호기심이 많아지셨다고 하시더군요."정우성 프로필 출생 : 1973년 3월 20일 신체 : 187cm, 79kg혈액형 : O형데뷔작 : 영화 '구미호'(94)주요 작품영화 '본투킬'(96) '비트'(97) '태양은 없다'(98) '유령'(99) '러브'(99) '무사'(01) '똥개'(03) '내 머리속의 지우개'(04) '데이지'(05)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08) '호우시절'(09) '검우강호'(10) '감시자들'(13)드라마 '아스팔트 사나이'(95) '곰탕'(96) '1.5'(96) '아테나:전쟁의 여신'(10) '빠담빠담…그와 그녀의 심장박동소리'(11)정지원 기자 cinezzang@joongang.co.kr 사진=양광삼 기자 2013.07.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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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전쟁2’, 엉망진창 해결책에 시청자 분노

'결혼 3일 전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게 일회성 실수?'21일 방송된 KBS 2TV '사랑과 전쟁2'에서는 허니문베이비라 믿었던 아들이 결혼 3일전 불륜으로 태어난 혼외자임을 알게 된 한 부부의 이혼위기가 그려졌다.극중 유지수(천예원)는 남편(김기범)의 오랜 구애에 첫사랑 이성우를 잊고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유지수가 결혼을 3일 앞둔 때 이성우는 오랜 연인과 이별 후 유학을 준비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다 불러냈다. 이성우는 "결혼을 축하한다. 그동안 미안했고 고마웠다"고 말하며 유지수와 마지막 잔을 기울였다. 이후 만취한 유지수를 집까지 데려다준 후 하룻밤을 보냈다. 이후 아들 준이가 허니문 베이비라 여겼던 유지수는 이성우의 아들인 것을 알고 괴로워한다.유지수는 준이가 10세가 돼 학교에서 실시한 혈액형 검사 때문에 이 사실을 알게 됐고 숨기려 했다. 하지만 준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특이혈액이 필요하게 되며 친부 이성우의 존재를 더는 숨길 수 없게 됐다. 배신감에 분노한 남편은 유지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이날 솔루션 위원회는 '아내가 일회성 실수였으며 결혼 후 성실하게 가정을 지켜왔음을 생각하라. 남편이 용서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 화해해도 아이 존재가 남편의 분노를 일으킬 것이다'며 '아이가 첫사랑 자식이라는 게 남편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 남편이 감정정리를 할 수 있는지 지켜보고 결혼생활 유지를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시청자들은 명백한 불륜을 일회성 실수라고 설명한 것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그럼 한 번의 만남으로 '큰일'을 내는 사람들을 앞으로 일회성 실수라고 여겨야 하냐'라며 분노했다. 김진석 온라인 뉴스 기자 superjs@joongang.co.kr 2012.09.22 12:15
생활/문화

[how are you ①] 정경호 “3억원 이상 퍼주고 세상을 배웠다”

정경호(39) 전 원주 TG삼보(현 동부프로미) 센터. 농구인들은 그를 '못다핀 꽃 한 송이'라 부른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최고 유망주'란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장신(202cm)이면서 도 빠른 몸놀림으로 93년 실업팀인 현대전자에 입단했을 때도 그랬고, 97년 현대다이넷(현 KCC) 유니폼을 입고 프로 무대에 데뷔 했을 때도 그랬다. 그러던 그가 2005년 5월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코트를 떠났다. 잦은 부상에다 외국인 용병이 들어오면서 그의 설 자리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농구 코트를 떠난 그는 쌀국수 음식점을 하면서 인생 이모작을 시작했다. ▲그림자 선수 선수시절 정경호는 그림자 같은 선수였다.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파울맨이자 백업선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도 한때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릴 정도로 유망한 선수였다. 휘문고 3학년 시절 그를 둘러싼 고려대와 중앙대의 스카우트 전쟁은 유명하다. 그는 한기범·김유택을 키운 '센터 사관학교' 중앙대를 선택했다. 그가 각광 받을 이유는 충분했다. 신체 밸런스가 잡힌 리얼 신장이 2m가 넘는 장신선수였기에 기대는 컸다. 특히 그는 한기범처럼 마르지 않았고 표필상 보다는 크고 빨랐다. 서장훈 출연 이전까지는 한국인 센터로서 가장 이상적인 몸을 가진 선수였다. 덕분에 국가대표 선수생활도 1994년부터 1999년까지 할 수 있었다. 한창 기술이 발전하고 선수로서 꽃을 피울 20대 중반에 프로화가 진행된 것이 정경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도 서장훈을 뺀 국내 센터들이 겪은 고통을 곱씹어야 했다. 당시 대부분의 센터들(표필상·박상관·조동기·정구근·이흥섭·박상욱 등) 처럼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만 지켜야 했다.그는 "프로화 후 처음 외국인 선수들과 만났을 때 우리(토종 센터들)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비슷한 키에 몸무게는 30kg이 더 나가고 점프력도 더 좋은 선수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현재 까지 프로농구에서 토종 선수중 정통 센터로 살아남은 선수는 서장훈 하승진 단 두 명(김주성은 포워드로 등록)에 불과하다. ▲3억원 이상 퍼주고 세상을 배웠다. 은퇴후 9개월 동안 '뭘 할 것인가' 구상을 하다가 2006년 2월 삼성동 공항터미널에 '리틀 사이공'이라는 쌀국수 집을 오픈했다. 주변에서 권했고, 또 쌀국수를 너무 좋아해서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그에게 사회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나에서 열까지 쉬운 게 없었다. 처음 사회와 접했을 때 그가 가장 어려워했던 것은 '어서 오세요'하는 손님을 응대하는 말이었다. 그는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내가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상냥하게 하고 싶은데 그게 다른 사람에게는 '퉁명스럽게 들렸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또 "월급만 받다가 반대로 월급을 주려니까 힘들었다. 융통성 있게 할 수 있었던 것도 곧이곧대로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악전고투 끝에 장사는 점점 잘됐다. 2007년 말에는 월 매출이 1억원 가까이 올라갔다. 해볼만한 장사가 아니라 남는 장사가 됐고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 할까. 2008년 초, 업장 계약에 문제가 생기면서 일이 틀어졌다. 공항터미널과 상가임대업자의 분쟁이 생겼다. 그 와중에 십원도 건지지 못하고 쫓겨났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격이었다. 그는 "그때 피눈물이 났다. 인테리어 비용 1억6000만원을 고스란히 날렸다. 보증금 1억7000만원은 아직도 받지 못했다. 화병이 나서 처음 일주일간은 잠도 못 잤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상가 4곳이 같은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잘못한 것 하나 없어도 사회에서는 바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숨을 쉬었다.▲사회에서는 유망주 아닌 챔피언이 될 것 공항터미널에서 쫓겨난 후 6개월간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항상 멍하니 있었고 두문불출 했었다. 하지만 어려울때 그를 돕는 사람들이 큰 힘이 됐다. 허재 KCC 감독은 "사내자식이 뭘 그런 것 갖고 그래. 한잔 먹고 푹자"라며 함께 소주잔을 기울여 줬다. 툭툭 털고 일어선 그는 다시 쌀국수집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내가 잘못을 해서 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쌀국수는 자신 있었다. 또 내가 해본 게 쌀국수 밖에 없었다. 다시 쌀국수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쌀국수에 다시 도전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6개월간 장소를 보러 다닌 끝에 보금자리를 찾았다. 지난 5월 서울 강남 교보사거리 뒤쪽에 '리틀 사이공'을 열었다. 공항터미널과 비교하면 매출은 형편없다. 하지만 가능성은 봤다. 오픈 6개월 만에 손익 분기점을 넘어섰다. 공항터미널 시절보다 빠른 성장세다. 그는 "내 승부수는 쌀국수다. 사회에서는 유망주가 아닌 챔피언이 되겠다"며 주문을 외우듯 다짐했다.◇정경호 프로필 생년월일 1970년 6월 14일 신장/체중 202cm/98kg 혈액형 A형 취미 낚시출신교 휘문고-중앙대경력2006년 프로농구 TG삼보 현역은퇴1998년 프로농구 나래블루버드 이적1997년 프로농구 현대 다이넷1994~1999년 남자농구국가대표 1993년 현대전자 입단채준 기자 2009.11.11 15:51
생활/문화

[신나군] 군가·영화·뮤지컬 소재 ‘살아있는 교보재’

“나는 살아있는 교보재다.” 오는 17일부터 대전을 시작으로 전국 6개 도시에서 순회공연되는 군 최초 창작뮤지컬 ‘MINE’의 모티브가 된 이종명 대령(49)은 이렇게 자신을 표현한다. 2000년 지뢰사고 당시 두 다리를 잃고 나서도 침착한 후속조치를 취해 감동을 전한 일이 군가는 물론 영화 등에 소개된 데 이어 뮤지컬로도 고연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육군대학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면서 그들에게 희망이라는 불빛을 전달하는 인생상담자 역할도 하고 있다. 다리를 잃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비틀거리지 않고 희망이라는 두 발로 꿋꿋하게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그를 근무지 육군대학에서 만났다.■ DMZ서 지뢰를 밟다2000년 6월. 1사단 수색대대장이던 이 대령(2000년 당시 중령)은 후임 대대장에게 DMZ 작전과 관련해 직접 인수인계에 나섰다. 적 GP 측후방까지 들어가야 하는 곳에선 일단 병사들에게 주위를 엄호하도록 지시한 뒤 중대장과 후임대대장 세 명만이 앞장섰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후임 대대장이 지뢰를 밟아 다리가 절단되고, 중대장 또한 허벅지 등에 관통상을 입었다. 가벼운 부상만 입은 이 대령은 폭발 소리에 놀란 작전팀에 돌아와 동요하지 말고 적 GP감시와 엄호를 명령하고, 헬기 지원을 요청했다. "내가 길을 잘 아니 직접 부상자를 데리고 나오겠다"며 단신으로 다시 들어가 후임대대장을 안는 순간 또 다시 폭발 소리가 들렸다. 누운채 고개를 돌아보니 자신의 두 다리가 없어진 상태였다. 엄호하고 있던 팀이 뛰어들어오려 하는 모습도 보였다. "들어 오지마라." 또다시 사고가 터질까봐 접근금지 명령을 내렸다. 소총과 철모를 끌어안고 팔꿈치로 포복해 관목과 자갈 등을 헤치고 빠져나왔다. 그제서야 팀원들에게 자신이 기어나온 안전이 확인된 길로 다른 이들의 구출 명령을 내렸다. ■ 이 모든 게 우연이겠는가이 대령은 5시간의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서 깨어났다. 맨처음 눈을 떴을 땐 저승사자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아 겁이 덜컥 났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가족·친척과 함께 같이 근무했던 동료들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이 대령은 “내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이 있나보다”라고 첫마디를 건넸다. 다리를 잃은 것에 대한 원망보다는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더 컸다. 이 대령은 자신이 좌절이나 갈등을 겪지않고 깨어나자마자 사명감을 불태웠던 것에 대해 “두 번의 고비를 넘겨 살 수 있었다. 나는 이 모든 게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이유를 밝혔다. 사고 나기 전날 작전팀에게 통신장교와 군의관을 불러 실습교육을 강조한 덕분에 팀원들이 응급조치를 잘 해줘 1차로 목숨을 건졌다. 병원으로 이동 중에 수혈을 받은 것도 행운이었다. B형이라 적힌 군번줄과 달리 실제론 A형이었던 그에게 간호장교가 혈액형을 직접 물어왔고, 이 대령은 혈액형이 틀리게 적힌 이유를 또박또박 설명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한가지 더. 장애를 입었던 그는 전역을 해야 할 처지에 놓였지만 법률이 바뀌면서 다시 군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퇴원하기 두 달 전인 2002년 6월 유공신체장애군인 현역복무 시행안이 공포되면서 그는 자신의 원래 전입지였던 육군대학을 희망해 후배양성에 나섰다. ■ 희망의 생명을 불어넣다육군대학은 영관급 장교를 교육하는 육군 최고 군사전문교육기관이다. 부대원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지휘관 교육기관에서 교관들의 사명감은 특별하다. 이 대령은 이곳에서 작전술 교관을 지내다 지금은 사이버교육처장으로 있다. 각종 군사자료를 학생장교는 물론 야전에서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그의 임무다. 육군대학은 전시라는 가정 하에 모든 교육이 이루어진다. 전략에 맞춘 작전술을 연구해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노력하고 있다. 한밤중에도 꺼지지않는 불빛은 부대원들의 생명을 지켜내고자 하는 결의의 불빛인 셈이다. 39만권의 서적을 보유한 도서관과 지식정보화시대에 걸맞게 쌍방향 화상교육시스템, 디지털 지도, 창조21 시뮬레이션 모델 등 최첨단의 교육환경여건을 마련해놓고 있어 발전이 더욱 기대된다.이 대령은 이런 치열한 경쟁과 어깨를 짓누르는 사명감을 견뎌내야 하는 영관급 장교들에게 존재 그 자체만으로 희망의 상징이다. 절망이란 그저 사전 속에 있는 낱말일 뿐임을 그는 몸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명 대령은2000. 6. 26 DMZ서 지뢰사고로 두 다리 절단2002. 8. 26 국군 대전병원 퇴원, 육군대학 전입 전략학처 작전술 교관 보직2002. 12. 5 제1회 육군 참군인 대상 책임부문 수상2005. 12. 1 육군 대령 진급2006. 2. 충남대 평화안보대학원 수료 군사학 석사2004. 12.27~현재 육군대학 사이버교육처장 보직 ■육군대학은1951년 10월 28일 경북 대구서 창설. 6·25 전쟁 중이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사단급 이상 부대의 지휘관과 참모를 양성하여 국난 극복에 큰 공헌을 했다. 1954년 경남 진해로 이전하면서 육군 최고 군사전문교육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춤. 1995년 11월 1일 대전에 위치한 자운대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학의 임무는 평시 소령급 장교들에 대한 직무보수교육은 물론, 지휘관 부임전 교육과 전투발전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전시에는 전훈수집분석과 의명 보수교육을 실시한다. 현재까지 약 4만 여명의 군 고급간부를 배출하여 강군육성과 국가안보에 기여해 왔다. 대전=글·이방현 기자 사진·이영목 기자 2008.10.13 09:53
무비위크

[후아유]왕의 남자 감독 ‘이준익’

"나만 보면 모자 선물이야." 지난 15일 충무로 씨네월드영화사 사무실. 영화 이준익(47) 감독은 투덜거리면서도 무엇을 고를까라는 설렘으로 사무실 곳곳에 `짱 박힌` 중절모들을 뒤적거렸다. "바로 이 놈이야. 이번엔 요 걸 써 봐야지." 그는 검은색 바탕에 갖가지 꽃무늬와 색감이 어우러진 가장 화려한 모자를 집어 들었다. 팬 클럽 회원들이 선물해 준 모자란다. 인기 절정이다. 전날 밤(14일)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42회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내로라하는 스타들을 제치고 대상을 거머쥔 후 "소박한 마음으로 절박하게 찍었다. 이렇게 큰 상을 받을 줄 알았으면 더 잘 찍을 걸 그랬다"는 소감으로 좌중을 웃기던 그 순간에도 그는 검은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이제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중절모. "이번에 처음 써 본다"면서 집은, 만개한 꽃들이 바람에 날리다 착 달라붙어 버린 듯 보이는 그 화려한 모자는 인생의 절정을 맞이한 그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 같았다. 아마도 `비주류`를 견지하는 그는 기자의 이런 시각에 동의하지 않으리라. "태어날 때부터 낙천적이었고 특별히 행복한 적도, 불행한 적도 없이 항상 즐겁다. 일하는 게 놀이고, 놀이가 일하는 거다"라는 그의 철학관을 유추해 보면 `인생의 절정을 맞은 적이 없다. 나에겐 항상 과정이면서 절정이기 때문이다. 상을 받았다고 절정인가`라는 답이 그에게 어울리기 때문이다. "나이 먹으니까 중절모가 어울린다. 중절모가 열세 개쯤 있고, 야구 모자까지 합쳐 모자만 서른 개쯤 된다. 남들 잘 안 쓰니 스타일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는 사무실 한구석에 세워진 야구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자신이 만들었다는 `3S`론을 들어 보겠냐며 물어 왔다. ■ 내가 사는 방식, `3S` 이 감독은 하회탈처럼 항상 웃는 얼굴로 대하는 이를 편하게 해 준다. 현장에서도 부리는 스태프들과 격의 없이 수다를 떤다. 지장.용장.덕장 스타일로 굳이 구분하자면 덕장이라고 할까. "나이를 먹어 갈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멋있게 나이 먹는 방법은 `3S`다. 첫째가 스케일(Scale), 둘째가 스타일(Style), 셋째가 스마일(Smile)이다. 스케일 있게 하고, 스타일 있게 행동하고, 친근감 있게 굴어야 한다는 말이다. 첫째와 둘째를 다 갖춰도 스마일이 없으면 앞의 것은 다 무너진다. (안 웃으면) 누가 (나를) 찾을까? 즐겁게 살아야지." 그는 누구와 만나도 어울릴 만큼 잡기에 능하다. 그 중심에는 야구가 있다. 신용산중학교 1학년 때 정식 야구 선수였다. 캐처 겸 센터필더라는 두 가지 포지션을 겸하면서 팀에서 6번 타자를 쳤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내가 체력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그만 두었다. 자질이 있었으면 지금쯤 야구 감독이 되어 있지 않을까." 취미는 야구 방망이로 스윙하는 것이란다. 그의 차에는 항상 야구 글러브 두 개, 방망이 한 개가 준비되어 있다. 방망이의 경우 집.사무실.차에 각각 하나씩 있다. 현장에서 틈만 나면 배우나 스태프들과 캐치볼과 토스 배팅을 한다. 특히 캐치볼은 경직된 몸을 풀어 주는 측면에서 좋다. 야구 외에도 당구 250, 골프 90대에 볼링.고스톱.포커.바둑, 심지어 술과 담배 등 온갖 잡기에서 빠지는 부분이 없다. "바둑을 두면 성격을 알 수 있다. 강우석 감독은 성격이 급한데 바둑 둘 땐 신기하게 천천히 둔다. 더 늦게 두는 인간은 안성기다. 한 수 놓는 데 몇 분씩 걸린다. 그림 그리고, 조각도 하고. 회화과 출신이니까 나중에 전시도 해야 한다. 한 가지를 오래 못한다.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게 내 특기다." ■ 영화 제작은 전쟁? 그는 포병 경험이 영화 제작에 무척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나는 포병 출신으로 155㎜포를 다루었다. 12명이 한 조로 포탄이 목표한 시간에 발사되려면 완전한 콤비 플레이가 이뤄져야 한다. 군 3년 동안 내내 하니 조직적으로 일하는 시스템이 대단히 효율적임을 알게 됐다. 영화 현장도 비슷하다. 여러 명을 동시에 움직여 짧은 시간 내에 짜맞추는 게 무척 재미있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게." 그는 영화 제작을 고지 탈환 전투에 비유한다. "제작 과정에서 여러 명이 마라톤 회의를 한다. 화장실에 있을 때와 밥 먹을 때 빼고 계속이어서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중간에 픽픽 쓰러진다. 정신적.육체적 한계까지 도달한다. 시나리오를 독파하는 일은 전쟁터에서 고지를 탈환하는 모드다. 전우의 시체를 밟고 가는 거다. 상대를 비판하고 작업자들의 멘탈을 할퀴면서 간다. 인신 공격까지 서슴지 않는 처절한 멘탈 게임이다." 이 감독은 지휘자로서 어떤 스타일로 전쟁에 임하는 것일까. "타깃을 정해 놓고 전 파트가 각자의 기능을 일치시키는 게 영화다. 감독의 능력에는 창의력.묘사력 등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게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다. 감독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잘 조율하는 게 감독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발가벗는 스타일이다. 내 생각을 무장해제한다. 그러면 상대방도 무장해제한다.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면 결국 내가 불편해진다." 그는 여기서도 놀이의 개념을 살짝 끼워 넣는다. "내가 먼저 곤경에 처하는 거다. 연민을 유발하는 작전이다. 내 콤플렉스를 여러 사람에게 꺼내 축구공처럼 갖고 논다. 그러면 그것은 더 이상 내 콤플렉스가 아니다. 내 지식은 여럿이 합쳐 나온 것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 ■ 아직까지는 영화가 재미있다 그가 영화감독이 된 사연을 들으면 `인생 역정`이란 말이 떠오른다. 어릴 적부터 집안이 어려웠고 화가가 되고자 세종대 회화과에 들어갔으나 스물다섯 때 군 복학 직후 붓을 꺾었다. 스물한 살에 낳은 아이의 분유값을 벌어야 했다. 영화판에 들어가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잡지사에서 봉급 15만원 받고 디자인하고 있을 때 선배가 30만원 준다는 말에 솔깃해 서울극장에 취직했다. 간판 디자인, 포스터를 만들다가 영화 수입.제작.배급을 하고 결국 영화감독이 됐다. 그는 자신의 고생담을 모두 공개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젊은 시절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대의 복수는 성공`이라는 경구도 있지만 다시 그것(성공담)에 기대는 것은 좋지 않다. 사회적 분노를 갖는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는 없다. 그 사회적 분노를 성공의 샘플로 소개하는 것은 상대적 열등감만 조장하는 것이 된다." 그는 지독한 행복론자다. "나는 매일 행복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벌판에서 바람을 느끼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차 탈 땐 항상 창문을 내리고 바람을 맞는다. 추운 겨울에도. 오늘은 덜 행복하다. 바람이 안 부니까. 비도 일부러 맞고 다닌다. 우산을 안 쓴다. 모자가 편리할 수밖에 없다. 나는 놀면서 일한다. 노는 게 곧 생산이다. 재미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게 내 철학이다. 영화도 재미없으면 그만 할 거다. 아직까지는 영화가 재미있다." 30억 빚지고 있어도 불행하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은 를 통해 한 방에 빚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전까지 5년 동안 빚을 30억원씩이나 짊어지고 있었다.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30억 빚지는 것도 쉽지 않다. 그 정도 빚지는 것도 대단한 능력 아닌가.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면서도 그들에게 미안해 불편했지, 빚을 져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장생의 말처럼 `잃을 것도 없었다`. 스케일 있게 생각하면 초인적으로 일해 한 방에 값을 수밖에 없는 거다. 30억 빚지면 그게 스케일이 된다." 처럼 히트했으면 느긋하게 쉴 만도 하건만 새 영화 촬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단 하루도 쉰 적이 없다. 영화 에 이어 또 새 작품 을 크랭크인한다. 가 안될까 그전에 잡아 놓은 거다. 로 이렇게 될 줄 몰랐으니 끝까지 배수진을 친 거다. 빚을 져 본 사람은 갚을 수 있는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안되지만. 나는 게으르지 않거든." ■ 이준익은 누구? ▲출생: 1959년 9월 21일(음력), 서울. ▲체격: 173㎝, 63㎏ ▲혈액형: O형 ▲가족: 1남 1녀 ▲감독 데뷔: 1993년 영화 ▲학력: 서울 신용산초.중-경동고-세종대 중퇴 ▲경력: . . (이상 감독). . . (이상 제작자). 글=장상용 기자 사진=양광삼 기자 2006.04.21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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