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막은 무한도전의 ‘또 다른 멤버’다. 무한도전 자막은 상황 전달이나 출연자들의 멘트에 감칠맛을 더하는 정도였던 기존의 역할에서 벗어났다. 요소요소마다 크게 개입한다. 진행의 역할을 맡고, 자막만으로도 큰 웃음을 유발한다. 무도의 획기적인 이 코드는 이제 예능프로 전체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웃음을 전달하는 ‘소스’로 작용하기도 한다.
올해 2월 5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재경이 추락신에 '무도' 자막 끼얹기'라는 제목의 글과 함께 사진이 게재됐다. 같은 날 방송된 SBS 수목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14회 속 장면을 캡처해 '무한도전'에 등장한 자막을 패러디한 것이다. 드라마 속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온라인상에서는 '코믹'한 장면으로 재탄생했다.
이처럼 무한도전의 또 다른 멤버인 자막의 활약상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연출을 담당한 이들에게는 기운빠지는 일이 될 것이다. 올 한해 가장 뜨거운 활약을 펼쳤던 무한도전 올해의 자막을 선정 해봤다.
정초부터 무한도전에 ‘대형참사’가 일어났다. 1월 18일 ‘만약에’ 특집에서 게임에 진 유재석은 벌칙으로 김태호 PD와 뽀뽀를 해야 했다. 유재석이 “담당 PD와 뽀뽀를 왜 하느냐”고 당황스러워했으나 결국 두 사람은 안경까지 벗은 채 입을 맞췄다. 여기에 ‘대형참사’라는 자막을 들어가 재미가 배가됐다.
2월 22일 자메이카 특집 편에서는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종목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김연아를 응원하는 자막이 등장했다. 자메이카에 가지 못하고 국내에 남은 유재석 팀은 새 아이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박명수가 "세상은 1등만 기억해"라며 유재석의 말을 받게 됐다. 이어 "때로는 은메달이 더 기억 된다"라는 자막이 등장해 편파 판정 논란 속에 은메달을 획득한 김연아를 연상시켜 눈길을 사로잡았다.
3월 15일 방송된 '지구를 지켜라' 특집에서는 박형식이 지구인 대표, 무한도전 멤버들은 외계인 분장을 하고 등장했다. 유재석은 박형식과 무한도전 멤버들을 나란히 비교하더니 "형식이랑 있으니까 정말 외계인이 맞다"고 셀프 디스했고, 이어진 자막에선 '분장이 아닌 정말 외계인인 듯한 외모 불균형'이라는 문구가 더해져 멤버들에게 굴욕을 선사했다.
‘선택 2014’ 특집은 그 어느 특집보다 풍자와 메시지가 가득했다. 그 중 단연 베스트를 꼽으라면 5월 17일 방송분 중 등장한 ‘포지티브한 눈물즙’이다. 정형돈의 홍보영상 중 단식 단행 장면에서 그를 지지하는 정준하가 눈물을 흘리자 ‘매우 포지티브하게 눈물즙 배출’이라는 자막이 등장했다. 이 단어들은 이번 ‘6·4 지방선거’ 후보들의 행보와 언행을 묘사한 단어로 급기야 방송 후 ‘눈물즙’, ‘포지티브’ 등의 단어가 각종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오르며 화제가 됐다.
무한도전의 사회 풍자가 절정을 맞은 장면은 박명수의 ‘컨트롤 타워’ 편이었다. 7월 19일 컨트롤 타워는 청문회 형식으로 진행됐고, 슬리퍼즈 논란을 몰고 왔던 박명수는 등장부터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는 익숙한 멘트를 날렸다. 소품 횡령 장면에서 박명수는 “숨쉴 시간을 달라” 했는데 이는 7월 9일 교육부 장관 후보자였던 김명수 후보자의 발언을 풍자한 것이다. 강북 땅 질문에는 “자연의 일부인 땅을 사랑했을 뿐”이라 대답했다. 이 역시 박은경 환경부 장관의 발언을 풍자한 것이다. “장기특집이 낭만적일 줄 알았다”는 박명수의 말 또한 “청문회가 낭만적일 줄 알았다”는 김명수 후보자의 발언을 풍자했다. 어느 하나 함부로 놓칠 수 없는, 날카롭지만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했다.
무한도전 자막이 웃음을 주거나 풍자만을 한 것은 아니다. 10월 4일 방송된 '라디오스타' 특집에서 유재석은 '재석노트'코너를 통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레이디스코드 멤버 은비와 리세를 추모했다. 유재석은 "꽃처럼 예쁜 아이들이, 꽃같이 한창 예쁠 나이에 꽃잎처럼 날아갔다. 손에서 놓으면 잃어버린다. 생각에서 잊으면 잊어버린다"고 말하며 레이디스코드의 '아임 파인 땡큐(I'm fine thank you)'를 선곡했고, 레이디스코드의 노래는 담백한 영상편집과 자막으로 보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안타깝게 했다.
무한도전의 자막은 예능 캐릭터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11월 1일 ‘특별 기획전’ 특집에서 유재석과 정형돈은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를 섭외를 위해 이효리를 만나러 제주도를 찾았다. 평소 이효리가 무서웠다며 불안해하던 유재석과 정형돈은 이효리의 따뜻한 환대에 “왜 이렇게 달라졌느냐”며 불편해했고, 이효리는 “여기 사니까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된다. 그래서 예능이 잘 안된다. 캐릭터가 안 잡힌다”고 말했다. 이에 제작진은 이효리가 유재석과 정형돈에게 직접 재배한 부추와 호박을 넣어 끓인 해물라면을 대접하는 장면에서 ‘마더 효레사’라는 자막을 넣어 이효리에게 예능 캐릭터를 부여했다.
11월 22일 방송된 ‘쩐의 전쟁2’에서는 소위 ‘공기반 과자반’이라는 질소과자를 깨알 디스했다. 박명수는 회오리감자를 팔면서 “순수 감자로 만들었다”고 홍보했고, 여기서 제작진들은 “질소함유량 0%”라는 자막을 붙여 양념을 더했다. 앞선 9월 28일, 질소과자 상술을 보다 못한 대학생들은 과자 180개를 엮은 뗏목을 타고 30분 만에 한강을 횡단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11월 29일 ‘극한알바’ 편에서는 제작진의 씁쓸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유재석은 이야기를 하다 "자꾸 멤버들끼리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 같다"며 자기 쪽으로 멤버들이 모이는 것에 대해 언급했다. 이어 화면에 “희한하게 갈수록 늘어나는 여백의 미”라는 자막이 나타나 멤버들 양 옆 텅빈 공간을 강조해 하차한 멤버들의 빈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한도전은 연말에도 패러디 정신을 놓지 않았다. 12월 13일 방송된 ‘유혹의 거인’ 특집에서 서장훈과 정준하의 연기 호흡에 제작진은 '이게 바로 진상에 대처하는 매뉴얼!'이라는 자막과 함께 '대구로 차 리턴시킬 환상의 진상 연기'라고 적었다. 이는 국내뿐 아니라 외신까지 소개된 한 항공사 부사장의 만행을 디스한 것으로 이른바 '땅콩 리턴'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누구보다 빠르게 자막으로 녹여냈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남자의 물건’등 베스트셀러를 쓴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은 “MBC ‘무한도전’의 오랜 인기도 설명과 그림으로 다양한 시각 효과를 제공하는 자막의 힘에 있다”면서 “김태호 PD가 만드는 자막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그래서 인기가 있는 거다”고 설명한 바 있다. 내년에는 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무한도전이 이를 어떻게 프로그램으로 녹여내는지 관찰하는 것도 무한도전을 지켜보는 특별한 재미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