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노태우 후보는 "88올림픽이 끝난 뒤 중간평가를 받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놨다. 5년 임기 중간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야권에서 "중간평가는 위헌"이라고 주장했고, 89년 노태우 대통령은 공약을 철회했다.
불리한 정국을 돌파할 때 효과적인 '중간평가' 전략이 프로야구 프리에이전트(FA) 시장에 등장했다. 이건 공약이 아닌 계약이니 철회할 수도 없다. 선수로서는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롯데 자이언츠는 지난 6일 내야수 안치홍(30)과 2+2년 최대 56억원에 계약했다.이 계약이 발표되자 야구인들이 깜짝 놀랐다. KBO리그에서 처음 등장한 계약 형태였기 때문이다.
계약 내용을 들여다보면 안치홍은 올해와 내년 2년 동안 20억원을 보장받는다. 성적에 따른 보너스는 최대 5억원. 내년 시즌이 끝난 뒤 롯데와 안치홍은 계약 연장을 논의한다. 롯데가 계약 연장을 원하면 안치홍이 최종 선택을 한다.2022~23년 계약 조건은 2년 최대 31억원으로 이미 정해놨다. 이를 2+2년 최대 56억원이라고 발표한 것이다.
안치홍이 내년까지 좋은 성적을 내서 롯데와의 계약을 연장한다면 이는 평범한 4년 계약과 다르지 않다. 2년 후 '중간평가' 결과에 따라 상황은 복잡해질 수 있다.
만약 롯데가 계약을 연장할 뜻이 없거나, 반대로 안치홍이 롯데의 계약 연장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 안치홍은 자유계약선수가 된다. 이때 자유계약선수란 흔히 말하는 FA가 아니다. 모든 구단과 계약할 수 있는(구단이 조건 없이 풀어주는) 신분이다. 대신 1년 계약만 가능하다. 구단은 보상 선수를 내줄 필요가 없다.
일부에서는 이를 메이저리그 계약 형태 중 하나인 '옵트아웃(Opt-out)'으로 보기도 한다. 옵트아웃은 FA 계약 기간 중 선수가 FA 자격을 재취득하는 제도다.
지난달 워싱턴 투수 스티븐 스트라스버그(32)가 옵트아웃을 선언했다. 남은 4년 동안 1억 달러를 받을 수 있는 계약을 파기하고 FA가 된 것이다. 스트라스버그는 결국 워싱턴과 7년 2억4500만 달러(2900억원)에 계약했다. 원 소속팀과 계약해도 옵트아웃은 선수에게 유리한 제도다.
따라서 안치홍의 계약을 전통적인 의미의 옵트아웃으로 보기 어렵다. 롯데와 재계약할 조건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이다.
롯데와 안치홍의 '+2년' 계약은 오히려 구단이 계약 연장 여부를 결정하는 '옵션'의 성격이 있다. 롯데는 보장 기간과 액수를 낮춰 FA 영입 리스크를 줄였다. 안치홍 측은 차갑게 얼어붙은 FA 시장 상황을 고려해 2년 후 재평가를 받겠다는 전략을 내세웠다. KBO 규약 안에서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만약 2년 후 롯데와 안치홍이 결별을 선택하면 셈법은 복잡해진다. 정금조 KBO 정금조 운영본부장은 "현재 규약상 롯데와 안치홍의 계약은 (보장된) 2년으로 본다. 이후로는 다년계약이 가능한 FA가 아니라 자유계약선수이니 1년 계약을 해야 한다"며 "1년 계약이라도 계약금은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롯데와 안치홍의 계약은 FA 자격 재취득 규정과 연계된다. KBO규약에 따르면 FA 선수가 다시 FA 자격을 얻으려면 4시즌이 지나야 한다. 메이저리그 FA는 이런 제한 없이 계약 기간만 끝나면 1~2년 후라도 재자격을 얻는다. 때문에 옵트아웃과 옵션 등 다양한 형태의 계약이 이뤄진다. KBO는 "앞으로 다양한 계약형태가 나올 것 같다. 규약 정비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롯데와 안치홍 계약의 또 다른 의미는 '+2'년 계약에 대한 세부사항을 공개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FA 다년계약에 대해 여러 소문이 떠돌았다. 4년 계약으로 발표했지만 실제로 5~6년 계약했다는 의심을 받는 사례도 있었다. 롯데와 안치홍은 4년 이하의 계약인 데도 모두 오픈됐다. 즉 2년 후 안치홍, 그리고 그를 데려갈 의사가 있는 팀에게 시간적·제도적 기회를 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