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그려질 만큼 긴 슬럼프를 이겨냈다. KIA 타이거즈 '대들보' 최형우(39)가 4번 타자로 돌아왔다.
최형우는 KBO리그 후반기에 가장 뜨거운 타자 중 한 명이다. 출전한 19경기에서 타율 0.379 2홈런 14타점 OPS(출루율과 장타율 합계) 0.983을 기록했다. 이 기간 타율은 3위, 출루율은 4위였다. 지난 7일 두산 베어스전 연장 10회 말엔 상대 투수 장원준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치며 3연패에 빠진 소속팀을 구해냈다. 김종국 KIA 감독은 전반기 주로 6번 타자로 뒀던 최형우를 지난 주말부터 4번으로 당겼다. 4번은 지난 5년(2017~2021) 동안 최형우가 가장 많이 소화한 타순이다.
최형우는 전반기 타율 0.227에 그치며 부진했다. 규정타석을 채운 타자 중 세 번째로 낮은 기록이었다. 시즌 첫 홈런은 44번째 경기에서야 나왔다. 그가 개막 첫 10경기에서 홈런을 치지 못한 건 주전급으로 올라선 2008년 이후 처음이었다.
최형우는 2021시즌에도 타율 0.233에 머물렀다. 홈런왕·타격왕·타점왕 모두를 한 번 이상 차지했을 만큼 정상급 타자였던 그도 에이징 커브(일정 나이가 되면 운동능력이 저하되며 기량이 하락하는 현상)에 들어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진이 이어지자 가장 당황한 건 최형우 자신이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는 생각이 들더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타석에 있는 것 같았다. 뭘 해도 안 됐다"고 전반기를 돌아봤다. 이어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두 달 가까이 부진하면서 내 나이를 돌아보게 됐다. 마흔 살까지 야구를 한 것에 만족하고 '이제 은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속내를 전했다.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타격 자세를 연구하고, 이범호·최희섭 타격 코치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슬럼프일수록 복잡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마음가짐도 되새겼다. 그렇게 조금씩 타격 타이밍과 밸런스를 되찾았다. 최형우는 "5월 말, 6월 초부터 '이제야 내 느낌대로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타율은 안 좋았지만, 심적으로는 나아지더라"고 돌아봤다.
최형우는 최근 타격 성적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비로소 내 폼을 되찾은 것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아직 이름값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부진한 이유, 반등한 배경을 설명하는 것도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선수 생활 막바지에 왔다는 불안감은 최형우를 더 절실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목표를 향해 도전할 기회를 이어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최형우는 16일 기준으로 개인 통산 1439타점을 기록, 이승엽(은퇴)이 보유한 이 부문 역대 1위(1498개)에 59개 차로 다가섰다. 최형우는 "타점은 내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기록이다. 자부심도 크다. 꼭 신기록을 경신하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KIA와 최형우의 계약은 2023시즌까지다. 타점 기록 경신은 시간 문제로 여겨졌다. 최형우의 생각도 올 시즌 개막 전까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슬럼프가 길어졌고, 불안감과 경각심이 생겼다. 최형우는 "나도 계약 기간 충분히 (통산 타점) 기록을 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너무 못했다. 왼손 투수가 선발로 나서면 라인업에서 제외되기도 했다. 올해도 2할대 초반 타율에 그치면, 내년에는 주전을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4월 이후에는 개인 목표뿐 아니라 팀에 기여할 수 있는 타점 1개를 올리는 게 너무 소중하고 간절해졌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은퇴를 앞두고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1년 선배' 이대호(롯데 자이언츠)의 행보도 최형우에게 귀감이 됐다. 두 선수는 지난 2017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더 가까워졌다. 지난 13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열린 이대호의 두 번째 은퇴 투어 행사에서도 이대호가 직접 최형우를 불러서 기념 촬영을 하기도 했다.
최형우는 "지난달 올스타전에서 열린 (이)대호 형의 첫 은퇴 투어 행사를 보며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20년 가까이 프로 생활을 함께한 선수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젊은 선수들과는 다른 심정이었다"며 "대호 형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완벽한 타자다. 은퇴 투어를 하는 선수는 당분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멋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도 형처럼 멋진 (선수 생활) 마무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