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냐”는 아무에게나 쉽게 던질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듣는 상대가 자신보다 나이가 적거나 같고 서로 속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을 정도로 친밀할 때에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서 해야 하는 말입니다. 친한 사이여도 이 말은 조심해서 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비아냥으로 들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실제로 밥도 못 먹는 처지에 있으면 이 말은 차마 하지 못할 것입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박두만(송강호)이 용의자 박현규(박해일)의 턱을 손에 쥐고 눈을 똑바로 보며 “밥은 먹고 다니냐”를 씹듯이 뱉습니다. 영화가 나온 지 2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두고 여러 말을 나눕니다. 형사가 범인을 쫓다가 범인과 감정적으로 친밀해져서 그런 것이다, 살인자인 너 같은 놈도 밥은 입에 들어가느냐는 질책이다, 영화 상영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진범을 향해 던지는 분노다 등등. 제가 보기에는,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이 나올 상황이 절대 아닌데 그 말이 나오니까 그 말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 박두만이 응시하는 것은 용의자 박현규이기도 하고 화면을 보고 있는 관객이기도 합니다. “저 놈이 진범이냐, 아니냐”를 놓고 초긴장 상태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 전혀 맥락 없는 대사를 툭 던져 관객을 영화 바깥으로 훅 밀어냄으로써 “밥은 먹고 다니냐”를 관객 자신에게 하는 말로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니 영화를 본 지가 20여 년이 넘어가도 그 대사가 머릿속에서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봉준호는 지독하게 치밀한 감독입니다.
제게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을 자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머니입니다. 경상도 분이니까 이렇게 말을 하십니다. “밥은 묵고 다니나”. 제 어머니가 하는 말을 곰곰 새겨보면 저의 경제적 사정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끼니를 놓치지 않고 먹고 있느냐는 뜻이 분명합니다. 굶주림을 겪은 세대여서 자식 끼니 걱정을 평생 하시는 겁니다. 모처럼 뵙고 돌아가는 자식에게 하는 말이 “밥은 묵고 다니라”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끼리 나누는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진심으로 걱정을 담아서 하는 인사입니다. 직장에서는 안 쫓겨났느냐, 사업은 망하지 않았느냐, 주식을 하다가 쪽박 찬 것은 아니냐, 이혼을 당한 것은 아니냐 등의 생존 인사를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로 묻습니다. 저처럼 “밥은 먹고 다니냐”를 부모로부터 자주 들었던 친구들이라서 이 말에 진심 어린 걱정을 담아서 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나는 걱정 없다. 니도 밥은 먹고 살제?”
제가 음식 전문 글쟁이가 되겠다는 결심한 것이 1992년입니다. 그때의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8000달러를 조금 넘겼습니다. 인사동에서 친구들을 만나 “음식 전문 기자가 될 거야”라고 말했다가 “노동자들이 끼니 걱정을 하는 나라에서 이게 맛있네, 저게 맛있네 하며 변학도 놀이를 하겠다고?”라는 야단을 듣고 뺨을 맞았습니다. “노동자의 일상 음식이 내 글의 테마가 될 것이다”는 말은 전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양도 확보되지 못했는데 질을 어찌 따질 수 있느냐는 친구들의 말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습니다.
2024년 대한민국 1인당 국민소득이 3만6000달러입니다. 제가 음식 전문 글쟁이가 되겠다고 했다가 뺨을 맞은 1992년에 비하면 4배 이상 벌이가 좋습니다. 이 정도이면 “밥은 먹고 다니냐”는 말이 사회적 생명력을 완전히 잃을 만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일 수도 있겠으나 속사정을 살피면 꼭 그런 것도 아님을 금방 알아차리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의 대표 끼니인 자장면이 2024년 12월 평균 7500원으로, 1992년 1450원에 비해 5배 비쌉니다.
많이 벌면 많이 뜯기게 되어 있는 게 자본주의의 이치입니다. 그러니 세상이 나아지는 것 같지만 먹고사는 걱정은 줄지가 않습니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우리의 생존 인사로 영원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