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닉. (사진=뮤직팜 제공)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칠은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파도 소리 들리는 파도 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피아노 앞에 앉은 이적의 나지막하면서도 또렷한 음성 위로 김진표의 포근한 색소폰 연주가 얹어지자, 마치 환영처럼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달팽이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는 듯했다. 무려 20년 만의 ‘원조’ 달팽이의 귀환이자, 전설의 듀오 패닉의 귀환이다.
싱어송라이터 이적과 래퍼 김진표로 구성된 듀오 패닉이 20년 만에 단독 콘서트로 팬들 앞에 섰다. 이들은 지난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 LG아트센터 서울, LG 시그니처홀에서 ‘2026 패닉 콘서트 패닉 이즈 커밍’ 타이틀의 단독 공연을 개최했다.
패닉의 단독 콘서트는 2006년 ‘레츠 패닉’ 이후 장장 20년 만이다. 1995년 데뷔한 이들은 총 4장의 앨범을 통해 ‘달팽이’, ‘왼손잡이’, ‘UFO’,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 등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인 명곡을 연이어 발표하며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자취를 남겼지만 2005년 4집 ‘패닉 04’를 끝으로 팀 활동을 멈춘 상태였다.
패닉. (사진=뮤직팜 제공) 가장 찬란했던 청춘의 시작을 함께한 두 사람은 10년간의 패닉 활동을 뒤로 하고 각자의 앞에 놓인 문을 열었다. 이적은 솔로로도 수많은 명곡을 탄생시키며 독보적 싱어송라이터의 명성을 공고히 했고, 김진표는 한국 최초 래퍼 솔로 앨범 발매를 비롯해 ‘탑기어 코리아’, ‘쇼미더머니’ 등 뚜렷한 전문 영역을 살린 예능으로 대중과 만나왔다.
그렇게 각자의 길을 꽃피운 두 사람은 지난해 맞이한 패닉 30주년을 귀신같이 조용히 넘기더니, 31주년인 올해 초 깜짝 패닉 콘서트 소식을 알려 팬들의 기대를 높였고 아주 귀한 ‘투샷’을 사람들의 마음속에 박제했다.
공연은 1집 첫 트랙 ‘오프닝: 패닉 이즈 커밍’으로 시작해 ‘아무도’, ‘숨은그림찾기’로 오프닝 레퍼토리를 이어갔다. 솔로 단독 콘서트 아닌, 김진표와 함께하는 패닉 콘서트로 무대 위에 서서일까. 이적은 데뷔 초 숨길 수 없는 열정으로 펄펄 뛰던 20대 초반의 싱그러운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고, 김진표 또한 오랜 무대 공백이 무색하게 단단한 래핑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이적은 “지난해가 30주년이었는데, 30년에 30주년 (행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진표와 ‘2025년에 아무것도 하지 말고, 2026년 봄에 콘서트를 하자’고 해 이렇게 하게 됐다. 마지막 패닉 콘서트가 2006년 올림픽홀 공연이었으니, 딱 20년 만에 다시 패닉 콘서트를 열게 됐다”며 기뻐했다.
패닉. (사진=뮤직팜 제공) 곧이어 ‘눈 녹듯’과 ‘태엽장치 돌고래’를 선보이며 보컬과 랩의 가장 완벽한 조화를 보여준 두 사람은 1998년 발표곡 ‘여행’, 2005년 발표곡 ‘태풍’과 ‘나선계단’으로 무대를 이어가며 시대와 트렌드를 초월한 패닉 음악 세계의 진가를 보였다. 20년 만의 패닉 단독 콘서트답게 이번 공연은 팀의 히트곡만을 나열한 게 아닌, 패닉의 숨은 명곡을 집대성한 공연이었다. 특히 한편의 풍자 소설을 보는 듯한 충격을 안겼던 1998년 발표곡 ‘어릿광대’와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 무대에선 관객들의 우렁찬 떼창이 화룡점정을 찍었는데, 이적 역시 “떼창 너무 하고 싶었다”며 벅찬 감격을 숨기지 못했다.
패닉의 ‘문제작’ 명곡 향연도 이어졌다. 거친 숨소리로 구성돼 파격을 안긴 실험적 사운드의 결정체 ‘냄새’를 시작으로 ‘UFO’, ‘혀’, ‘오기’ 등 다채로운 곡들이 좌중을 홀렸고, 왜곡된 부모상에 대한 도발적 가사를 담은 ‘마마’와 ‘벌레’에 이어 ‘다시 처음부터 다시’까지 록과 힙합의 경계를 초월한 종합 장르 선물 세트 같은 레퍼토리가 현장을 뜨겁게 달궜다.
패닉. (사진=뮤직팜 제공) 공연 말미에는 ‘정류장’과 ‘달팽이’ 그리고 ‘로시난테’까지 이어지는 서정과 희망이 담긴 라이브 음악 선물을 쏟아부었다. 피아노 치는 이적과, 그 곁에 색소폰 부는 김진표가 함께 한 투샷은 한국 대중음악 르네상스를 기억하는 중장년 리스너들에겐 가히 역사적인 장면이었다. 이적 역시 “나중에 이 공연을 봤다고 자랑하실 날이 올 수도 있다”며 셀프 만족을 드러냈다.
이번 공연은 지금은 감성 싱어송라이터이자 ‘맹꽁이 아저씨’로 대중에 익숙한 이적과, 필기구 회사 대표라는 본업을 지닌 ‘쇼미 아저씨’ 김진표의 기분 좋은 일탈 같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적 콘서트 N차 관람자로서, 단언컨대 무대 위에서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이적의 미소를 본 이상, 두 번 다시 못 볼 ‘기록’으로만 남진 않을 것 같은 느낌이 강렬하게 든다. 자고로 해동된 음식은 다시 냉동하는 거 아니랬고, 사람은 나이 들수록 진짜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