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산업이 생성형 AI와 엔터테크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제작 효율성의 극대화와 창작의 본질이라는 대전환점을 맞이했다. 음원 프로듀싱부터 버추얼 아이돌, 뮤직비디오 프로덕션에 이르기까지 기술 도입은 제작비를 크게 낮추고 자본 장벽을 허물며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생존 무기와 IP 확장성을 제공하고 있다. 본 기획 시리즈 [K팝과 AI 혁명]은 K팝 프로덕션의 세 가지 핵심 축인 작곡가 작업실, 버추얼 아이돌·팬덤, 뮤직비디오 제작 현장을 들여다보고 창작자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기술이 허무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속에서, 여전히 빛나는 인간 창작자의 가치와 K팝의 미래를 짚어본다.
오경선 브릿지 엔터 제작총괄. 사진제공=본인
“기계는 결코 인간을 대체할 수 없으며, 팬과의 진정한 감정 교류와 성장의 공유는 오직 인간만의 영역이죠.”
K팝과 엔터테인먼트 산업 전반에 버추얼이라는 테크놀로지, 즉 엔터테크가 급격히 침투하고 있다. 기술 혁신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가운데, 산업 전반의 지형 변화를 둘러싼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지금, 최근 서울 강남구에서 만난 오경선 브릿지 엔터 제작총괄은 이러한 기술 만능주의를 경계하며 기술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는 겉보기엔 완벽한 그래픽과 무결점의 테크놀로지로 무장한 것처럼 보이는 버추얼 그룹일지라도, 결국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시장에서 생명력을 얻는 본질은 가상이라는 껍데기 속에 숨 쉬는 아티스트의 인간 고유의 감성과 서로 주고받는 감정적 교감에 달려있다고 전했다.
오 총괄은 CJ ENM PM을 거쳐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활동 중인 베테랑 엔터테인먼트 전문가다. 가수 헤이즈의 대표 히트곡(‘비도 오고 그래서’ 등) 제작 및 매니지먼트는 물론, 블랙핑크 제니의 첫 미국 싱글 ‘만트라’ 디지털 콘텐츠 제작 및 퍼포먼스 트랙 프로듀싱, 미국 대형 음반사 소니뮤직 콜롬비아레코드와의 협업, 그룹 에잇턴 프로듀싱, 버추얼 아이돌 스킨즈 런칭 등을 이끌며 글로벌 K팝과 버추얼 IP 시장을 아우르는 탁월한 역량을 입증해 왔다.
스킨즈는 2025년 데뷔한 이래 지난해 일본 도쿄돔 무대를 시작으로 버추얼 그룹 최초 미국 빌보드 ‘팝 에어플레이’ 차트에 진입하는 저력을 보여준 버추얼 아이돌 그룹이다. 지난해 말 SBS ‘가요대전’에 출격한 데 이어, 올해 초 멤버 권이랑이 Mnet ‘쇼미더머니12’에 버추얼 가수로 최초 출연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오 총괄을 만나 버추얼 아이돌의 본질과 한계, 그리고 K팝 생태계에서의 확장성에 대해 들어봤다. 스킨즈. 사진제공=브릿지 엔터
버추얼 아이돌을 향한 가장 흔한 오해 중 하나는 ‘휴먼 리스크가 없다’는 점이다. 음주운전도, 연애도, 군대 문제도 없으니 기존 아이돌의 완벽한 대체재가 아니냐는 시선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 오경선 총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엔 저도 그렇게 접근했어요. 하지만 막상 필드에서 직접 굴러보니 전혀 그렇지 않더라고요. 대중은 버추얼과 AI를 자주 혼동하지만 두 개념은 엄연히 다릅니다. 버추얼은 캐릭터라는 외형이 있고, 그 안에는 숨 쉬며 팬들과 소통하는 실질적인 인간 본체가 존재합니다. 버추얼 아이돌에 AI는 없습니다.”
오 총괄은 버추얼 멤버가 감기에 걸리면 방송 스케줄을 못 나가는 게 현실이라며, 표면적으론 리스크가 없어 보일지 몰라도 본체가 아프거나 물리적 문제가 생기면 그게 곧 버추얼의 휴먼 리스크가 된다고 털어놨다. 프로덕션 측면의 과제도 상당하다.
“캐릭터 제작부터 리깅(캐릭터 그래픽에 뼈대와 관절을 심어 움직임을 구현하는 작업), 모션 캡처 스튜디오 운용까지 초기 비용만 수억 원이 들고 전문 인력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해요. 때로는 기존 아이돌 제작 대비 품과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게 현실입니다.”
이어 오 총괄은 알고리즘으로만 작동하는 ‘100% AI 버추얼 아이돌’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시각을 분명히 했다.
“팬들이 사랑하는 건 AI 알고리즘이 아니라, 가상 캐릭터 뒤에서 느껴지는 인간적인 면입니다. 현재 현장에서 쓰이는 AI는 모션 캡처 데이터를 보정하거나 그래픽 작업 효율을 높이는 보조적인 툴일 뿐, 아티스트 본체를 대체할 수는 없어요. 결국 사람이 만들어내고, 사람이 교감하는 일입니다.”
버추얼 시장이 확대되고 있지만, 엔터테인먼트적 접근과 팬덤 소통 방식에 대한 이해 없이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게 오 총괄의 분석이다. 버추얼 아이돌은 단순 스트리밍 중심의 버튜버와 달리, 기존 K팝 아이돌의 체계적인 시스템과 밀접한 소통 구조를 온전히 흡수해야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버추얼 팬덤은 전용 메신저나 음성 라이브 플랫폼을 통해 아티스트와 실시간으로 교감하며, 화면 너머 캐릭터 그 자체의 존재에 깊이 몰입한다. 오 총괄은 가상 세계관의 몰입도가 깨지지 않도록 철저한 캐릭터로서의 소통을 지키는 것이 버추얼 엔터테인먼트의 핵심 운용 노하우라고 짚었다.
“버추얼 영역에서는 본체로 시선이 집중되는 순간 몰입감이 깨집니다. 1대 1 소통 메신저나 라이브 방송에서도 팬들은 캐릭터 자체와 대화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교감해요. 결국 기존 K팝이 가진 쇼케이스, 음악 방송 시스템에 버추얼만의 미디어 인터랙션을 얼마나 완성도 높게 결합하느냐가 이 산업의 핵심입니다.”
스킨즈 역시 매주 진행되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 팬들과 유대감을 쌓으며 밀접하게 소통하고 있다.
“게임에서 캐릭터에 입히는 의상을 ‘스킨’이라고 하잖아요. 아이템을 쓰면 화려해지지만 본질은 그걸 플레이하는 사람인 것처럼, 팬들이 겉에 싸인 껍데기나 외형적 편견을 넘어 소통 등을 통해 이들의 음악적 진정성을 바라봐 주길 바랐습니다.” 오경선 브릿지 엔터 제작총괄. 사진제공=본인
오 총괄이 그리는 버추얼 아이돌의 최종 지향점은 인간의 완벽한 묘사가 아닌 가상이기에 가능한 새로운 판타지다.
“버추얼 아이돌은 무한히 확장될 수 있습니다. 활동 휴지기에는 웹툰이나 웹소설로 스토리와 세계관을 확장할 수 있고, 툰 셰이더(웹툰이나 애니메이션 그림체) 기반의 외형 덕분에 굿즈 사업이나 미디어 믹스에서도 높은 이질감 없이 팬들에게 다가갈 수 있죠. 일방적인 콘텐츠 전달이 아니라 원소스 멀티유즈(OSMU)의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 될 수 있는 IP입니다.”
다만 시장이 지속해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많다고 덧붙였다.
“현재 버추얼 시장은 수요에 비해 인프라와 공급이 부족하고, 이들이 설 수 있는 무대와 기회가 턱없이 부족한 상태입니다. 플레이브 이후의 성공적인 넥스트 사례들이 많이 나와줘야 시장 전체의 환경이 윤택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오 총괄이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버추얼 아이돌은 기계가 기존 아이돌을 대체하는 기술적 산물이 아니라, 캐릭터라는 프레임을 통해 팬들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판타지를 나누는 별개의 독자적 IP라는 점이다.
“일반 아이돌과 버추얼 아이돌은 경쟁 상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의 IP예요. 기계는 결코 인간 아티스트를 대체하는 주체가 될 수 없으며, 팬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성장을 공유하는 감정의 교류는 오직 인간 본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