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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 꿈의 '100승' 구단은 탄생할까

100승. 꿈의 숫자다. 한 프로야구구단이 정규시즌에서 100승을 올릴 수 있을까. 불가능한 기록은 아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의 경우, 100승 구단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최고 명문 구단인 뉴욕 양키스는 지금까지 19차례나 100승 이상을 달성하며 이 부문 최다를 보유하고 있다. 가장 최근 100승 돌파 구단은 작년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얼마 전 오승환을 영입한 이 홍관조 군단은 159경기째에서 100승을 채우며 승률 0.611로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162경기 체제니까 가능한 얘기다. 가정을 해보자. KBO리그에서 이것은 요원한 기록일까. 그러나 2016시즌은 그 어떤 해보다 달성 가능성이 높다. 이유는 단순하다. 35년 역사상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르는 시즌이니까! 작년부터 10개 구단 체제에 돌입하면서 팀당 144경기를 치르기 시작했다. 그 최다 경기의 첫 해에 정규시즌 우승팀은 삼성이다. 88승 56패 승률 0.611을 거뒀다. 2010년대의 최다승 기록을 5년만에 경신한 것. 이전까진 2010년 당시 84승 47패 2무 승률 0.632를 기록하며 통합우승을 차지한 SK가 주인공이었다. 역대 최다승은 2000년에 탄생했다. 새 천 년을 맞이했던 그 해, 현대 유니콘스는 91승 40패 2무를 기록하며 7할대에 가까운 승률을 기록했다. 양대리그 체제였던 당시 프로야구에서 현대는 리그 자체를 점령했다. 현대의 ‘위엄’이 어느 정도였는지 잠시 살펴 보자. 현대의 91승은 드림리그 2위인 두산보다 무려 15승을 더 거둔 것이다. 전체 꼴찌인 SK와 비교하면 더 극명하다. SK는 현대가 올린 승수의 절반도 채 거두지 못했다. 고작 44승(86패 3무)이다. 그 해 90승은커녕 80승을 넘긴 팀조차 없었으며, 70승을 돌파한 팀도 두산이 전부였다. 첫 번째 133경기 체제에서 일어난 일이다. 현대 이전에도 ‘승리 깡패’는 존재했다. 1992년 빙그레 이글스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80승을 돌파했다. 81승 43패 2무 승률 0.651. 장종훈 등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앞세운 공격 야구 덕이다. 이 공포스러운 팀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다. 빙그레를 제압한 이는 염종석 등의 마운드의 힘을 갖춘 롯데다. 71승을 거둔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자신들보다 10승이나 더 거둔 최강팀을 꺾은 셈이다. 2000년대 후반의 SK도 승수 쌓기의 귀재였다. 2008년 SK는 83승 43패 승률 0.659를 기록하며 통합 2연패를 거머쥔다. 126경기 체제에서 역대 최다승 기록이다. 이듬 해 KIA에 우승을 내준 SK는 다시 잃어버린 그 자리를 차지한다. 2010년 84승으로 구단 역사상 최다승을 기록하며 통합 3연패를 달성했다. SK는 KBO 역사상 3년 연속 정규시즌 80승 이상을 달성(2008~2010년)한 유일한 팀이다. 동시에 4년 연속 승률 6할대(2007~2010)를 찍은 단 하나의 구단이기도 하다. 첫 144경기 체제에 돌입한 작년은 어땠을까. 재주는 사자가 넘고 ‘우승’은 곰인 챙긴 바로 그 해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내주긴 했지만, 정규시즌의 삼성은 그 어느 때보다 완벽했다. 2000년 현대 이후 15년만에 최다승인 88승을 거뒀으며, 팀타율 또한 KBO리그 역사상 최초로 3할을 넘겼다. 승률은 통합 4연패를 달성한 이전 해(0.624)와 엇비슷한 0.611. 그러나 그런 삼성도 100승 돌파엔 실패했다. 이쯤되면 궁금해진다. 100승은 신기루일까. 대체 어느 정도 승률을 기록해야 손에 잡히는 업적일까. 1996년 미프로농구(NBA)에서 시카고 불스가 세운 72승 10패란 기록처럼 불멸의 존재일까. 이루기 힘든 꿈은 맞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이미 그것에 근접했던 팀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2000시즌 승률 0.695를 기록한 현대 유니콘스다. 91승 40패 2무. 144경기 이전에 최다 규모인 133경기 체제에서 일궈낸 숫자다. 그렇다면 144경기 체제에서 그 시절 현대와 같은 승률을 올린다면 몇 승이나 거두게 되는 걸까. 무승부를 제외한다고 가정할시, 정확히 100승이 나온다. 100승 44패를 기록하면 승률은 0.694가 된다. 2000년 현대보다 딱 2모 모자른 숫자다. 즉, 2016 KBO리그에서 100승을 달성하는 구단이 탄생한다면, 그것은 역대 최강팀의 반열에 올랐다는 방증이 될 것이다. 2016시즌의 현대 유니콘스가 될 팀은 어디인지 기대해 보자.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2016.02.04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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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 '벌써 20년' 고(故) 조성민의 영광을 추억하다

“일본에 부는 코리아 열풍” 정확히 20년 전 일이다. 1996년 2월 1일, 일본프로야구 12개 구단이 일제히 본격적인 스프링 캠프에 들어가며 한일 양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선수가 두 명 있다.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한 선동열과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조성민이다. 특히 마쓰이 히데키가 보유한 당시 신인 최고액과 똑같은 1억 5000만엔(약 12억 원)을 받고 일본 최고의 명문 구단의 일원이 된 조성민을 향한 주목도는 한층 더 컸다. 194cm의 장신에 150km의 강속구를 던지는 젊은 투수, 게다가 준수한 외모까지. 스타성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고3 때 받은 허리 수술 탓에 병역을 면제 받은 것도 플러스 요인이었다. 실제로 요미우리의 캠프가 열린 규슈의 미야자키에는 조성민을 취재하려 기자들이 몰려 들었다. 때마침 팀의 에이스인 구와타가 팔꿈치 수술을 받고 일찌감치 시즌 아웃된 것도 조성민에 대한 주목도를 높였다. 한국의 국가대표 투수가 그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감에서다. 조성민 역시 “스프링캠프에 사력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시작은 그랬다. 희망에 가득찼고, 행복했다. 아마 그땐 몰랐을 것이다. 마침표가 슬픔이란 잉크로 찍힐 줄은. 조성민이 거인의 유니폼을 입고 날갯짓을 시작한 20년 전 이맘때를 회상해 봤다. 조성민은 일찌감치 핫한 선수였다. 고려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1995년 1월 당시, 미국과 일본 등의 스카우트는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냈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이미 접촉을 시도했고, 뉴욕 양키스 역시 적극적으로 구애를 펼쳤다. 당시 양키스의 에이전트인 돈 노무라는 “조성민과 그의 부모를 뉴욕에 초대하고 싶다. 1등석 항공권은 물론 체재비를 모두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성민은 “미국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유가 뭘까. “신체적으로 우월한 그들과 언어, 음식, 인종 차별 등의 부담을 안고 경쟁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리라고 판단했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다가 훗날 메이저에 다시 도전할 수도 있지 않은가? 1994년에 요미우리와 주니치의 시리즈를 봤다. 구와다(당시 요미우리 에이스)의 투구를 보고 ‘저 정도면 자신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일본 야구 역시 조성민에게 적극적이었다. 1995년 8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유니버시아드에서 그를 보기 위해 현지 취재진과 스카우트가 대거 몰려 들었다. 특히 조성민이 선발로 나온 같은 달 30일 쿠바전이 압권이었다. 요미우리는 무려 8명의 스카우트진을 보내 그의 공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한국팀의 더그아웃에까지 내려와 질문을 퍼부을 정도였다. 결국 조성민은 요미우리 유니폼을 입는다. 같은 해 10월 12일에 생긴 사건이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등 구단 수뇌부를 비롯해 100여 명의 취재진이 모인 이 자리에서 조성민은 “이번 가을 캠프부터 전력을 다해 내년에 선발로 올라 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요미우리가 조성민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하는 일화가 있다. 당시 일본프로야구 규약에 따르면 외국인은 신인왕 자격이 주어지지 않는다. 거인 구단은 조성민을 신인왕에 등극시키기 위해 이 규정을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1983년 이후 맥이 끊긴 요미우리의 신인왕 계보를 이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다. 말로 끝난 게 아니다. 위원회에 규정 개정안을 제출하는 등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고. 그런 노력이 유효화 되는 데엔 시간이 필요했다. 조성민은 데뷔 시즌인 1996년을 통째로 2군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구속은 150km가 훌쩍 넘었지만 경험 부족이 문제였다. 그렇게 1년하고도 6개월을 더 2군에서 묵묵히 견뎠다. 마침내 1997년 7월 3일, 고대하던 1군 합류 통보를 받는다. 2군에서 4승을 올리는 등 최근 4경기에서 평균자책점 0.35를 기록한 덕이다. 사흘 후 한신 타이거즈와 원정경기에서 8회에 등판해 2이닝 동안 1실점하며 역사적인 데뷔전을 치른다. 조성민의 데뷔시즌 성적은 1승 2패 11세이브 평균자책점 2.89. 22경기에 등판해 28이닝을 소화하며 얻어낸 기록이다. 홈런은 1개를 허용했고, 삼진은 서른 개를 잡아냈다. 외국인 선수의 신인왕 자격이 허용됐다 하더라도 수상은 힘든 성적이긴 하다. 그러나 기회는 있었다. 당시 일본 프로야구 규약에 따르면 입단 5년 이내의 투수가 30이닝 이하를 던질 때 신인왕 자격이 있다. 충분히 이듬 해를 기약하기엔 충분한 결과물이다. 1년 뒤, 성장한 조성민은 승승장구했다. 시범경기에서 7차례 등판해 난타 당하며 평균자책점이 7.88까지 치솟았지만 조성민은 흔들림이 없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구속도 올라가고 경기 감각도 좋아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해 4월 8일 히로시마 카프전에서 선발로 나온 조성민은 7이닝을 3실점으로 막아내며 일본 진출 후 첫 선발승을 따냈다. 라이벌이자 ’92 학번’ 동기생인 박찬호가 그날 새벽에 승전보를 알린 날이기도 했다. 세 번째 등판인 같은 달 27일엔 8이닝 1자책점으로 잘 던져 2승을 챙겼다. 21이닝 동안 단 5점만을 내주며 평균자책점 2.14를 기록할 정도로 조성민은 압도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조성민의 구위는 날카로워졌고, 그만큼 신인왕도 가까워졌다. 5월 2일 야쿠르트전엔 13개의 삼진을 빼앗으며 완봉승을 거뒀다. 당시까지 조성민은 센트럴리그 투수 주요 부문에서 탈삼진 1위(35개), 다승 2위, 평균자책점(1.50) 4위 등 상위권에 올랐다. 4승은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5월 9일 주니치전 9이닝 1실점. 조성민은 시즌 개막이 두 달이 채 되지도 않아 5승을 올리며 다승 공동 1위로 올라섰다. 6월 6일 주니치전에서 다시 완봉승을 거두며 6승, 다승 선두 점령. 6월 13일 야쿠르트전에서 또다시 완봉승을 기록했다. 게다가 이번엔 무볼넷이다. 7승. 시즌 세 번째 완봉승이자, 다섯 번째 완투승이다. 18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은 계속 됐고 평균자책점은 1.84까지 떨어졌다. 신인왕 뿐이더냐. 시즌 MVP까지 노려볼 만한 성적이다. 조성민은 “지금 컨디션이면 15승 이상은 올린다”고 말했다. 전반기 최종 성적은 7승 5패 평균자책점 1.99. 인기까지 덩달아 상승했다. 조성민은 센트럴리그 올스타 팬투표 투수부문 중간 순위에서 4만표를 넘게 받으며 1위에 등극한다. 7월 23일 지바에서 열린 올스타전 2차전에서 센트럴리그의 다섯 번째 투수로 등판한 조성민은 당대 최고의 타자 스즈키 이치로(당시 오릭스)를 범타로 처리하는 등 2이닝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쳤다. 경기 후 “즐거웠다”고 소감을 표현한 조성민.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올스타전 투구 도중 오른쪽 팔꿈치 안쪽 근육에 통증이 느껴졌던 것이다. 결국 나흘 후 올시즌 처음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된다. 재활, 재활, 재활. 조성민은 묵묵히 하루에 40~50개의 연습구를 던지며 부활을 노렸다. 그는 “어떻게든 10승에 도전하고 싶다”고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3승만 더하면 되니 무리한 목표도 아니었다. 꿈은 내년을 기약해야 했다. 다시 승수를 올리지 못하며 그대로 시즌 마무리. 최종성적은 7승 6패 평균자책점 2.75. 전반기의 무서운 흐름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 성적이다. 여기까지가 20년전 오늘부터 시작해 2년간 이어져 온 조성민의 전성기다. 조성민은 한때지만 일본에서 신인왕과 시즌 MVP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선수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는 한국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의 투수였다. 2011년부터는 두산의 재활 코치로 새출발을 하기도 했다. 또한 단신 기사 하나 없이 지나갔지만, 지난 달 6일은 그의 3주기였다.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2016.02.0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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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류현진X마에다' 응답하라 1997

“다저스의 두 영웅.” 미국의 시사 주간지 의 1997년 9월 23일자 표지 모델은 두 명의 동양인 투수였다. 바로 박찬호와 노모 히데오다. 뉴스위크는 “같은 아시아 출신이란 공통점을 가진 이들이 한일 양국 간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있다”며 “한국인과 일본인이 팀워크를 이루는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든 일”이라고 설명했다. 박찬호와 노모는 라이벌이자 동료였다. LA 폭동과 지진 등으로 지친 양국 교민들에겐 희망이며 다저스에선 빼놓을 수 없는 원투 펀치였다. 둘의 우정은 돈독했다. 1997 시즌이 끝난 직후 노모는 박찬호 장학회 출범식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며 끈끈한 우정을 과시했다. 박찬호 역시 1999 시즌 뒤 노모의 초대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결의를 다졌다. 박찬호가 부진에 빠졌을 때는 노모가, 반대로 노모가 기우뚱 할 때는 박찬호가 다독이며 용기를 불어 넣었다. 노모가 1998년 중반 뉴욕 메츠로 트레이드 되며 다저스의 한일 원투펀치는 그걸로 끝인 줄 알았다. 그렇게 18년. 다시 재결성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한국의 류현진과 일본의 마에다 겐타다. 공통점도 많아 평행이론 같기도 하다. 이들은 고국의 선배들처럼 영광의 시대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시작은 한국의 차지였다. 류현진이 2013년 다저스와 6년 3600만 달러에 계약하며 먼저 입성했다. KBO리그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빅리그에 직행한 선수가 바로 류현진이다. 박찬호 역시 메이저 신고식 만큼은 노모의 선배다. 1994년 당시 한양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국제 대회 등에서 160km에 육박하는 강속구를 뿌리며 스카우트의 눈길을 사로 잡았다. 결국 계약금 120만 달러로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되며 푸른 유니폼을 입는다. 동시에 당시 팀내 거물급 신인이던 대런 드라이포트와 함께 메이저 역사상 마이너를 거치지 않고 직행한 17~18번째 선수가 된다. 마에다 켄타는 메이저리그 선수 명부에 잉크도 마르지 않은 새내기다. 그러나 경험 없는 신인이라 여기면 오산이다. 이미 일본 프로야구에서 8시즌을 꽉 채워 뛴 베테랑이다. 2008년 히로시마 카프를 통해 프로에 입성한 뒤 줄곧 한 팀에서만 뛰었다. 2010년부터 작년까지 6년 연속 두 자리수 이상의 승을 거뒀다. 통산성적은 97승 67패 평균자책점 2.39. 2013 월드베이스볼클래식 (WBC)에서는 일본 대표팀의 간판 투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나이는 류현진보다 한 살 어린 스물 일곱 살이다. 올해의 다저스는 오른손 선발의 존재가 절실했다. 3시즌 동안 51승을 거둔 잭 그레인키를 잃었고, 성사 직전까지 갔던 이와쿠마 히사시와는 신체검사에서 불발됐다. 결국 대체자로 찾은 이가 마에다다. 다저스는 원소속팀인 히로시마 카프에 포스팅 금액으로 2000만 달러를 안겨 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마에다의 계약금은 8년 2400만 달러. 성적에 따라 연간 1200만 달러까지 챙길 수 있는 인센티브 조항도 함께다. 노모는 박찬호보다 1년 늦은 1995년, 계약금 210만 달러에 다저스 유니폼을 입는다. 무명 신인이자 미완의 대기인 박찬호와는 달리, 그 당시 노모는 완성된 선수이자 대스타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참가해 은메달을 목에 건 노모는 1년 뒤 신인 드래프트에서 무려 8개 구단의 지명을 받는다. 결국 1990년 오사카를 연고로 하는 킨테츠 버팔로스를 통해 일본 프로야구에 입성한 노모는 18승 8패 평균자책점 2.91의 성적으로 신인왕에 오른다. 데뷔 이후 4년 연속 17승 이상에 200이닝 이상을 소화하며 시즌 MVP에 오른 노모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빅리그에 들어선다. 생애 두 번째 프로 신인왕을 안겨준 1995년의 성적은 13승 6패 평균자책점 2.54. 탈삼진은 236개를 잡아내며 이 부문 타이틀도 수상했다. 그의 나이 스물 여섯에 생긴 일이다. 박찬호와 노모가 함께 활약한 시간은 불과 2년 반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역사는 명징했다. 그때까지 미국 본토와 중남미 선수들이 대다수였던 메이저리그에 동아시아 열풍을 불러왔다. 특히 박찬호는 빅리그란 구름 위의 꿈을 땅으로 떨어트려 현실화 시킨 인물이다. 노모 역시 특유의 포크볼로 서양의 타자들을 돌려 세우며 ‘동양인의 공도 통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이들의 활약이 동시에 정점을 찍었던 1997년. 박찬호와 노모는 각각 14승을 거두며 팀내 다승왕에 오른다. 마에다와 다저스의 계약이 성사된 직후인 11일, LA 타임즈는 “류현진과 마에다의 조합은 (박찬호와 노모가 만든) 1990년대의 추억을 상기시키게 한다”고 말했다. 류현진 역시 현지 인터뷰를 통해 “박찬호와 노모가 다저스에서 함께 훌륭한 시즌을 만들어낸 것을 기억한다. 나 역시 우리가 그 영광을 재현할 수 있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류현진과 마에다가 ‘응답하라 1997’의 신화를 만들 수 있을지 주목해 보자.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2016.01.27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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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1세대' 코리안 빅리거, 데뷔 시즌 돌아보기

류현진부터 오승환까지, 올시즌 메이저리그에는 적어도 6명 이상의 한국인 선수들이 활약할 예정이다. 여기서 박병호와 김현수, 오승환 등은 메이저가 첫경험이다. 빅리그 진입을 노리는 최지만이나 이학주도 마찬가지. 이들의 데뷔전을 상상하는 것은 설레는 일이다. 첫경험은 강렬하며, 동시에 아픈 법이다. 그래서 잊을 수도 없다. 벌써 20년 전이지만 여전히 생생한 이유다. 1세대 코리안 빅리거의 데뷔 순간은 어땠을까. 박찬호와 김병현 등 1990년대를 중후반을 수놓았던 선구자들의 데뷔시즌을 조명해 봤다. ★박찬호-1994: 0승 0패 ERA 11.25, 1996(풀타임): 5승 5패 ERA 3.64 1993년의 마지막 날은 한국야구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당시 한양대 2학년에 재학 중인 박찬호는 이날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한국인 최초의 빅리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전 해 열린 버펄로 유니버시아드에서 157km의 강속구를 뿌리며 스카우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결과다. 특히 한국 교민이 많은 LA를 연고로 하는 다저스는 현지 한인회와 국내 인사들을 통해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왔다. 계약금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20만 달러. 1991년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특급 신인 브라이언 테일러의 그것이 150만 달러임을 감안한다면 준수한 대우다. 기대를 져버리진 않았다. 박찬호는 그 해 3월 1일 뉴욕 메츠와의 시범경기에서 3이닝 1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다. 론 페라노스키 당시 투수코치는 “박찬호의 구위는 위력적”이라며 “이 상태만 유지하면 메이저리그 진입도 머지 않았다”고 말했다.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었다. 박찬호는 시범 경기에서 여섯 차례 등판해 23이닝 동안 2승을 따내며 평균자책점 2.35를 기록했다. 다저스가 발표한 개막 엔트리엔 그 해 신인드래프트 1순위로 뽑힌 대런 드라이포트와 박찬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메이저리그 사상 마이너를 거치지 않고 데뷔한 17~18번째 선수가 이들이다. 메이저의 벽은 높았다. 1994년 4월 10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전에서 9회초에 등판한 박찬호는 볼넷 2개와 2루타 1개를 내주며 2실점한다. 경기 후 박찬호는 “이제 시작인만큼 잘 할 수 있다”고 소감을 남겼다. 의욕은 좋았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두 번째 등판은 같은 달 14일에 열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 여기서 박찬호는 3이닝 동안 투런포를 허용하는 등 3점을 내주며 강판 당한다. 2경기 5실점 평균자책점 11.25. 결국 빅리그 진입 16일 만에 다시 더블 A로 내려간다. 경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박찬호는 마이너 2경기에 선발로 나와 삼진 14개를 잡으며 호투한다. 시즌 말미에 다시 콜업되긴 했으나 선수노조 파업 탓에 그대로 시즌은 종료. 박찬호의 데뷔시즌 성적은 승패없이 2경기에 나와 평균자책점 11.25로 끝났다. 진짜 데뷔는 2년 뒤였다. ‘제대로’ 공을 던지기 시작한 1996년엔 5승 5패 평균자책점 3.64, 풀타임 선발로 올라선 1997년엔 14승 8패 평균자책점 3.38을 기록한다. 코리안 특급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서재응-2002: 0승 0패 ERA 0.00, 2003(풀타임): 9승 12패 ERA 3.82 박찬호가 10승 투수 반열에 오른 그 해, 또 한 명의 빅리거 탄생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뉴욕 양키스는 한국을 직접 찾아 그를 유혹했으며, 보스턴 레드삭스는 2년간 100만 달러의 금액을 제시했다. 인하대 2학년에 재학 중인 정통파 우완 투수인 서재응이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서재응은 제3의 구단을 택했다. 뉴욕의 또 다른 클럽, 바로 뉴욕 메츠다. 계약금은 박찬호와 같은 120만 달러. 1997년 12월 11일 정식으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서재응은 그렇게 미국으로 떠난다. 입단 당시 서재응은 “2년 안에 메이저리그에 진입하겠다”고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나 좀처럼 빅리그는 그에게 자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1999년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으며 재활에 전념한 서재응은 이듬 해 싱글A에서 다시 공을 던졌다. 이어 트리플 A까지 치고 올라가며 꿈을 눈앞에 뒀다. 미국의 한 야구매체는 서재응을 최고 유망주로 선정하기도 했다. 2002년 꿈에 그리던 메이저리그의 마운드에 섰지만 단 1이닝 동안 삼진 1개를 잡아내고 끝난다. 진짜는 1년 뒤다. 선발 로테이션의 한축을 차지한 서재응은 31경기에 선발로 등판해 9승 12패 평균자책점 3.82를 기록한다. 컨트롤 아티스트란 별명이 붙는 순간. 아깝게 10승은 놓쳤지만 내일을 기약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것이 서재응이 메이저에서 거둔 최다승이 될 줄, 그땐 아무도 몰랐으리라. ★김병현-1999: 1승 2패 1세이브 ERA 4.61, 2000(풀타임): 6승 6패 4.46 14세이브 ERA 4.46 서재응의 광주일고 2년 후배이자 똑같이 메이저의 러브콜을 받은 선수. 임팩트는 최고였던 선수. 잠수함 투수. 방울뱀. 김병현이다. 1998년 7월 1일 미국에서 열린 한미 국가대표대항전 3차전에 등판한 그는 무려 15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현지 기자들을 경악시킨다. 김병현이 이날 잡은 20개의 아웃카운트 중 15개가 삼진이었다. 178cm의 단신인 잠수함 투수가 150km가 넘는 공을 던진다? 게다가 젊다. 더군다나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며 병역 문제도 해결했다. 결국 김병현은 해외진출 선수 중 최고 계약금을 받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가 그에게 쥐어준 금액은 4년간 225만 달러. 1998년 드래프트 투수로는 3위이자, 빅리그 역대 신인 계약금 8위에 해당하는 특급 대우다. 김병현은 “(박)찬호 형처럼 에이스로 성장해 보답하겠다”며 담담히 소감을 남겼다. 성장 속도도 빨랐다. 마이너에서 호투 행진을 펼친 김병현은 1년 뒤인 1999년 5월 28일 빅리그 승격 통보를 받는다. 이것이 김병현의 운명일까. 데뷔전도 범상치 않았다. 승격 이틀 후 뉴욕 메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8-7의 살얼음 리드 상황에서 9회말에 등판한 김병현. 타선은 또 2번에서 4번까지 이어지는 중심 타선이다. 덤덤하게 마운드에 오른 김병현은 앞의 두 타자를 범타로 처리한다. 이어 마지막 타자이자 4번 타자인 마이크 피아자를 5구 헛스윙 삼진으로 돌려 세우며 경기를 끝냈다. 김병현의 루키 시즌 최종 성적은 25경기에 등판해 1승 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4.61이다. 이듬 해 14세이브를 거두며 팀의 마무리 자리를 꿰찬 김병현은 2003년까지 4년 연속 두자리 수 이상의 세이브를 달성한다. 물론 이 사이엔 36세이브, 평균자책점 2.04를 기록한 ‘리즈 시절’인 2002년이 포함됐다. ★김선우-2001: 0승 2패 ERA 5.83, 2002: 3승 0패 ERA 4.74 보스턴 레드삭스는 기어코 한국인 선수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1997년 11월 6일 또 다른 아마야구 간판 투수인 김선우를 잡은 것이다. 입단 계약금은 125만 달러로 평범한 수준이지만 출신 학교인 고려대에 전지훈련장을 무상으로 임대하고 인스트럭터 파견 등의 기타 조건이 포함됐다. 당시 레드삭스의 스카우트였던 레이 포이테빈트에 따르면 구단 역사상 외국인 투수 최고 계약금이다. 김선우는 “(박)찬호 형보다 나은 빅리거가 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의 말대로 “1년 안에” 메이저에 입성할 수 있을까. 김선우는 1999년말 열린 애리조나 가을리그에서 8경기에 올라 5승 1패 평균자책점 2.27의 만점 활약을 펼쳤다. 2000년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선 5차례 등판해 7이닝 동안 볼넷을 한 개도 내주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제구력을 선보였다. 또한 2년 연속 마이너 올스타전에 뽑혔으며,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선정한 미래의 올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게 희망의 싹을 틔우길 수 차례, 드디어 2001년 6월 15일 빅리그로 승격되며 한국인으로서는 다섯 번째로 메이저리그 마운드를 밟게 됐다. 이후 중간계투로 20차례 등판(선발 2경기 포함) 하며 0승 2패 평균자책점 5.83이란 성적표를 남긴다. 레드삭스에서 차근차근 성장하던 그였기에 이듬 해 생긴 트레이드는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몬트리올 엑스포스로 팀을 옮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김선우는 기쁨도 맛봤다. 4월 17일 토론토 블루 제이스를 상대로 감격의 메이저 첫 승을 올렸다. 실질적인 메이저 데뷔 시즌이라 할 수 있는 2002년의 최종 성적은 3승 평균자책점 4.74. 19경기에 나와 49.1이닝을 소화하면서 얻어낸 성적이다.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2016.01.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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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 1993 양준혁-이종범급 신인, 올시즌에 탄생할까

35년의 시간. 이제껏 한국프로야구가 보낸 한 시즌, 한 시즌이 어디 특별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겠냐만, 1993년은 다른 의미에서 특별한 해였다. 기성 선수들을 위협하는 괴물 신인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타석에선 양준혁(당시 삼성)과 이종범이, 마운드에선 이대진(이상 당시 해태)과 박충식(당시 삼성)이 입단 첫해부터 리그를 지배했다. 백미는 양준혁이다. 타율 0.341에 130안타 23홈런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등극한다. 이종범도 그에 못지 않다. 73개의 베이스를 훔치며 ‘바람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한다. 박충식은 14승 12패 평균자책점 2.54, 이대진은 10승 8패를 기록하며 둘 모두 데뷔 첫해 10승을 달성했다. 올시즌 흥행을 우려하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스타 선수들의 부재. 김현수, 박병호 등 지금껏 팬들을 몰고 다니던 간판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로 떠난 탓이다. 그러나 본디 빈자리는 새 물결로 채워지는 법이다. 올해는 ‘응답하라 1993’이 될 가능성이 크다. 벌써부터 기대감을 불러 모으는 수퍼 루키들이 눈에 띈다. 제2의 양준혁이, 제2의 이대진이 될 선수는 누구일까. 앞으로 10년 이상 KBO리그를 책임질 스타들을 찾을 기회다. ★정영일-못다 핀 메이저의 꿈, 한국에서 아직 KBO리그 1군 무대에서 공 한 개도 던지지 않았지만 많은 주목을 받은 선수다. 1988년생으로 올해 나이 스물 여덟. 팀 동료이자 프로 10년차인 김광현과 동갑이다. 늦깎이 신인.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미 스타였던 선수. 돌고 돌아 이제야 국내 야구팬들에게 첫 선을 보인다. 바로 SK 정영일이다. 2006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정영일은 경기고를 상대로 13.2이닝을 던져 23개의 삼진을 빼았는다. 국내외의 스카우트들은 당연히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정영일이 택한 것은 미국행이었다. 그해 7월 LA 에인절스와 110만 달러에 계약을 맺었다. 빅리그의 벽은 높았다. 데뷔 첫 해인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싱글A를 전전하며 3시즌 통산 2승 2패 평균자책점 5.35를 기록한다. 메이저의 마운드는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가 안긴 곳은 김성근 감독의 고양 원더스다. 2011년부터 내리 3년을 여기서 재기를 위해 땀을 흘렸다. 마침내 2014 신인 2차 지명회의에서 5라운드 8순위로 SK의 선택을 받는다. 그러나 한국 프로 데뷔엔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작년까지 상무에서 51경기에 나와 3승 1패 17홀드 평균자책점 4.66을 기록하며 복귀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올해 SK의 불펜은 공백이 많이 생겼다. 정우람과 윤길현이 떠났지만 뾰족한 대안은 없다. 정영일은 SK에서 ‘이보다 강한 잇몸’이 될 수 있을까. ★이케빈-삼성의 희망이 되어 작년 이맘 때 구자욱의 열풍을 보는 것 같다. 삼성의 신인 투수 이케빈을 향한 주목도가 심상치 않다. 류중일 감독은 미국 괌에서 열리는 스프링캠프 명단에 일찌감치 그를 포함시켰다. 2016 KBO 신인 드래프트 2라운드 1순위로 이케빈을 택한 삼성이다. 이전 해 메이저리그 신인 드래프트에도 참가했던 그는 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이케빈은 파워 피처다. 150km가 넘는 직구를 구사한다. 프로 2군과 치른 연습 경기에서는 직구의평균 시속이 145km를 기록했을 정도란다. 재미동포 2세로 대학교 때까지 미국에서 야구를 했다. 그러나 편히 훈련을 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의 아버지는 단돈 5만 원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을 던졌지만 빅리그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멈출 순 없었다. 이케빈은 “날 위해 뼈 빠지게 고생한 아버지를 생각하면 야구를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참조기사: “박병호와 붙고 싶다” 23세 이케빈 ‘코리안 드림’ 입단 실패 후 한국으로 들어와 고양 원더스를 찾았다. 2014년을 꼬박 거기서 보냈다. 영어 학원에서 일하며 생계비를 벌고, 끝나면 다시 훈련을 시작했다. 삼성은 그의 잠재력을 봤고, 선택했다. 이케빈은 9일 한 스포츠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삼성의 희망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의 다짐대로 삼성은 지난 해 놓친 우승을 다시 탈환할 수 있을까. ★남태혁-댄블랙을 잊게 해줘 해외 진출한 뒤 국내로 유턴한 선수가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를 차지한 건 그가 처음이다. Kt로 입단한 메이저리그 출신의 남태혁 얘기다. 2009년 인천 제물포고 시절부터 거포 유망주로 이름을 날리던 그는 그 해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계약을 맺었다. 제2의 최희섭을 꿈꾸며 내딛은 첫 발걸음이다. 이듬 해 LA 다저스 산하 루키 리그에서 4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43에 3홈런을 기록했다. 2012년엔 팀 역사상 14년 만에 사이클링 히트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 해 남태혁이 기록한 타율은 0.256. 메이저 입성이 머지 않은 듯했다. 그러나 오른쪽 팔꿈치 인대접합 수술을 받으며 차질이 생겼다. 결국 마이너 4시즌 통산 타율 0.241에 97타 9홈런이란 기록을 남기며 미국 생활을 마쳐야 했다. 고심 끝에 그가 택한 길은 한국이었고, 그를 맞이한 이는 막내 구단인 kt였다. 올시즌 상황은 나쁘지 않다. 작년 1루와 중심타선을 책임지던 댄블랙이 떠나며 공백이 생겼다. 남태혁으로서는 충분히 노려볼 만한 기회다. 댄블랙의 52번을 물려 받은 그가 kt에서 뒤늦게 만개하는 모습을 기대해 보자. ★김재성-LG 안방마님 네 축의 하나 LG 경기를 꼬박 챙겨 본 열혈팬이라면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김재성은 2015 신인드래프트에서 LG가 1차 지명한 선수다. 지난 해 7경기에 나와 7타석에 들어서며 1볼넷 2삼진이라는 소박한(?) 성적표를 남겼다. 짧은 만큼 강렬한 장면도 있었다. 작년 9월 8일 잠실에서 열린 한화와의 경기에서 포수로 출장한 김재성은 인상적인 플레이를 해냈다. 10회초 한화의 공격 상황. 1루에 있던 정근우가 도루를 감행하자 김재성은 주저없이 공을 뿌렸다. 비디오 판독 결과 정근우의 아웃. 그 해 도루 성공률 78%를 자랑하던 발 빠른 주자를 잡아낸 것이다. 김재성의 활약에 따라 LG의 안방 상황이 달라진다. 지난 시즌 유강남이 700.1이닝, 최경철이 541.2이닝씩 포수를 소화했다. LG는 SK, 한화, KIA,와 더불어 8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포수가 없는 구단이다. 게다가 최경철은 만 서른 여섯의 베테랑이며, 유강남은 풀타임을 처음 소화한 젊은 선수다. 여기에 자유계약선수로 LG 유니폼을 입은 정상호가 가세했다. 신인 김재성은 이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2016.01.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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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야구단 시무식엔 새해 설계가 숨어있다

출사표에 올해의 청사진이 들어 있다. 2016년 병신년을 맞아 10개 구단 별로 시무식을 열고 있는 요즘 KBO리그 얘기다. 그저 연례 행사라고 흘려 듣진 말길. 감독이, 대표가, 또는 선수가 올시즌의 포부를 내놓는 이 행사에서 그들의 목표까지 엿볼 수 있을지 모른다. 이들은 어떤 부분을 강조했고, 현장에서 기자들은 무엇을 인상적으로 들었을까. 시무실 당일에 쏟아진 기사를 토대로 키워드를 분석해 봤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와 계약된 주요 스포츠 매체 31개가 그 대상이다. 올시즌 판도를 예측할 힌트가 되길 바라며. ★SK 와이번스 SK는 올해 많은 것이 바뀌었다. 사장과 주장 자리에 새 얼굴이 들어선 것이다. 류준열 신임 사장은 임원일 대표에 이어 SK의 5대 사장으로 역임했다. 프로 데뷔 이후 SK에서만 10년을 보낸 김강민도 생애 처음으로 주장 완장을 찼다. 시무식에서 이들의 키워드가 담긴 기사가 가장 많이 쏟아진 건 당연한 일이다. 류준열-신임사장 등의 기사는 가장 많은 점유율을 차지했다. 전체 중에 5분의 1이 넘는다. 김강민-주장-리더 등의 키워드 역시 그에 못지 않다. 김강민은 김광현, 최정, 박희수 등 당일 언급된 모든 SK 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점유율을 차지했다. 김용희 감독은 류준열 대표이사보단 적지만 김강민 보다는 많았다. 김 감독의 연관 키워드는 마무리, 박희수, 그리고 ‘불광불급(不狂不及)’ 등이다. ‘미치지 못하면, 미칠 수 없다’는 의미를 가진 이 사자성어는 김 감독과 올시즌 SK의 행보를 가늠케 하는 것이다. 지난 해 정규시즌 5위를 차지하며 와일드카드전에 진출한 SK. 2016 시즌에는 ‘모두 미친’ 선수단이 그때의 성적을 넘어설 수 있을까. 덧붙여: 이승호 등 트레이드로 다시 한식구가 된 선수나 신인들도 키워드에 등장했다 이중 눈여겨 볼만 한 선수가 있다. 바로 정영일이다. 인기스타인 이재원과 맞먹을 정도의 언급량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의 꿈을 잠시 접고 돌아온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방증이겠다. ★두산 베어스 같은 날 시무식을 치른 두산도 살펴 보자. 다소 다른 점이, 감독이나 사장이 아닌 다른 이가 가장 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은 공필성 신임 2군 감독. 선수 시절부터 은퇴 후 코치 생활을 할 때까지 오랜 시간 롯데 유니폼을 입어 온 그가 두산에 왔다. 타구단의 프랜차이즈 스타이기에 주목도가 더 컸을지 모르겠다. 공필성 2군 감독은 “김태형 감독님을 보필해 팀에 일조하겠다”고 소감을 남겼다. 공 감독과 함께 두산팬들에게 첫인사를 드린 유태현 코치도 비슷한 이유로 키워드를 생산했다. 선수 가운데 가장 흔히 이름을 보였던 이는 두 명이다. 정재훈과 김재호다. 주목 받을 만한 제각각의 사연이 있다. 정재훈은 프로 데뷔 시즌인 2003년부터 2014년까지 두산 유니폼만 입어왔던 선수다. 그러던 그가 작년 롯데로 떠났다가 2차 드래프트를 통해 1년 만에 돌아왔다. 정재훈이 인기 키워드 등극 비결은 ‘재회의 기쁨’ 정도가 되지 않을까? 김재호도 만만치 않은 두산의 터줏대감이다. 2004년부터 줄곧 두산에서 프로 생활을 꾸려 왔다. 시무식 인기 스타의 비결은 따로 있다. 바로 주장 등극이다. 오재원에 이어 완장을 넘겨 받았다. 두산의 ‘주장=예비 FA’ 공식은 올해도 유효하다. 10개 구단 중 두산만이 가질 수 있었던 키워드 하나. 바로 ‘V5’와 우승이다. 15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을 차지한 두산의 뚝심은 올해도 유효하다. 그렇다고 나태해진 건 아니다. 김태형 감독은 “달콤한 우승의 기억은 잊고 올시즌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넥센 히어로즈 역시 ‘빌리 장석’이다. 6일 목동구장에서 열린 넥센의 시무식에서 이장석 대표는 이목을 잡아 끌 줄 알았다. 선수들의 대거 유출로 넥센이 하위권에 분류됐다고 하자 “주위 평가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말했다. 더군다나 올해는 넥센이나 이 대표에게 뜻깊은 한 해다. 2007년 프로야구판에 뛰어든 이후 보금자리로 삼던 목동 구장을 처음으로 떠나기 때문이다. 2016시즌부터 넥센은 고척 스카이돔을 홈구장으로 쓴다. 다른 구단과는 달리 ‘목동’이나 ‘고척돔’ 등의 야구장 키워드가 발생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카메라의 플래시 세례를 받은 이는 따로 있었다. 2013년부터 팀을 가을야구로 이끈 염경엽 감독도, 새 주장을 맡은 서건창도 아니다. 바로 박병호다. 엄밀히 말해 더 이상 넥센 선수가 아닌 이가 넥센 시무식에서 발생된 이슈 키워드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포스팅을 통해 올해부터 미국 메이저리그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활약할 박병호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친정팀의 시무식을 찾았다. 등장과 동시에 현장에 있던 모든 미디어가 그를 주목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올시즌 박병호가 내려 놓은 넥센의 간판 스타 자리를 누가 이어 받을까. 조상우는 시무식에서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키워드를 차지했다. 염경엽 감독의 “올시즌 조상우를 선발로 쓰겠다”는 발언 덕이다. 밴헤켄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구멍이 난 선발의 한축을 조상우로 메우겠다는 복안이다. 조상우 역시 “선발은 나의 오랜 꿈”이라며 이런 도전을 반겼다. 지난 시즌 조상우는 70경기에 등판해 8승 5패 5세이브 19홀드 평균자책점 3.09라는 합격점을 받았다. 조상우의 공이 불펜에서가 아닌, 선발에서도 통할지 주목해 보자. ★롯데 자이언츠 롯데는 정말 달라질까. 11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시무식에서는 독한 말들이 오고 갔다. 주장 강민호는 “’꼴데(꼴찌와 롯데의 합성어로 팀을 낮춰 부르는 말)’스럽다고? 겨우내 팀이 많이 변화했다”고 말했다. 이창원 사장 역시 “과거 영광은 잊자”며 “더 이상 꼴데스럽다는 말은 듣지 말자”고 다짐했다. 지난 시즌에 8위, 2014 시즌에는 7위, 2013 시즌엔 5위에 그치며 최근 3년을 내리 포스트시즌에 탈락한 현실을 통렬하게 반성한 것이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는 쓰단다. 독한 자아성찰 속에 희망도 엿봤다. 신임 감독 조원우를 제외한다면 특정 부분에 키워드가 몰렸다. 윤길현-손승락-불펜이 그것이다. SK와 넥센의 핵심 불펜 요원이던 윤길현과 손승락은 이번 FA를 통해 롯데의 유니폼을 입었다. 윤길현은 12시즌 통산 495경기에 나와 34승 27패 28세이브 78홀드 평균자책점 3.96을 기록했다. 손승락은 8시즌 통산 382경기에 나와 30승 35패 177세이브 5홀드 평균자책점 3.68을 기록했다. 둘 모두 산전수전 다 겪은 정상급 불펜 투수다. 이 둘은 롯데의 숙원인 ‘불펜 강화’에 일조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키워드도 눈에 띈다. 바로 황재균과 ‘10번’이다. 올시즌 손아섭과 함께 메이저리그 포스팅을 신청했다 시장의 냉정함만 체감하고 돌아온 선수다. 황재균은 지금껏 달고 있던 13번을 내려 놓고 10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10번은 이대호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롯데에서 쓰던 번호다. ★삼성 라이온즈 삼성의 2016년은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는 한 해일 것이다. 도박 사건으로 작년 가을부터 지금껏 몸살을 앓아왔고, 그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나 희망도 있다. 먼저 원년 시절부터 쓰던 대구구장을 떠나 라이온즈 파크로 터전을 옮긴다. 게다가 지난 시즌 신인왕인 구자욱은 여전히 성장 가능성이 무한해 보인다. 이케빈은 제2의 구자욱이 될 만한 신인이다. 이런 기류는 시무식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11일 경산 볼파크에서 열린 삼성의 시무식에서는 여러 색깔의 키워드가 존재했다.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안지만과 윤성환이다. 도박 사건에 연루된 이들이 스프링캠프에 합류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함께 홍역을 치른 오승환의 이름도 자주 등장했다. 이날 시무식에서는 사장 이취임식도 열렸다. 김동환 신임 사장과 김인 전 사장의 키워드가 등장한 것은 그래서다. 김동환 사장은 “시련이 자양분이 될 것”이라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또한 삼성 라이온즈란 구단이 명품브랜드가 되길 당부하기도. 삼성엔 스타가 많다. 그중에서도 간판급 거물이 있었으니, 이승엽이다. 존재감만으로도 선수단을 이끌 수 있는 ‘전설’이자 프랜차이즈 선수. 그런 그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올해 불혹을 맞이한 이승엽은 2년 뒤 은퇴를 예고했다. “목표는 우승”이라고 다짐한 이승엽이 선수 생활의 ‘화룡점정’을 이룰 수 있을지 주목해 보자.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2016.01.1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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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연봉전쟁의 전설, 정민태vs이승엽을 아시나요

“프로야구선수에게 연봉이란 곧 자존심에 다름 아니다.”스토브리그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다. 그러나 그 자존심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 기준인지 모른다. 해를 넘겨서도 여전히 계약서에 도장을 찍지 못한 김광현(SK)과 양현종(KIA)만 본다면 그렇다. 류현진이 떠난 2012년 이후 KBO리그의 최고 투수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이들은 연봉 협상에서도 양보가 없었다. 대부분 연봉 계약을 마친 상태에서 눈치싸움은 더 치열하다. 김광현은 6억 원, 양현종을 4억 원을 받고 있다. 이들 가운데 최소 한 명은 작년 김현수(당시 두산)가 세운 비(非) FA 최고액인 7억 5000만원을 경신할 것이 가능해 보인다.‘88 둥이’, 왼손 투수, 팀의 에이스 등 교집합이 많던 양 선수이기에 경쟁 의식은 한층 더 짙어졌을 터. 라이벌이란 그런 것. 이들 이전에 최고 연봉자의 자리를 두고 팽팽한 경합을 벌이던 두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이승엽(삼성)과 정민태(당시 현대)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KBO리그 최고 투수와 타자 자리를 독점했던 이들은 21세기에 나타난 지금의 라이벌보다 더 치열했다. 프로야구 사상 최초 50홈런 돌파, 정규시즌 MVP,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 타점-득점-장타율- 출루율 등 4관왕 달성. 1999년 이승엽이 세운 업적이다. 그야말로 우승 빼고 다 이뤘던 시즌이었다. 이런 그에게 최고 대우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성 구단은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연봉 3억 원이라는 명예를 안겨줬다. 이전 해 받은 1억 1000만원보다 두 배가 넘게 뛴 금액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잠시 뿐이었다. 이승엽의 사인 소식을 기다리고 있던 현대 측이 곧바로 정민태에게 3억 1000만원을 준 것이다. 생애 최초로 연봉왕을 노리던 이승엽은 다시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그렇다고 정민태가 거품이 낀 선수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이승엽만큼은 아니더라도 정민태 역시 투수 부문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기 때문이다. 20승을 달성하며 평균자책점 2.54의 역대급 시즌을 보냈다. 정민태의 전성기는 ‘순간’이 아니다. 1996년부터 5년 연속 200이닝을 소화했으며, 6년 연속 10승 이상을 달성했다. 특히 정민태가 그 해 세운 230.2이닝이란 기록은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 시즌 최다 소화 이닝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두 선수의 자존심은 구단의 대리전으로 비화됐다. 삼성과 현대라는 한국 최고의 기업답게(?) 손도 컸다. 현대는 2000년 스토브리그 당시 일찌감치 “이승엽보다 연봉을 많이 주겠다”고 공언했다. 일본 진출이 좌절된 정민태의 마음도 달래고, 자존심을 세워주겠다는 의중이다. 그러나 삼성도 지지 않았다. 현대의 우승과 함께 연봉킹의 등극을 지켜보고 있던 삼성이 반격에 나선 건 그로부터 3년 뒤였다. 삼성은 “이승엽의 공헌을 감안해 최고대우를 했다”고 밝혔다. 이승엽이 연봉킹에 등극한 건 프로 9년차가 되던 2003년이다. 이전 해 4억 1000만원을 받던 그는 타자 부문 4관왕에 오르며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는 등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게다가 팀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결국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고액인 6억 3000만원을 안겨줬다. 이는 불과 4일 전 연봉 1위 자리를 점령한 이상훈(당시 LG)을 끌어내리는 금액이기도 했다. 정민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왕관을 쓴 이승엽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승엽이 6억 원의 벽을 깼다면 7억 원은 당연히 그의 몫이겠다. 2004년, 정민태는 한국으로 돌아왔고(2003년 5억 원 연봉으로 복귀), 이승엽은 일본으로 떠났다. 정민태는 구단과 오랜 줄다리기 끝에 그 해 2월 4일 7억 4000만원에 재계약했다. 이승엽이 세운 금액보다 1억 원 이상 많은 액수다. 팀의 세 번째 우승과 본인의 한국 시리즈 MVP 수상, 다승왕 등의 업적이 반영된 금액이기도 하다. 두 선수의 한계를 모를 연봉 전쟁은 '절대자'의 등장으로 일단락 됐다. 2003년 말, 삼성은 현대에서 활약하던 심정수를 당시 FA 최고액인 4년 60억 원(2005년 7억 5000만원으로 당시 연봉 1위)을 주며 모셔왔다. 물론 이승엽의 오랜 일본 생활과 뚜렷이 기량 저하를 보인 정민태 등 당사자의 일이 컸지만 말이다. 21세기 연봉 전쟁은 어떤 결말을 보일까.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2016.01.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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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김성근과 악동 외국인, 정말 재밌게 됐다

※외국인 리포트 ④ 한화 나이저 모건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장종훈의 41 홈런 얘기다. 1992년 작성된 이것은 한국야구에서 전인미답의 경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딱 6년까지만 해야 했다. 1998년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등장한 타이론 우즈는 42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면서 그 해 MVP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1998년 10월 2일 중앙일보 스포츠면의 헤드라인 제목은 “우즈 42호포, 한국야구 금자탑“이었다. 이후 17년, 한국야구에서 그들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올해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가 구단 별 3명으로 늘었다. 10구단 체제인 내년부터는 역대 최다인 31명(신생팀 kt는 4명)이 그라운드를 누빈다. 일간스포츠는 2015년의 우즈가, 리오스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에도 한화맨이다. 지난 11일 한화 외국인 선수의 마지막 퍼즐이 된 나이저 모건(34)이 그 주인공이다.메이저리그 태초에 두 부류의 타자가 있었다. 타이 콥과 호너스 와그너다. 1905년 나타난 타이 콥은 통산 타율 0.367을 자랑하는 타격의 신이다. 100년 넘게 빅리그 역대 최고의 타율 부문 맨 꼭대기에 자신의 이름을 박아두었으며,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든 4할을 세번이나 기록하기도 했다. 성격 또한 ‘더럽기로’ 최고였다. 골수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잘 벼린 스파이크 징을 세우고 야수들을 향해 슬라이딩 하기 일쑤였다. 천재이지만, 동시에 독하고 사악한 타자였다. 1897년 데뷔한 호너스 와그너는 달랐다. 타격왕을 여덟 차례나 수상하는 등 타격 재능만큼은 타이 콥과 어깨를 나란히 했지만, 성정은 정반대였다. 콥이 악마라면 와그너는 천사였다. 그는 돈보다 명예를 중시한 그라운드의 신사였다. 자신의 얼굴이 담배 홍보에 이용되는 게 싫어 야구카드의 판매를 중단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으니까( 발췌. 이상미디어).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작년 12월 그의 야구카드는 40만 달러에 팔렸다. (그의 부탁으로 인해)200장만 발행된 희소성 덕이다. 참고로 호너스 야구카드의 최고 낙찰액은 2007년 팔린 280만 달러. 모건의 대표적인 벤치클리어링 에피소드. 타자가 공을 맞지 않고서도 이것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놀라운 영상이다▶영상보기 모건은 호너스 와그너보다는 타이 콥의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미국의 스포츠전문지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는 모건의 그라운드에서 벌인 난동 및 기행을 정리해놨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일주일’ 동안 벌어진 일이다. 8월 25일. 모건은 자신에게 야유를 퍼붓는 필라델피아의 팬에게 공을 집어던졌다. 이 사건은 선수들에게 팬들과는 신경전하지 말라는 불문율을 다시금 각인시켜줬다. 8월 27일.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팽팽한 접전 상황. 8회 루상에 나간 모건은 그 긴장감을 해소시켰다. 견제사를 당했단 얘기다. 타석에 있던 윌리 해리스는 바로 초대형 홈런을 때려냈고, 경기는 2-4로 워싱턴 내셔널스의 패배. 리글맨 감독은 이튿 날 바로 그를 8번 타순으로 내려 앉혔다. 모건은 이날 쌓인 불만을 다음 경기에 시원하게 풀어버렸다. 아래처럼. 8월 28일.주자 모건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전에서 상대팀 포수 브라이언 앤더슨과 홈경합을 시도 했다. 앤더슨은 안방지키기에 크게 관심이 없던 상황인데도 말이다(다른 플레이를 위해 등을 지고 있던 상황이었고, 홈승부는 고려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모건은 그저 앤더슨을 홈에서 밀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모건의 과격한 플레이는 홈플레이트 주변을 험악한 분위기로 만들어놨고, 정작 그는 분노했다. 아, 그렇다고 팀이 점수를 올린 것도 아니었다. 리글맨 감독은 앤더슨과 라 루사 카디널스 감독에게 정식으로 사과해야 했다. 8월 30일.모건은 워싱턴 포스트와의 인터뷰를 통해 감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건 단지 카디널스의 잘못이었어요. 감독님, 당신의 선수를 언론을 통해 비난하지 마세요” 8월 마지막 날의 모건.10회까지 무득점 게임으로 진행되던 지루한 어느 날, 모건은 마이애미 말린스의 포수 브렛 헤이스에게 달려 들었고, 헤이스는 어깨 부상으로 바로 시즌을 접어야 했다. 이어 모건의 타석에서 빈볼이 날라온 건 당연한 결과였고, 그 이상의 상황은 설명을 안해도 알 거라 믿는다. 다음은 경기 후 모건의 항변이다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어요. 날 맞힐 수 있죠. 경기의 일부니까. 그런데 방법이 잘못 됐어요. 어떻게 나 말고도 우리팀 동료를 두 번이나 맞힐 수 있는 거죠?” 아이스하키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건. 좌측 하단의 작은 사진은 7살의 '아이스하키선수' 모건 말썽 부리는 아들을 둔 어머니들이 “우리 애가 원래부터 나쁘진 않았어요”라고 대부분 웅변하듯 모건도 원래부터 악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고난 운동신경을 보인 스포츠 꿈나무였다. 1988년, 7살 소년 모건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캘거리 동계올림픽을 시청하면서 꿈이 생겼다.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겠어” 모건은 바로 아버지를 졸랐고, 8년 후, 브리티쉬 콜럼비아 하키리그에 소속된 버논 바이퍼스에 트라이아웃을 받았다. 결과적으론 불합격. 그러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권토중래하며 결국 퍼시픽 국제 주니어 하키 리그에 소속된 델타 아이스 호크팀에 입단한다. 캐나다의 밴쿠버 지역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인 델타(Delta)시를 연고로 하는 팀이었다. 꿈 많던 체육 소년은 오프시즌에는 방망이를 잡았다. 메이저리그의 꿈도 포기할 수 없어서다. 꿈은 현실이 되었으며, 모건은 1998년 열린 메이저리그 아마추어 드래프트 42라운드에서 콜로라도 로키스에 선택된다. 그러나 아이스하키의 열망이 더 컸던 탓일까. 끝내 계약서에 사인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모건의 성정이 강퍅(?)해진 원인은 이때부터였는지 모른다. 캐나다의 군소도시의 팀에 소속된 유일한 흑인이 살아남는 길은 터프해지는 것밖에 없었다. “확실히 ‘컬쳐 쇼크’였죠. 그러나 난 워낙에 활달한 성격이었고, 상대가 누구든 간에 오픈 마인드로 다가가려 노력했어요. 어떻게 대하든 속 좁게 굴지 않고요” 모건의 마지막 아이스하키팀은 웨스턴 하키 리그(WHL)에 소속된 레지나 팻츠다. 브렌트 파커 당시 감독은 모건에 대해 이렇게 추억했다. 모건과는 1999년부터 2년간 같은 팀에서 뛴 바 있다. “모건은 항상 웃고 있었고,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팀에 좋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죠” 모건은 데뷔전인 무스 조 워리어스전에서 두골을 넣는 등 맹활약했지만, 거기까지였다. 파커 감독은 “모건은 아이스하키 선수로서 평균 정도의 재능을 갖고 있다”며 “엘리트 수준을 기대하기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자신에게 맞는 스포츠 종목을 찾길 바랍니다” 7경기 출전에 2골. 모건의 마지막 아이스하키 성적이었다. 때마침 모건이 레지나 팻츠를 떠난 시기와 맞물려 당시 그의 여자친구는 임신을 했다. “이제 하키 글러브를 벗고 야구 글러브를 낄 때가 왔구나” 모건이 야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은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들어진 셈이다. 모건은 2001년 왈라 왈라 대학의 야구팀에 입단을 시작으로 방향키를 완전히 돌렸다. 이어 2002년 열린 메이저리그 아마추어 드래프트 33라운드에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 지명된다. 모건의 본격적인 야구 인생의 서막이 올랐다. 이제 모건의 해프닝도, 하키도 아닌 본격적인 ‘야구 얘기’를 해보자. 빅리거의 꿈은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모건은 입단 후 2008년까지 마이너리그에서 담금질했다. 꾸준히 기량을 올리던 모건은 2006년 이후 매년 3할대를 오가는 타율을 기록하며 빅리거 입성을 재촉했다. 특히 2006년 59개의 도루를 기록하는 등 매년 두자릿수 이상의 베이스를 훔치며 주루에도 재능을 보였다. 마이너 통산 도루 개수는 236개. 타자 모건보다 외야수 모건은 더 대단했다. 한시즌에만 보살 10개를 기록했으며 통산 FLD%(수비율) 역시 0.978을 찍었다. 우익수로 출전했을 경우엔 1할에 달했다. 모건의 인생 수비. 놀라지 마시라. 이제 대전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일테니.▶영상보기 모건은 마침내 9월 1일, 자신의 메이저 데뷔 경기를 치렀다. 밀워키 블루어스와의 홈경기에 중견수로 출전한 모건은 1타수 1안타 1볼넷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약 보름 후인 9월 17일 모건은 빅리그에 엄청난 신고식을 치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장기인 수비로 말이다. 6회 휴스턴의 타이 위긴튼이 날린 외야 깊숙한 타구를 중견수인 모건이 전력질주해 담장 근처에서 잡아낸 것이다. ‘더 캐치’. 1954년 월드시리즈에서 윌리 메이스가 했던 그것을 연상케하는 미기였다. “난 어떤 타구든 간에 잡으려 노력합니다.” 보름치 메이저 경력의 모건이 말했다. “펜스까지 난 타구를 따라갔고, 시선을 집중했죠. 그저 멋진 플레이를 만들어보려 했을 뿐이었는데!” 짜릿한 데뷔시즌의 성적은 107타수 32안타, 타율 0.299, 도루 19개였다. 다음해 출전경기를 58경기로 늘리며 자리를 잡아가는 듯 했지만 2009년 시즌 도중 워싱턴 내셔널스로 트레이드 된다. 당시 주전 중견수였던 네이트 맥루스(2008년 골드 글러브 수상, 올스타 출전)와의 경쟁에서 밀려난 탓이다. 역설적이지만 팀을 갈아탄 2009년이 모건의 ‘리즈’ 시절이었다. 자신의 최고 타율인 0.307을 기록했으며, 144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처음으로 100경기를 넘게 출장하며 풀타임 리거로 활약했던 첫 해이기도 하다. 도루 역시 역대 최고이자 내셔널리그 2위인 42개. 내셔널스에서 풀타임으로 활약한 2010년도 좋았다. 개인 최다인 136경기에 출장했으며, 리그에서 세 번째로 많은 희생번트(15개)를 성공 시켰다. 9이닝당 수비 기여율(RF/9)은 리그 5위인 2.73. 그러나 그만큼 사고도 많았던 해이기도 한데, 그 업적은 위에 설명한 바와 같다. 1만 5천 달러의 벌금을 물고 8경기 출장 정지를 당한 시즌에 이룬 성적이기에 어찌보면 더 대단하기도 하다. 카디널스와 벤치클리어링 후 클럽하우스 인터뷰. "푸홀스와 카펜터가 날 밀쳤다"고 분개한다.▶영상보기 물론 성격 탓만은 아니리라. 2년 만에 팀을 떠난 이유가 말이다. 모건은 2011년 밀워키 블루어스의 커터 딕스타라와 맞트레이드된다. 플래툰 시스템 탓에 카를로스 고메즈와 중견수 자리를 나눠서 지키며 모건은 벤치를 덥히는 시간이 많아졌다. 하지만 다시 3할대 타율에 올라섰고, 세자릿수 안타를 치는 등 타격에선 기복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빅리거의 끝이 보였다. 2012년, 자신의 역대 최저 타율인 0.239를 기록하며 메이저리그를 떠나 일본으로 향한다. 메이저리그 7시즌 통산 성적은 598경기 출장, 550안타, 120 도루, 타율 0.282이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경험은 모건에게 신선하고도 감동적이었다. 관중석에 공을 집어던진 전과가 있던 모건이 팬사랑을 듬뿍 받은 첫경험을 한 것이다. 특유의 ‘T자’ 세리머니는 금세 팬들에게 각인됐으며 이는 곧 모건의 시그니처가 됐다. 108경기 출전, 0.294의 타율에 11홈런이 그의 일본리그 성적표다. 두자릿수 홈런은 야구 경력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시즌 후 모건의 에이전트인 조나단 머러는 “모건에게 일본 생활을 훌륭한 경험이었고, 그 역시 계속 여기서 야구를 하고 싶어했다”고 밝혔다. 모건 역시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수차례 일본 생활의 즐거움을 표현한 바 있다. 위는 모건의 T 세리머니. 아래는 요코하마 지역의 유치원 어린이들이 단체로 따라하고 있는 모습. 훈훈. 그러나 “만족스러운 계약 조건이 성사됐고 모건 또한 미국으로 돌아가길 원했다”다는 에이전트의 말대로 모건은 2014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1백만 달러(옵션 포함)에 계약한다. 아쉽게도 모건이 시즌 대부분을 마이너에서 보내면서(빅리그 15경기 출전) 이 금액은 대부분 받진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계약 당시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또한 모건의 영입에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일부 관계자에 따르면 “피츠버그 구단은 모건에게 스프링 캠프 합류를 권했다”고 한다. 앤드류 매커첸과 그레고리 플랑코가 버티고 있는 외야에 모건을 백업 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구상안이 이유였다. 물론 물거품이 됐지만 만일 성사됐다면, 우리는 모건을 다른 의미로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한화맨이 아닌 강정호의 팀메이트로서 말이다. 타이 콥은 항상 악당이었을까. 1994년 개봉한 그의 일대기를 그린 이란 영화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았다. 자신의 불우한 가정사와는 반대로 식구들은 끔찍히 아끼던 아버지였고, 은퇴 후엔 병원을 지어 사회 기부도 했다. 사람이 한 번 이미지가 굳어지면 바뀌기 힘든 법이다. 설령 사실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올해부터는 외국인 선수라도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면 엄벌을 내리는 감독도 부임했다. 올시즌 한화의 모건에게 다른 모습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의 ‘T 세리머니’ 만큼은 계속 보고 싶다. 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 사진=베이스볼 레퍼런스, MLB.com, 파이어리츠닷컴, 베이스볼 레퍼런스, 내셔널스 뉴스 네트워크, 모건 페이스북 ▶스윙맨 지난호 보기 2015.01.14 07:00
야구

[이상서의 스윙맨] LG 한나한, 미국판 광주일고 출신이라고?

※외인리포트② LG 잭 한나한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장종훈의 41 홈런 얘기다. 1992년 작성된 이것은 한국야구에서 전인미답의 경지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딱 6년까지만 해야 했다. 1998년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등장한 타이론 우즈는 42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면서 그 해 MVP까지 거머쥐었다. 당시 1998년 10월 2일 중앙일보 스포츠면의 헤드라인 제목은 “우즈 42호포, 한국야구 금자탑“이었다. 이후 17년, 한국야구에서 그들의 존재는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올해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가 구단 별 3명으로 늘었다. 10구단 체제인 내년부터는 역대 최다인 31명(신생팀 kt는 4명)이 그라운드를 누빈다. 일간스포츠는 2015년의 우즈가, 리오스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포문을 연 SK의 메릴 켈리에 이어 이번 손님은 최근 LG와 계약을 맺은 잭 한나한(Jack Hannahan)이다. LG는 23일 "잭 한나한의 100만 달러에 영입했다"고 밝혔다. 대한민국 고교야구에 광주일고가 있다면, 미국엔 미네소타주 세인트 폴에 위치한 크레틴-더햄 홀 고등학교가 있다.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포수인 조 마우어를 비롯해 2004년 명예의 전당에 오른 폴 몰리터를 비롯해 베테랑 야구 심판인 팀 츠치다, 마크 웨그너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1982년 이후 미네소타 주에서 들어올린 우승컵만 11차례이며 1996년부터는 3연패를 달성하기도 했다. 오늘 소개할 잭 한나한 역시 이 학교 출신이다. 한나한이 졸업반이던 시절 세 살 터울의 조 마우어(현재 미네소타 트윈스 포수. 작년 WBC에 미국 국가대표로 선발되기도 했다)가 신입생으로 들어오며 같이 학창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함께 경기에 뛴 적은 없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폴 몰리터조차 신입생 때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으니까요” 한나한의 말이다. 한나한은 고교 재학 시절 주전 3루수로 활약하며 0.221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흥미로운 점은 동시에 미식축구팀과 농구팀에서 맹활약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병행할 순 없는 법. 미네소타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한나한은 야구로 노선을 굳힌다. 선택은 옳았다. 신입생 시절인 1999년, 한나한은 0.360의 타율에 28득점, 30타점, 4홈런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2년차엔 한층 더 성장했다. 타율은 0.327로 다소 떨어졌지만 홈런은 그 전 해의 두 배인 8홈런, 43타점, 46득점이라는 성적표를 남겼다. 이후 지역 퍼스트 팀에 선발되며 득점과 홈런, 타점 부문에서 자신의 이름을 맨 꼭대기에 올렸다. 2001년 메이저리그 드래프트에서 그의 이름이 초반에 호명된 건 당연했다. 3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지명되며 프로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 이후 2002년 더블A, 2005년 트리플A를 거쳐 마침내 2006년 5월 26일, 고대하던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다. 빅리그의 벽은 높았다. 한나한은 그 해 단 3경기에 출전해 9타수 무안타 1 볼넷, 1 삼진이란 성적으로 데뷔 시즌을 마쳤다. 메이저리그는 한나한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이듬해 트리플A에서 전전하던 한나한은 8월 13일 오클랜드 애슬리틱스의 외야수인 제이슨 페리와 시즌 도중 맞트레이드 된다. 오클랜드에서 보낸 3년은 나쁘지 않았다. 236 경기에 출전하며 158안타를 쳐냈고, 13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겼다. 타율은 한 번도 3할을 넘기진 못했으나 주로 3루수로 출전하며 준수한 수비력을 뽐냈다. 2007년 8월 15일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마크 벌리를 상대로 첫 안타를 뽑아냈고, 5일 후엔 빅리그 홈런 신고식을 치렀다. 처음으로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2008년이 절정이었다. 9년이라는 빅리거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143경기에 출전했으며 95안타를 뽑아냈다. 이른바 한나한의 리즈 시절. 당시 오클랜드의 감독이었던 밥 게렌은 한나한을 회상하며 “가장 영리한 선수였으며 노력가였다”고 말했다. “그에겐 좋은 미래가 있을 거라 생각했죠” 밥 게렌의 말이 실현된 걸까. 한나한의 인생에서 꿈같은 경기가 생겼다. 2008년 8월 18일의 일. 메이저리거로서 고향을 찾은 것이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원정경기가 열린 메트로돔에는 한나한의 가족과 친구들이 그를 보기 위해 몰렸다. “꿈이 현실이 됐어요. 트윈스의 구장에서, 그것도 내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경기를 하다니요! 흥분되고 짜릿했습니다” 당시 여자친구인 제니 하이넨(2010년에 한나한과 약혼식을 올렸다)을 비롯해 경기장에 모인 200여명의 친지들을 보며 한나한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쓸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2009년, 한나한은 다시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했다. 시애틀 매리너스의 투수 저스틴 수자와 트레이드 되어 팀을 떠난다. 오클랜드에서 단 2이닝만을 유격수로 출장한 바 있는 한나한(1루수로는 90이닝, 3루수로는 1832와 2/3이닝)은 시애틀에서 유격수로의 변신을 감행한다. 당시 시애틀의 감독이었던 돈 와카마쓰가 그를 팀 내야의 백업선수로서 활용할 구상안 때문이었다, “스프링캠프나 마이너에서 유격수를 본 적은 있었죠. 포지션 변화가 그리 나쁘진 않습니다” 한나한은 덤덤하게 말했다. “팀에서 날 (유격수로서) 필요하다면, 아마 만족할 수 있을 겁니다(If they need me, they’ll find me).”▶클리블랜드 시절 한나한의 명수비 영상 ▶쿠야호가(클리블랜드 내에 위치한 지역)의 영웅 잭한나한. 한나한의 유머스러운 면을 엿볼 수 있는 영상이다. 이 남자, 예능감까지 있다. 한나한의 시애틀 생활 역시 길지 않았다. 2010년 10월 3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은 그는 2011년부터 2년간 추신수와 한솥밥을 먹게 된다. 특히 2012년 추신수가 몸에 맞는 공에서 비롯된 벤치클리어링에 앞장섰던 모습이 국내팬들에게 화제가 된 바 있다. 클리블랜드에서 보낸 2년 동안의 총 성적은 607타수 100안타 2할 4푼대의 타율이다. 2012년은 한나한의 연봉이 처음으로 1백만 달러를 넘겼던 해이기도 한데, 이후 매년 1백만 달러 이상의 연봉을 유지하게 된다. 짧았던 클리블랜드의 시절, 2013년 함께 신시네티 레즈로 팀을 옮길 때까지 둘의 우정은 계속된다. ▶신시내티 시절 한나한의 수비 명장면신시내티에서의 야구 인생은 썩 순탄치 않았다. 2013년부터 그를 괴롭혀 왔던 오른쪽 어깨 부상 탓이다. 결국 2013년 10월 12일 ‘관절와순 파열(torn labrum)’ 수술을 받았고 이듬해까지 수술과 재활을 병행하게 된다. 신시네티닷컴에 따르면 한나한은 34살이 된 올해 개막 이후 60경기에 결장했다. 7월 초 마이너리그에서 재활 경기를 가지며 주로 지명타자와 1루수로 출전하며 총 12경기에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이후 같은 달 28일에 열린 워싱턴 내셔널즈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복귀전을 치렀다. 2013년 9월 21일 이후 근 10개월만의 빅리그 재입성.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어떤 포지션에 서든(심지어 벤치로 밀려나든) 안타를 때려내기 위해 노력할 거란 사실입니다. 만일 팀에 내가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이 들면 자청해서 라인업에서 빠질 겁니다” 한나한은 조이 보토가 없는 팀( 7월 6일 이후로 무릎통증 탓에 장기 결장)에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나 어깨 부상 탓일까. 주로 1루수와 지명타자로만 출장하며 단 26경기만 출장해 타율 0.188을 기록했다(LG는 “한나한 어깨, 메디컬 체크 이상없다”고 밝힌바 있다). 한나한의 메이저 인생의 마침표가 찍히는 시점이다. 한나한은 2001년부터 14시즌 동안 메이저리그에서 614경기, 마이너리그에서는 그보다 많은 861경기를 출전했다. 전형적인 '4A' 타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4A 선수란 트리플A에 속하기엔 실력이 출중하지만, 빅리그에서 뛰기엔 실력이 모자라는 어정쩡한 선수에게 붙이는 약호다. 양상문 감독은 한나한을 “수비 잘하는 3루수로 그만”이라고 말했다. 2015시즌 LG의 핫코너는 안전할까. 한나한은 세간의 우려를 부식시킬 수 있을까. 팬들은 아직 지난 시즌 초반 조쉬벨의 화려한 수비를 기억하고 있다. 올해도 화끈했던 LG 타순은 더 뜨거워질까. LG 내야진의 마지막 퍼즐이 완성될지도 궁금하다. 내년 시즌, 잠실 구장을 찾을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온라인팀=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사진=유튜브, MLB.com, 베이스볼 레퍼런스 2015.01.0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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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서의 스윙맨] "6피트의 백인은 덩크슛할 수 없지" 그리고 택한 야구

외인리포트① SK 메릴 켈리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장종훈의 41 홈런 얘기다. 1992년 작성된 이 기록은 한국야구 전인미답의 경지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 생각은 딱 6년까지만 유효했다. 1998년 외국인 선수 도입과 함께 등장한 타이론 우즈는 42개의 공을 담장 밖으로 넘기면서 그 해 MVP까지 거머쥐었다. 1998년 10월2일 중앙일보 스포츠면 헤드라인 제목은 “우즈 42호포, 한국야구 금자탑“이었다. 이후 17년, 한국야구에서 외국인 선수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됐다.올해부터 외국인 선수 보유 숫자가 구단 별 3명으로 늘었다. 특히 10구단 체제인 2015년엔 역대 최다인 31명(신생팀 kt는 4명)이 그라운드를 누빈다. 2015년의 우즈가, 리오스가 될지도 모르는 그들을 점검해보자. 1회는 지난 18일 SK와 최종 계약을 맺은 우완 투수 메릴 켈리(Merrill Kelly)다. SK는 외국인 농사가 시원찮은 대표적인 팀이다. 2010년 카도쿠라 켄이 14승을 거두며-카도쿠라는 그해 5년만에 부활한 월간 MVP를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다. 4월 한 달 그의 성적은 6경기 6승, 평균자책점 1.98. 참고로 카도쿠라는 상금으로 받은 500만 원 중 절반을 연고지역인 인천의 한 중학교 야구부에 기부했다-통합 우승을 안겨준 이후, 효자 외국인 선수의 맥은 끊겼다. 설령 있다곤 해도 진득하게 붙어있는 법이 없었다. 2012년 세든이 14승을 수확하며 ‘잘 뽑았다’ 싶었더니 바로 일본 요미우리에 스카우트 됐다. 올해는 최악이다. 조조 레이예스, 루크 스캇, 울프 모두 시즌을 다 채우지도 못하고 팀을 떠났다. 역대 최고 스펙(빅리그 통산 135 홈런)이라던 스캇은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남겼다. 감독의 면전에 “이 거짓말쟁이에 겁쟁이(You Liar, coward)!” 독설을 퍼부은 것이다. 이처럼 흔히 외국인 선수 영입은 ‘뽑기’에 가깝다. 변수가 많고, 가늠을 할 수 없어서다. 그러나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대사처럼 “인생은 맛없는 것도, 괜찮은 것도 골고루 담긴 초콜릿 상자”라면 SK는 이제 괜찮은 외국인 선수를 뽑을 때가 됐다. 인천팬들에게 그 희망을 안겨줄 선수는 오늘 소개할 메릴 켈리(merrill kelly)다. 마이너리거 시절 켈리의 탈삼진 영상 바로보기▶ 마침내 2010년, 켈리는 모든 것이 만족된 기회를 얻는다. 탬파베이 레이즈는 8라운드에서 그를 선택한다. 이후 허드슨 밸리 레니게이즈, 볼링 그린 핫 로즈 등 2013년 던햄 불스에 정착할 때까지 5개 팀을 옮겨다니며 실력을 쌓는다. 켈리는 커쇼나 그가 좋아하는 팀 린스컴처럼 성장이 빠른 선수는 아니다. 그렇다고 퇴보하지도 않았다. 마운드에 있어서 그의 신념처럼 “불카운트가 불리하든 유리하든(상황이 어떻든간에), 내가 할 일은 스트라이크 꽂아 넣는 것 뿐” 이었다. 정점은 몽고메리와 던햄에서 던졌던 작년이다. 시즌 내내 빼어난 투구를 선보였던 그는 13승 10패, 평균자책점 3.64를 성적표를 내놨다. 150이닝이 넘는 공을 던지며 생애 첫 세자릿수 탈삼진도 기록했다. 특히 그의 인생 경기라 할 수 있는 트리플 A 데뷔전에서 10개의 탈삼진을 뽑아냈다. “10개라고요? 내 평생 10개 탈삼진을 거둔 경기는 없었어요. 팀 메이트인 후안 산도발도 ‘대체 무슨 일이야’라고 물을 정도였죠. 몰라요. 그날 전 암전(blacked out) 됐으니까” 켈리가 그날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안타깝지만 켈리의 도전은 딱 거기까지였다. 5시즌을 마이너에서 수행을 쌓았지만 결국 빅리그는 그를 외면했다. 마이너 통산 성적은 39승 26패. 527.1이닝을 던졌고 평균자책점 3.40이었다. 탈산진은 총 379개를 거뒀는데 통산 9이닝당 탈삼진수(K/9)은 6.5개로써 김광현이 올해 국내리그에서 거둔 7.51(K/9)에 버금가는 수치다. 마지막 시즌은 올해 트리플 A 올스타에 선정됐고 평균자책점은 2.76. 물론 메이저 경력이 없다는 것이 다소 눈에 밟힌다는 SK 팬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가 증명하지 않았는가. 한국야구에서 성공 첫째 조건은 성적이 아닌 적응력과 인성 임을(여기서 한 번 더 등장하는 빅리그 135홈런의 루크 스캇). 아마 올해 9월쯤이었을 게다. 팀 1000승 기념으로 문학구장에서 팬과 함께하는 이벤트를 진행했는데 그날 수훈 선수로 뽑힌 밴와트와 박진만이 응원단상으로 올라왔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밴와트였다. 대개 선수라는 위치(?)에 맞게 립서비스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팀이 포스트 시즌에 나갈 수 있도록 돕겠다”라는 겸손한 말투에 반하지 않았을 인천팬들은 아마 그 자리엔 없었을 것이다. 마침 SK는 22일 밴와트를 잡는데 성공했다는 낭보를 전해왔다. 참고기사: SK 새식구 켈리 "이학주, 매티스에게 韓 야구에 대해 들었다" 김광현과 함께 동갑내기(88둥이) 원투펀치가 비룡 마운드를 이끄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이상서 기자 coda@joongang.co.kr사진=MLB.com, 메릴 켈리 트위터, 중앙일보 DB, 베이스볼 레퍼런스 2014.12.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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