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CJ ENM 제공
연상호 감독이 저예산 프로젝트 ‘얼굴’에서 보여준 장르적 모험과 날카로운 주제 의식을 신작 ‘실낙원’으로 이어간다. ‘군체’에 이어 올해 두 번째로 선보이는 작품으로, 대형 상업 프로젝트와 도전적 연출을 오가는 연 감독 특유의 유연한 창작 기조가 돋보인다.
이야기는 소영(김현주)이 9년 전 캠핑스쿨 버스 실종 사건으로 아들 선우를 잃으며 시작된다. 무너진 일상 속에서 그를 버티게 한 것은 가상현실 AI 서비스 ‘낙원의 아이들’이다. 스마트 글래스를 매개로 그 시절 선우와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공유하는 가상공간은 소영에게 상실의 고통을 유예해 주는 견고한 안식처다.
그러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들 선우(배현성)가 9년 만에 성인이 되어 돌아오면서 소영의 삶에는 균열이 생겨난다. 온화한 AI 속 아들과 달리, 현실의 선우는 연쇄살인범이 되어 주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 급기야 가상 세계 속 어린 자신에게까지 적의를 드러내며 소영이 유일하게 의지해 온 도피처마저 위협한다.
‘실낙원’은 실종된 아들과의 재회를 소재로 한 서스펜스로, 기술과 기억으로 재현된 이상적인 아들과 연쇄살인범이 되어 돌아온 현실의 아들 간 괴리를 동력으로 삼는다. 영화는 두 아들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소영을 통해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용인해야 하는지 묻고, 모성애의 이면을 조명한다.
연상호 감독은 영화의 출발점이 된 모친의 원안에 존 밀턴의 동명 서사시를 결합해 주제적 깊이를 더했다. 이브가 금기를 넘어선 뒤 죄와 책임을 짊어진 채 낙원에서 추방당했듯, 소영 역시 가상공간에 머물다 냉혹한 현실과 마주한다. 영화는 이 같은 비극을 통해 선악의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인간이 내리는 선택과 그에 따르는 책임을 조명한다. 나아가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안식이 상실을 견디게 하는 위안인지, 현실을 외면하게 하는 환영인지 시의성 있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실낙원’ 스틸 / 사진=CJ ENM 제공
모자(母子)로 만난 두 배우의 연기는 영화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힘이다. 김현주는 환영에 의존하는 가녀린 상태에서 현실에 부딪히며 무너져 내리는 인물의 심리적 스펙트럼을 정교하게 세공해 낸다. 배현성은 기존의 밝고 맑은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느린 걸음걸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불길한 아우라와 낯선 공포를 쌓는다.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두 배우의 열연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과 내면의 복잡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