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첫 스프링캠프에서 열아홉 살 신인이 낸 출사표였다.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원태인은 왕조의 부활을 꿈꿨다. 7년 뒤, ‘푸른 피의 에이스’로 성장한 그는 마침내 약속을 지켰다.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팀을 지탱했고, 우승을 결정할 마지막 승부에서는 다시 선발로 돌아와 제 몫을 했다.
삼성은 8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26 신한 SOL 뱅크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KS·7전 4선승제) 5차전에서 KT 위즈에 12-1로 승리,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정상에 올랐다. 2014년 이후 12년 만이자 통산 9번째 우승이다. 이날 선발 원태인은 5이닝 동안 88개의 공을 던져 4피안타 2볼넷 5탈삼진 1실점으로 우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정상까지 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올 시즌 원태인은 부상으로 한 해를 시작했고, 복귀 후에도 기대만큼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서 고민이 많았다. 에이스라는 이름의 무게도 컸다. 그는 시즌 중 “최근 2~3년은 제가 던지는 날에는 무조건 1승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1승을 해야 본전이라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다”라고 털어놨다. 책임감이 때로는 부담이 돼 자신을 짓눌렀다.
2019년 신인 당시 삼성 원태인. IS포토
부침을 겪으며 정규시즌을 버틴 에이스에게 가을에는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마무리 김재윤의 부상으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불펜으로 향했다.
낯선 보직이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플레이오프 2차전 9회에 등판했고, 3차전에서는 1⅔이닝을 책임지며 승리투수가 됐다. KS 2차전에서도 연장 끝내기 위기를 넘겼다. 언제 등판할지 모른 채 매일 몸을 준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원태인은 “감독님께서 제일 믿으니까 최후의 보루, 비밀병기처럼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라며 “주어진 역할이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스스로 생각했던 에이스의 역할과도 맞닿아 있었다. 원태인은 2023년을 돌아보며 “내가 던지는 날에는 팀이 이길 수 있게 해야 한다. 내가 버텨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가을에는 그 책임의 범위가 넓어졌다. 선발 등판일뿐 아니라 팀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도 자신이 버텨야 했다.
삼성 원태인. 삼성 제공
동경하던 야마모토 요시노부의 모습도 마음에 새겼다. 선발 등판 후 팀의 우승을 위해 다시 구원으로 나선 야마모토를 보며 “투혼을 넘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최고의 경기”라고 감탄했다. 원태인 역시 KS 미디어데이에서 “선발로 완봉을 하든 마지막에 올라가 세이브를 하든 팀이 이기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라고 다짐했다. 보직보다 우승이 먼저였다.
우승까지 1승을 남긴 5차전에서는 다시 본업으로 돌아왔다. 2차전 구원 등판 뒤 사흘만 쉬고 선발 마운드에 올랐다. 여러 차례 주자를 내보냈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5회 마지막 위기까지 막아낸 뒤에는 크게 포효했다. 관중석을 가득 메운 팬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에이스에게 박수를 보냈다. 불펜에서 승리를 지켰던 투수가 이번에는 선발로 우승에 힘을 보탰다.
원태인은 자신의 에세이 '라이온즈 블루 그 자체'를 통해 “몇 년 동안 시즌을 가장 위에서 끝내겠다고 이야기했는데 아직 한 번도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쉽다”라며 “시즌이 끝났을 때 가장 위에 있는 기록지를 보고 싶다”라고 했다. 국가대표가 되고 다승왕에 오르는 동안에도 채우지 못했던 꿈이었다. 가장 힘겨웠던 시즌, 원태인은 팀이 필요로 하는 자리를 오가며 그 꿈을 이뤘다. 왕조의 부활을 꿈꾸던 열아홉 살 신인은 삼성의 정상 복귀를 이끈 에이스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