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건넨 약속을 가을에 지켰다. 삼성 라이온즈의 외국인 투수 크리스 페덱이 우승을 완성하는 마지막 마운드를 책임졌다. 선발투수의 보직도, 앞선 등판에서 쌓인 피로도 우승 앞에서는 뒤로 미뤘다. 정장 차림으로 야구장에 출근한 그는 불펜에서 차례를 기다렸고, 마지막 4이닝을 던지며 대구에 우승을 안겼다.
삼성은 8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26 신한 SOL 뱅크 KBO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KS·7전 4선승제) 5차전에서 KT 위즈를 꺾고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정상에 올랐다. 2014년 이후 12년 만이자 통산 9번째 우승이다.
페덱은 삼성이 11-1로 앞선 6회 마운드에 올라 9회까지 책임지며 정상 복귀에 힘을 보탰다.
삼성 페덱. 삼성 제공
이번 가을, 페덱은 이미 많은 공을 던졌다. 페덱은 10월 26일 KIA 타이거즈와의 플레이오프 1차전과 30일 4차전, 11월 4일 KS 2차전에 선발 등판했다. 열흘 동안 세 경기를 치렀고, 누적 투구 수는 295개에 달했다. 직전 KS 2차전에서는 7이닝 1실점으로 버티며 삼성의 반격에 발판을 놓았다.
사흘을 쉰 뒤에는 불펜 대기 지시를 받았다. 박진만 삼성 감독은 5차전을 앞두고 “페덱 선수는 오늘 출전 선수 명단에 들어가 있다”라며 “이기고 있을 때 나간다”라고 예고했다. 우승까지 한 걸음만 남은 경기, 가장 믿을 수 있는 선발 카드까지 투입해 안방에서 승부를 끝내겠다는 구상이었다.
페덱도 준비를 마쳤다. 이날도 정장을 입고 경기장에 나타났다. 평소 중요한 날, 홈 선발 등판일마다 카우보이 모자와 정장을 착용하며 마음을 다잡았던 페덱이다. 이날은 선발이 아니었지만 출근길부터 단정하게 차려입고 결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원태인이 5이닝을 책임진 뒤 마운드를 넘겨받아 경기 끝까지 공을 던졌다. 선발 에이스가 만든 승리의 발판을 또 다른 선발투수가 우승으로 연결했다.
정장으로 출근하는 삼성 페덱. 삼성 제공
페덱은 후반기에 합류한 대체 외국인 투수였다. 동료들과 함께한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팀을 향한 마음은 빠르게 깊어졌다. 입단 직후부터 “대구에 우승을 안기겠다”라고 공언했다. 시즌 중에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라며 팬들에게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달라”라고 당부했다.
말에 그치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신의 루틴을 지키면서 동료들에게 경험을 나눴다. 원태인에게 등판 전날 피자를 먹는 습관을 소개한 것도 그중 하나였다. 등판 당일 긴장으로 식욕이 떨어지는 만큼 전날 충분히 에너지를 채운다는 설명이었다. 구종과 경기 운영에 관한 이야기도 아끼지 않았다. 페덱은 “나는 완벽하지 않으며 모든 정답을 알지도 못한다”면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됐던 방법을 공유하며 팀에 보탤 수 있어 기쁘다고 했다.
실점 위기 넘긴 페덱. 연합뉴스 대구 팬들은 그런 그에게 카우보이 모자로 화답했다. 관중석에 자신의 고향 문화를 담은 응원이 등장하자 페덱도 감동했다.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완전히 다른 문화라 낯설었지만, 팬들이 뿜어내는 분위기와 문화, 사람들, 음식 등 이곳의 모든 것이 완벽하다”라고 말했다. 특히 어린 팬들에게 롤모델이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뒀다.
그 응원에 돌려주고 싶었던 최고의 선물이 우승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외국인 투수는 가을 선발진의 한 축을 맡았고, 마지막 날에는 불펜에서 나와 경기를 끝냈다. 대구 팬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 달라던 페덱은, 자신도 마지막 이닝까지 마운드를 지켰다. “이 도시에 우승을 가져다드리겠다”던 약속은 그렇게 현실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