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승을 결정할 마운드에 오르기 전, 원태인(삼성 라이온즈)에게 따뜻한 응원이 도착했다. 동료 크리스 페덱이 건넨 자필 편지였다. 불필요한 부담을 내려놓고, 지금 던질 공 하나에 집중하라는 당부. 앞서 ‘피자 파워’를 나눴던 외국인 동료는 이번에는 손으로 꾹꾹 눌러쓴 글로 ‘푸피에(푸른 피의 에이스)’의 자신감을 북돋웠다.
원태인은 지난 8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KT 위즈와의 2026 신한 SOL 뱅크 KBO 한국시리즈(KS·7전 4선승제) 5차전에 선발 등판, 5이닝 동안 88개의 공을 던져 4피안타 2볼넷 5탈삼진 1실점을 기록했다. 삼성은 12-1로 승리하며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정상에 올랐다. 2014년 이후 12년 만의 KS 우승이었다.
우승 후 원태인은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페덱의 편지를 공개했다. 영문 편지와 한글로 옮긴 내용을 함께 올린 그는 '내 마음 속 최고의 투수 페덱♥'이라는 문구로 고마움을 표현했다. 우승을 합작한 두 투수 사이에 있었던 특별한 응원이 공개된 순간이었다.
“오늘 행운을 빌어!”로 시작한 편지에는 큰 경기를 앞둔 동료를 향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페덱은 “오늘 너 자신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마. 대신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받아들여”라고 당부했다. 이어 가장 큰 무대에서 팬들 앞에 공을 던지는 꿈을 꾸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라며, 지금의 원태인이 그토록 바라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8일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직후 페덱-강민호 배터리에게 달려와 축하하는 원태인. 삼성 제공
페덱은 “너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평생을 노력해왔어. 너는 이 순간을 누릴 자격이 있고 네가 우리의 ‘푸른 피의 에이스’인 분명한 이유가 있어!”라고 적었다. 에이스라는 이름을 책임감으로 짊어졌던 동료에게, 그 자리에 설 자격과 능력이 충분하다는 믿음을 전한 것이다.
핵심은 큼지막하게 적은 한 문장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 (BE PRESENT)” 페덱은 이미 던진 공을 걱정하거나 다음 이닝을 미리 생각하며 앞서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제일 중요한 건 오직 지금 네가 던지려고 하는 바로 그 공 하나야!”라는 문장에는 눈앞의 승부에만 집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다.
실제로 이날 원태인은 버티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플레이오프부터 선발 대신 불펜에서 대기하며 승부처마다 힘을 쏟았다. KS 2차전에서도 구원 등판했던 그는 사흘을 쉬고 다시 선발 마운드에 올랐다. 익숙한 보직으로 돌아왔지만, 몸은 평소와 달랐다.
우승 후 원태인은 “티는 안 내려고 했지만 팔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던지는 느낌이었다. 팔이 잘 안 돌아갔다”며 “3회가 되니까 팔이 말을 안 듣더라”고 털어놨다. 그는 “민호 형 미트만 보고 열심히 던졌다. 5회까지만 어떻게든 버티자, 우승하자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던졌다”고 돌아봤다.
삼성 원태인. 삼성 제공
편지 속 당부처럼 원태인은 눈앞의 타자와 공 하나에 힘을 쏟았다. 강민호 역시 흔들리는 에이스를 붙잡았다. 강민호는 원태인이 불펜을 바라보자 “네가 해야 한다. 맞아도 괜찮다. 주도권은 우리에게 있으니 도망가지 말자”고 격려했다고 전했다. 동료들의 믿음 속에 원태인은 끝내 5이닝을 책임졌다.
그다음 마운드를 이어받은 투수가 페덱이었다. 11-1로 앞선 6회 등판한 그는 9회까지 공을 던져 우승을 확정했다. 경기 전에는 편지로 원태인을 응원했고, 경기에서는 그가 지킨 마운드를 넘겨받아 마지막 아웃카운트까지 채웠다.
편지의 끝에는 두 사람에게 익숙한 문구도 있었다. ‘PIZZA POWER’. 페덱은 앞서 등판 전날 피자를 먹는 자신의 루틴을 원태인에게 공유한 바 있다. 등판 당일 긴장으로 식욕이 떨어지는 만큼 전날 탄수화물을 충분히 섭취한다는 설명이었다. 이를 따라 한 원태인도 “피자도 맛있었고 다음 날 경기 결과도 좋았다”며 만족했다. 함께 나눴던 작은 경험이 이번에는 편지의 마지막 응원으로 돌아왔다.
원태인은 우승 후 “라이온즈파크에서 우승을 결정짓고 싶었다. 팬들과 약속을 지켜서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몸은 무거웠지만 동료들이 곁을 지켰다. 피자를 나누고, 믿음을 전하고, 마지막에는 마운드까지 이어받은 페덱. 원태인이 남긴 “내 맘속 최고의 투수”라는 말에는 그 모든 순간을 향한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