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영화 '어느 사랑의 이야기'의 촬영 카메라 앞에 선 영화감독 신성일(가운데)이 시나리오를 들고 배우들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내 영화 인생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를 맛본 사건이다.
1971년 '연애교실'로 감독 데뷔한 나는 후속 작품들을 찾고 있었다. 그 해 어느날 TBC 방송국 측에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TBC 본사로 들어갔을 때, 이건희 이사(현 삼성전자 회장)와 김규 상무가 나를 맞이했다. 이 이사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들은 내게 '회전목마'라는 TBC 토크쇼를 진행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MC 쪽으로는 별다른 재능이 없었다.
'회전목마' 출연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김 상무는 미국에서 본 영화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주었다. 작품 소재로 고민하고 있던 나는 '바로 이거다'라고 무릎을 탁 쳤다. 그 작품이 바로 아더 힐러 감독의 '러브스토리'였다. 김 상무에 따르면 그 영화는 7번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봐야 한다는 뜻으로 미국인들 사이에서 'Seven Handkerchief Movie'로 불리고 있었다. 갑부의 아들로 아이스하키 선수인 남주인공과 이탈리아 이민자의 가난한 딸인 여주인공이 대학 도서관에서 만나고, 여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린다는 기막힌 불치병 드라마였다.
비디오 테이프를 구하기 힘들었다. '러브스토리'의 일본 시나리오를 번역해 읽어보니 당장 내가 촬영해야 할 작품이었다. 표절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이다. 빨리 번안작을 만들기로 마음 먹었다.
'연애교실'에서 내가 발탁한 신인배우 신영일과 나오미를 이 작품의 연인으로 다시 세웠다. 남주인공이 아이스하키 선수라는 점이 국내 상황과 맞지 않았다. 아이스하키라는 운동 종목이 우리 관객에게 너무 생소했다. 그래서 남주인공을 수영 선수로 바꾸었다. 신영일은 원래 유도를 한 데다 어깨가 딱 벌어져 몸이 멋졌다. 여주인공이 문제였다. 두 번째 영화 출연인 나오미에겐 이 여주인공 역할이 과중했다. 결국 촬영 하루 만에 나오미에게 양해를 구해 하차시키고, 문희를 캐스팅 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어느 사랑의 이야기'로 결정됐다.
나는 국도극장에 '어느 사랑의 이야기' 예고 간판을 걸었다. 작품은 참 예쁘게 나왔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국제영화사가 '어느 사랑의 이야기'에 대해 표절 시비를 걸었다. 국제영화사가 '러브스토리'를 7만 달러라는 거액의 개런티로 수입 계약한 것이다. 문공부는 '국제영화사의 항의가 이유있다'고 받아들였고, '어느 사랑의 이야기'는 상영 금지 조치 당했다. 국제영화사가 '러브스토리'를 수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어느 사랑의 이야기'를 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고 간판이 내려갔다. '나는 망했구나'라고 혼자서 탄식했다. 이 사건은 충무로의 화제가 됐다.
그 무렵 국무총리인 JP가 국립영화제작소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 가끔 영화를 보는 JP는 윤주영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요즘 볼 영화가 없다"고 말했다. 윤 장관은 마침 신성일이 제작해 상영금지 당한 영화가 있다고 소개했다. '어느 사랑의 이야기'를 본 JP는 "한국 영화 제작자 손해 안 보게 해"라고 지시했다. 아마 JP가 나를 배려한 것 같다.
71년 9월 뜻밖에 재상영 허가가 나왔다. 내려갔던 간판이 국도극장에 다시 올라갔다. 그러나 한 번 입은 타격을 만회하지 못하고 상영 일주일만에 종영됐다. 그래도 국도극장에 걸린 덕분에 지방 업자들이 필름을 사주어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반면 '러브스토리'는 그 해 12월 국제극장에서 개봉해 대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