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을 기다리는 야구팬들은 양가적 감정을 느낀다. 2006년 첫 대회 4강의 환희, 2009년 제2회 대회 준우승의 영광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2013년과 2017년, 그리고 2023년 대회 조별리그 탈락은 한국 야구의 현실을 아프게 역설했다.
야구대표팀은 다시 출발한다. 승리로부터 얻은 자신감, 패배를 통해 얻은 교훈과 함께다.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 구장에서 평가전을 치른 2026 WBC 대표팀. 연합뉴스 KBO리그 선수, 메이저리그(MLB)에서 뛰는 한국 선수와 한국계 선수 30명이 2026 WBC 대표팀을 구성했다. 2월 말까지 미국 스프링캠프를 소화했던 대표팀 주장 이정후(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김혜성(LA 다저스) 셰이 위트컴(휴스턴 애스트로스) 저마이 존스(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고우석(디트로이트 산하 트리플A) 데인 더닝(시애틀 매리너스 산하 트리플A) 6명이 본진에 합류, 완전체를 이뤘다.
대표팀은 2일 한신 타이거스, 3일에는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평가전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일본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동한 대표팀은 도쿄돔에서 열리는 WBC C조 조별리그에 돌입한다. 체코(5일) 일본(7일) 대만(8일) 호주(9일)와 차례로 맞붙어 조 2위 안에 들면 8강에 진출한다. 준준결승부터 결승까지 열리는 미국 마이애미로 향하는 전용기에 탑승하는 게 대표팀의 목표다.
한국 야구는 미국·일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과 정면으로 맞서면 힘과 스피드에서 밀린다. 과거 한국이 그들과 비등하게 싸웠던 동력은 ‘융복합’이다. 나이와 경력이 다른 선수들이 어울리고, 포지션과 보직을 뛰어넘어 협력하고, 상대에 따라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게 대한민국 야구대표팀, 즉 K-볼(Ball)의 요체다. 융복합을 잘해낸 대표팀은 성공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쓴잔을 들었다. 류지현 감독이 ‘시너지’ ‘조합’ ‘팀워크’라는 단어를 자주 언급하는 이유도 이번 대표팀의 지향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융합하면 더 강해졌다
2006년 제1회 WBC 대표팀 구성을 보고 야구팬들이 열광했다. 박찬호를 비롯해 구대성·김선우·서재응·김병현·최희섭 등 현역 빅리거가 합류한 것이다. MLB에서 124승(2005년까지 106승)을 올린 박찬호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다. “보직은 상관없다. 팀이 원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그의 말은 김인식 대표팀 감독에게 더없는 ‘조커’였다.
3월 3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대만과 1라운드 1경기. 한국은 선발 서재응을 시작으로 김병현·구대성이 이어 던졌다. 투구 수 제한이 있는 WBC만의 규칙을 영리하게 활용한 계투였다. 박찬호는 마무리로 나와 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세이브를 올렸다.
2006년 3월 WBC 2라운드 멕시코전에서 세이브를 올린 뒤 세리머니하는 박찬호. 연합뉴스2026 WBC 대표팀 4번 타자로 활약한 이승엽. 연합뉴스 이어 중국을 대파한 한국은 3경기에서 일본을 만나 3-2로 역전승했다. 8회 초 이승엽이 역전 투런포를 터뜨렸다. 9회 말 일본의 간판타자 스즈키 이치로를 내야 플라이로 잡아낸 박찬호의 ‘어퍼컷 세리머니’는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표팀 감독 거스 히딩크의 액션을 떠올리게 했다. 한국 야구는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들은 아직도 배고팠다.
2라운드 1경기에서 빅리거들이 대거 포진한 멕시코를 2-1로 꺾은 한국은 2경기에서 미국을 7-3으로 완파했다. 선제 홈런을 날린 이승엽이 다음 타석에서 고의볼넷을 얻고, 손민한이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3구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3경기에서 일본을 다시 만난 한국은 박찬호의 선발 5이닝 무실점 호투, 8회 초 이종범의 결승 2루타에 힘입어 2-1로 이겼다. 만화 같은 명장면들이 모인 끝에 한국은 4강에 진출했다.
한국은 준결승에서 일본을 만나 0-6으로 졌다. 단 한 번 졌을 뿐인데, 한국에만 두 번이나 패한 일본이 WBC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우승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팀 코리아의 저력을 알리기에는 충분한 무대였다.
‘스마트 & 팀워크’ 야구의 황금기
어수선했던 2006년과 달리, 각 대표팀은 체계적으로 2회 대회를 준비했다. 재빠르게 대회 룰과 시스템에 적응했던 한국엔 그만큼 마이너스 요소였다. 게다가 기대심리가 높아진 2009년 대표팀 사령탑을 현직 감독들은 맡지 않으려 했다.
결국 김인식 감독이 ‘독이 든 성배’를 또 들었다. 그리고 “나라가 있어야 야구가 있다”고 일갈했다. 그의 말은 대표팀 코치, 선수들, 그리고 팬들에게도 큰 울림을 줬다. 전화위복. 2009년 대회에 나선 한국 선수들의 평균 나이는 27.5세(2006년은 29.3세)였다. 그들은 젊지만, 어리지 않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리스트 중 16명이 2009년 대표팀에 포함됐다.
3월 6일 도쿄돔에서 열린 1라운드 1경기에서 한국은 류현진·봉중근의 호투로 대만을 꺾었다. 그러나 이튿날 일본과의 2경기에서 2-14, 7회 콜드게임패를 당했다. 이 경기로 모든 계산이 어그러졌다. 또한 2006년 쌓아온 자신감이 무너지는 듯했다.
3월 9일 열린 일본과의 1라운드 1·2위 결정전. 선발 투수 봉중근이 5와3분의1이닝을 실점 없이 막았다. 그가 1루 주자 이치로를 견제하는 동작은 위협구보다 공격적이었다. 정현욱에 이어 류현진이 불펜으로 등장해 홀드를 기록했고, 임창용이 세이브에 성공하며 한국이 1-0으로 이겼다. 4회 초 김태균이 이와쿠마 히사시로부터 때려낸 결승타는 기술을 뛰어넘는, 예술에 가까운 타격이었다.
2009 WBC 1라운드 일본전에서 2회 마쓰자카로부터 홈런을 때려내는 김태균. IS 포토 꺾이지 않는 의지, 그리고 재빠른 전략 수정 덕분에 한일전은 며칠 새 완전히 달라졌다. A조 1위로 1라운드를 통과한 한국은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라운드 1경기에서 멕시코를 8-2로 꺾었다. 선발 류현진의 호투에 김태균·이범호·고영민의 홈런이 터졌다.
계속된 한일전에서 양 팀은 승패를 나눠 가졌다. 2라운드 2경기에서 한국이 4-1로 이겼고, 2라운드 1·2위 결정전에서 일본이 6-2로 승리했다. 한국은 3월 21일 미국 다저스타디움에서 4강전에서 베네수엘라를 10-2로 완파했다. 팔꿈치 통증 탓에 2라운드부터 합류한 추신수의 홈런이 터졌다. 김태균은 쐐기포를 날렸다.
3월 22일 열린 결승전 3-3으로 맞선 연장 10회 초 2사 2·3루. 임창용이 이치로에게 2타점 결승타를 허용했다. 세계의 거인들을 무너뜨리고도 끝내 일본을 넘지 못한 엔딩은 2006년과 같았다. 정상 문턱에서 주저앉은 김인식 감독은 밤새도록 이치로에게 맞은 통한의 안타를 떠올렸다고 한다.
2회 대회 한국대표팀의 성과는 1회 대회의 기적 못지않았다. 한국은 일본과의 라이벌전(2승 3패) 끝에 세계 야구의 중심에 섰다. 미국·일본에서 활약한 베테랑이 이끈 1회 대회와 달리 KBO리그에서 성장한 선수들이 주역이었다는 점도 의미가 컸다.
2009년 WBC 홈런(3개) 타점(11개) 득점(9개) 1위에 오른 김태균은 “빠르고 영리한 선수들이 테이블 세터를 맡았고, 중심 타자들이 뒤를 받쳤다. 하위 타선에는 수비가 뛰어난 선수들이 포진했다”며 “당시 대표팀 라인업이 가장 이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고 회고했다. 한국 야구의 황금기였다.
WBC 지휘봉을 잡고 2006년 4강, 2009년 준우승을 이끈 김인식 감독. 연합뉴스
‘중진국의 함정’…역동성 회복이 과제
2006년과 2009년 WBC에서 야구대표팀은 한국의 산업 발전과 흡사한 모습을 보였다. 강하고 효율적인 리더십이 중심을 잡았다. 또한 선진 야구를 경험한 소수의 엘리트가 팀을 주도했다. 개인보다 조직을 우선했고, 집중과 협업을 통해 초단기 성과를 만들었다. ‘국가 주도형 압축 성장’ 모델이었다.
팀 코리아의 역동성은 2013년, 2017년 대회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대표팀 멤버는 1~2회 대회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창과 방패가 무뎌지는 사이, WBC를 통한 세계 야구의 전력은 평준화하기 시작했다.
2013년 한국은 대만 타이중에서 열린 1라운드 첫 경기 네덜란드전에서 0-5로 완패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2017년에는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1라운드를 치렀으나, 1승 2패로 또다시 패퇴했다. 한국 야구는 선진국을 추격하다가 후발국에 따라잡히는 ‘중진국의 함정’에 빠진 듯했다.
2023년 제5회 WBC는 한국 야구의 정체성을 회복할 기회였다. 김하성·토미 에드먼 등 MLB 선수들이 합류했고, 이정후·김혜성 등 미래의 빅리거들도 성장했다. 그러나 이강철 감독이 이끈 대표팀에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전지훈련지였던 미국 애리조나에선 악천후와 항공편 결항 등으로 컨디션 조절에 애를 먹었다. 개인 훈련도 부족했다.
3월 9일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1라운드 1경기. 한국은 호주와 난타전 끝에 7-8로 졌다. 투수들 컨디션이 특히 저조했다. 7회 말 강백호가 2루타를 때린 뒤 세리머니하다가 태그 아웃당하는 등 분위기도 어수선했다. 반드시 잡아야 할 첫 경기를 놓친 한국은 이튿날 일본전에서 4-13으로 대패했다. 3회 연속 WBC 1라운드 탈락은 한국 야구에 큰 숙제를 남겼다.
다시 3년이 흘렀다. 그사이 KBO리그는 ‘천만 관중 시대’를 열였다. 재능 있는 젊은 선수들이 부쩍 성장했다. 대표팀 구성은 2009년 이후 가장 나을 거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부상 변수가 대표팀을 흔들었다. 마운드에서 원태인(삼성 라이온즈) 문동주(한화 이글스), 야수 중에는 김하성(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송성문(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 이탈했다. 류지현 감독은 “아쉬움은 빨리 털어내겠다. 지금 멤버가 최고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출혈이 상당했으나, 대표팀 마운드는 그리 나쁘지 않다. 20년 전 박찬호가 그랬듯 베테랑 류현진(한화)이 리더로 나섰다. 여기에 곽빈(두산 베어스) 소형준(KT 위즈) 등이 선발을 맡을 전망이다. 노시환(한화) 안현민(KT) 김도영(KIA 타이거즈) 등 20대 야수들은 국제대회에서 경쟁력을 이미 입증했다.
관건은 이들이 단단한 팀워크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류지현 감독이 최적의 조합을 만드는 것이다. 그게 한국 야구의 정체성을 찾고 역동성을 되살리는 길이 될 것이다.
2일 일본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열린 WBC 한신과 평가전에서 2이닝 무실점으로 역투한 류현진. 연합뉴스3일 일본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열린 WBC 평가전 오릭스전에서 2회 3점 홈런을 터뜨린 뒤 세리머니 하는 김도영.연합뉴스3일 일본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열린 WBC 평가전 오릭스전에서 9회 솔로포를 날린 뒤 세리머니하는 안현민. 연합뉴스 3일 일본 오사카 교세라돔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오릭스와 평가전에서 승리한 뒤 류지현 감독이 관중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