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감독이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진행된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서병수 기자 qudtn@edaily.co.kr /2026.05.11/
“인간이 만든 것과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거예요.”
이재규 감독은 AI(인공지능)가 가져올 미디어 지각 변동과 콘텐츠의 미래에 대해 이 같은 전망을 내놓았다. 이 감독은 최근 서울 용산구 아캐인 사옥에서 진행된 일간스포츠와 인터뷰에서 “소쉬르, 장 보드리야르 등 과거 철학자들이 시뮬라크르(실제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대체물)를 이야기했는데, 이제 진짜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상이 열릴 것”이라며 “기존의 유튜브 생태계가 사그라들고, AI 콘텐츠를 직접 이용하고 업로드하는 새로운 시장이 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K를 플레이하라!’라는 주제로 일간스포츠와 이코노미스트가 공동 주최하는 제4회 K포럼(Korea Forum 2026)에 참석한다. 오는 7월 9일 서울 영등포구 콘래드서울 그랜드볼룸에서 열리는 K포럼은 K콘텐츠 및 브랜드 현장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다. 이 감독은 스테이지1 ‘황찬성을 플레이하라: AI 시대 K스타 IP의 새로운 문법’의 패널 겸 ‘AI AD 크리에이션 챌린지.’ 심사위원장으로 초청받아 장진승 오스카10 대표, 가수 겸 배우 황찬성과 함께 AI 비즈니스 진화의 효용성과 향후 가능성을 짚어본다.
이 감독은 드라마 ‘다모’, ‘베토벤 바이러스’, ‘더 킹 투 하츠’, 영화 ‘역린’, ‘완벽한 타인’,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등을 만든 히트 메이커로, 현재 ‘지금 우리 학교는’ 시즌2 작업에 한창이다. 현업 창작자로서 다양한 플랫폼을 오가며 활동 중인 만큼, 그가 체감하는 AI 기술의 발전 속도 역시 남다르다.
“챗GPT가 처음 등장할 무렵, 구글 바드의 베타 테스트 소식에 변화를 직감했죠. 이후 등장한 2D 이미지 툴은 놀라운 수준이었어요. 보통 콘셉트 아트를 5장에 1000만~1500만원, 영화나 광고는 2000만원씩 써요. 근데 이제 프롬프트만 잘 입력하면 수 분 안에 작업이 끝나고, 하룻밤에 수십 장의 수정본이 나오죠. 막대한 자산적 인풋에 비해 아웃풋이 불확실했던 기존 시장의 비효율성을 해소할 수 있게 된 거예요.”
이재규 감독이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진행된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서병수 기자 qudtn@edaily.co.kr /2026.05.11/
이 감독은 “생각을 넓히다 보니 ‘이제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장편 영화를 한 편 만들 수 있는 시대가 오겠구나’ 싶었다”고 부연했다. 특히 기존 원작이나 웹툰 중에는 사람이 직접 연기하는 것보다 디지털 휴먼이나 AI 기술을 썼을 때 효과적인 작품이 있다는 게 이 감독의 생각이다.
“예컨대 제작비는 막대하게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다소 ‘병맛’인 스토리는 기존 배우의 연기와 연출 체계로는 사실상 제작이 불가능해요. 글을 쓰고 촬영하고 편집하는 건 전문 영역이지만,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은 부지기수죠. 이제 그들이 AI의 도움을 받아 자기 아이디어를 시나리오화하고 영상화할 수 있게 된 거예요. 거대한 지각 변동이 시작된 거죠.”
물론 이 감독은 AI가 당장에 콘텐츠 시장이나 창작자, 배우들의 영역을 완전히 잠식할 것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불쾌한 골짜기’(언캐니 밸리, 인간과 닮은 외형·행동이 ‘거의 비슷하지만 완벽하지 않은’ 구간에서 불쾌감이 증가하는 심리 현상)와 같은 기술적 한계보다도, AI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인간만의 본질, 인간의 결핍과 체온이 시장을 지탱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기술이 발전하면 언캐니 밸리는 결국 좁혀질 거고, AI 영상물은 갈수록 완벽해지겠죠. 반면 인간이 만드는 것에는 결핍과 흠결이 있을 거예요. 근데 대중은 기술적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정서적 울림을 주는 것을 원해요. 그리고 우리는 대체로 인간의 결핍이나 모순에 공감하고 감동받죠. 대배우들의 연기에도 결핍과 모순이 내재되어 있고, 바로 그것이 작품의 체온이 됩니다. 이 결정적인 차이 때문에 인간 배우의 영역은 계속 유지될 거고요.”
다만 이 감독은 언젠가 이 역시도 AI가 극복해 내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AI 스스로가 인간의 모순을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해칭(보완) 단계에 진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감독은 AI가 대중의 소비 패턴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불완전한 결과물을 내놓으며 인간을 흉내 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봤다.
“가장 무서운 지점이죠. 길어도 10~15년 안에는 AI가 인간의 결핍, 모순, 심지어 체온까지 모사해낼 거로 봐요. 관객이 배우의 어떤 모습, 보이스 톤, 근육 떨림에서 감정을 느끼는지 정밀하게 분석해서 구현하는 거죠. 기술적 불편함이 완전히 사라지는 정서적 극단에 도달해, 인간의 작품과 AI의 작품을 구분할 수 없는 시대가 올 거예요.”
이재규 감독이 11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일간스포츠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병수 기자 qudtn@edaily.co.kr /2026.05.11/
이 감독이 말하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배우들의 반발이나 도덕적, 법적 권리 침해 문제는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다. 이 감독 역시 “실제 현장에서 배우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크게 느낀다. 당장 생계와 직업적 존립에 영향을 미칠까 봐 염려하는 것”이라며 업계 자구책을 언급했다.
“현재 연예 매니지먼트 협회 등과 연계해 배우의 초상권과 정체성을 보호하기 위한 ‘디지털 DNA’ 형태의 권리화 작업들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것을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분도 있고, 순차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분도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흐름 자체는 거스를 수 없죠. 시뮬라시옹(사뮬라크르가 현실을 대체해 파생실재로 전환되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 길로 가고 있어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이 감독은 최근 ‘AI 숏폼’ 제작에도 발을 들였다. 그는 지금의 숏폼 시장은 다소 자극적인 스낵 콘텐츠 위주지만, 조만간 호러, 스릴러 등 깊이 있는 장르물로 다변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1분짜리 50부작 같은 포맷이 강해질 거예요. 후반 작업을 해봐도 달라진 게 느껴져요. 편집 호흡을 최대한 빠르게 해달라는 요구가 많죠. 배우가 대사를 내뱉기 전 미묘한 공기, 공백에서 오는 정서적 공감이 있는데, 요즘 시청자는 그걸 기다려주지 않아요. 시청자가 바뀌면 창작자도 달라져야 하는 게 맞고요. 물론 대전제는 ‘만드는 내가 재미있어야 한다’는 거죠. 이 본질을 놓치면 더 이상 좋은 작품을 할 수 없어요.”
그러면서 이 감독은 AI 시대에 끝까지 살아남는 창작자의 자격으로 ‘전문 식견’과 ‘버벌(언어) 능력’의 결합을 꼽았다. 아무리 미적 감각이나 인문학적 지식이 뛰어나도 프롬프트를 통해 AI에게 제대로 명령어를 구사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반대로 언어 능력이 좋은 사람이 전문적인 성능까지 갖춘다면 1인 크리에이터라도 거대한 가치의 결과물을 낼 수 있다.
“전문적인 지식이 기본적으로 있는 상태에서 버벌 능력이 뛰어날 때 AI를 잘 활용하고 결과물도 좋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고요. 결국 AI 시대에는 소수의 뛰어난 창작자도 경쟁력을 갖게 되겠죠. 과거에는 강력한 자본을 가진 제작자와 감독, 수많은 공동 창작자가 매달려야 대작이 나왔다면, 이제는 뛰어난 소수의 크리에이터가 홀로 만든 작품들도 많아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