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간 안방극장에서 우리 곁을 지켜온 ‘국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정의로운 형사로, 푸근한 아버지로, 때로는 이웃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다정한 어른으로 사랑받았던 배우 최불암이다. 특유의 ‘파하~’ 웃음으로 친근함을 더했던 그는 67년의 긴 연기 인생을 마치고 이제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
최불암(본명 최영한)은 지난 29일 오후 10시께 서울 강서구의 한 병원에서 입원 치료 중 별세했다. 향년 87세. 지난해 3월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은 뒤 거동이 불편해져 재활 치료를 이어왔으나 건강이 악화한 것으로 전해졌다.
1939년 인천에서 태어난 최불암은 처음부터 배우를 꿈꿨던 것은 아니다. 연출가를 꿈꾸던 그는 1959년 극단 실험극회에서 연극 ‘햄릿’으로 데뷔했고, 1965년 국립극단에 입단하며 연기자의 길을 걸었다. 1967년 서울중앙방송(현 KBS) 드라마 ‘수양대군’에서 김종서 역을 맡아 TV에 진출했다. 당시 20대였지만 노년의 김종서를 연기할 정도로 일찍부터 폭넓은 배역을 소화했다.
그의 이름을 전 국민에게 알린 작품은 1971년 첫 방송된 MBC 드라마 ‘수사반장’이었다. 최불암은 1989년 종영할 때까지 박영한 반장으로 활약하며 한국 수사극의 대표적인 얼굴이 됐다. 정의감과 인간미를 갖춘 박 반장은 오랫동안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최불암은 이 작품으로 경찰청 명예 경찰관에 위촉되기도 했다.
‘수사반장’에 대한 고인의 애정도 각별했다. 그는 생전 자신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며 ‘수사반장’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았다. 2024년에는 MBC 드라마 ‘수사반장 1958’에 노년의 박영한으로 특별 출연해 반가움을 안겼다. 세월이 흘러도 최불암은 시청자들에게 여전히 ‘영원한 수사반장’으로 기억됐다.
1980년 시작해 2002년까지 방송된 MBC 드라마 ‘전원일기’는 그에게 또 하나의 이름을 안겼다. 바로 ‘국민 아버지’다. 최불암은 양촌리 김 회장으로 22년간 시청자들과 만났다. 집안에서는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이었고, 마을에서는 이웃들의 크고 작은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어른이었다. 김혜자와는 오랜 세월 부부로 호흡을 맞추며 한국인의 기억에 남을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 시절 ‘전원일기’를 보며 자란 시청자들에게 김 회장은 오래된 고향집에 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은 어른이었다. 최불암의 넉넉한 웃음과 푸근한 모습에는 당시 한국 사회의 가족과 이웃이 나누던 정이 담겨 있었다.
드라마 속 따뜻한 아버지의 모습은 실제 삶에서도 이어졌다. 최불암은 1981년 ‘전원일기’에서 고아 금동이를 입양하는 이야기를 연기한 뒤 아동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전신인 한국복지재단 전국후원회장을 맡아 40여 년간 어린이들을 위한 활동에 힘썼다.
최불암은 ‘수사반장’과 ‘전원일기’ 외에도 MBC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에서 캡틴 박 역을 맡아 사랑받았다. ‘제1공화국’에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연기했으며,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 ‘바람불어 좋은 날’,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에도 출연했다. 2018년에는 연극 ‘바람 불어 별이 흔들릴 때’로 25년 만에 연극 무대에 돌아왔다.
고개를 뒤로 젖히며 터뜨리는 특유의 ‘파하~’ 웃음도 최불암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 중 하나다. 1990년대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최불암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었고, 방송인들이 그의 말투와 웃음소리를 따라 하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만큼 최불암은 세대를 아울러 친숙한 배우로 사랑받았다.
나이가 들어서도 시청자들과의 만남은 계속됐다. 2011년부터 14년간 KBS1 시사교양 프로그램 ‘한국인의 밥상’을 진행하며 전국 곳곳의 마을과 시장을 찾았다. 소박한 음식에 담긴 사연을 듣고 사람들과 밥을 나누던 그의 모습은 드라마 속 김 회장을 떠올리게 했다. 지난해 건강 문제로 프로그램에서 하차할 때까지 최불암은 변함없이 시청자들의 밥상 곁을 지켰다.
지난 5월에는 고인의 60여 년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MBC 다큐멘터리 ‘파하, 최불암입니다’가 방송됐다. 다만 고인은 재활 치료에 전념하고 싶다는 가족의 요청에 따라 촬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시청자 곁을 지켜온 그였기에 카메라 앞에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소식은 아쉬움을 남겼다.
최불암에게는 유독 ‘국민’이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다. ‘국민 배우’, ‘국민 아버지’, 그리고 ‘영원한 수사반장’까지. 그가 연기한 인물들에는 한국 사회가 지나온 세월과 그 시절을 살아간 사람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제 ‘수사반장’의 박 반장도, ‘전원일기’의 김 회장도 새로운 모습으로 만날 수 없게 됐다. 오랜 세월 시청자들의 웃음과 눈물을 함께했던 최불암이기에 그의 빈자리는 더욱 크게 느껴진다. 그가 남긴 따뜻한 기억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