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 월화드라마 ‘연애박사’ (사진=KT 스튜디오 지니)
드라마의 사전적 의미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나 대화를 기본 수단으로 하여 표현하는 예술 작품’이다. 고(故) 안판석 감독의 드라마는 그 본질에 충실한다. 거창한 그래픽으로 꾸며낸 볼거리가 아닌 실제 누군가의 삶을 툭 정갈하게 잘라낸 듯, 주로 대사와 표정으로 진득하게 시청자에게 대접한다. 그 맛은 자극적이기보단 오래 곱씹어 볼 여운을 남긴다. 유작 ‘연애박사’ 또한 그랬다.
오는 10일 종영하는 ENA 월화드라마 ‘연애박사’는 병으로 한쪽 다리를 잃은 박사과정생 박민재(추영우)와 진로를 잃고 방황하다 새로운 길에 들어선 석사과정생 임유진(김소현)이 로봇 연구실에서 만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청춘 로맨스물이다.
1회 1.8%(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로 출발해 2%대 초반대에서 소폭 등하락을 반복하던 드라마는 전개가 고조된 8회를 기점으로 시청률이 튀어 올라 자체 최고 2.8%까지 끌어올렸다. 디즈니플러스에선 월드와이드 TV쇼 3위(플릭스패트롤 4일 집계 기준)에 올라 글로벌 시청자의 주목도 받고 있다.
수치가 크지 않아 의아하다는 반응도 따른다. 시청자 사이에서는 “올해의 멜로 드라마”라는 극찬도 나오는 분위기다. ‘밀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 ‘졸업’ 등 사람의 감정과 관계를 섬세히 다룬 멜로 수작을 빚어온 안판석 감독다운 신작이자 마지막 작품이라는 평가다.
ENA 월화드라마 ‘연애박사’ 추영우 (사진=KT 스튜디오 지니) ‘연애박사’는 대학원을 배경으로 로봇공학이라는 소재를 설정했다. 근미래적인 ‘가능성’을 공부하려 모인 주인공 청년들은 20대 후반, 30대 초반임에도 캠퍼스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아직 미숙한 정서를 품고 있다.
지극히 동시대적인 초상 사이에 장애를 아무런 부각 없이 자연스럽게 등장시킨다. 골육종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한 박민재지만, 그에게 반한 임유진은 4회가 되도록 알아차리지 못한다. 오히려 가족, 동료 등 주변인의 편견이 비수 같은 대사로 두 사람의 관계 진전에 제동을 건다.
김성수 대중문화 평론가는 “안판석 감독의 멜로 드라마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을 가로막는 환경을 설정해 그 시대의 풍경과 가치관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연애박사’에선 장애에 대한 견고한 편견과 가족이란 이름의 이데올로기였다”며 “서로 오해하지만 약하고 모자란 모습을 보여줄 때 가까워지는 인물들을 통해 이 작품은 시대의 변화를 떠나 관계의 근원적인 장벽은 정말 비본질적인 것들임을 생각하게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사랑에 빠져야 할 남녀주인공이지만 드라마는 매회 이들의 언쟁을 그렸다. 박민재는 자신의 장애와 병이 임유진에게 상처를 줄까 전전긍긍하고, 임유진은 그런 독선에 상처받았다고 받아친다. 서로 자신의 관점밖에 모르는 미숙함을 그저 바라보는 듯한 카메라에, 화면 너머 시청자는 거울을 보는 듯 현실을 돌아보게 됐다.
ENA 월화드라마 ‘연애박사’ (사진=KT 스튜디오 지니) 특히 박민재가 대변한 자신이 지닌 핸디캡으로 위축되는 동시대 남성상과 임유진이 보여준 벽을 깨부수는 동시대 여성상은 시청자의 세대에 따라 저마다 이입하거나 비판하는 등 다양한 감상을 불렀다. 가정환경의 차이가 신분 차이처럼 치환되는 기성 드라마 문법이 작동하나 싶다가도 결혼 상대 집안을 따지는 작금의 현실 풍경과 다르지 않음을 떠올리게 했다.
이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살아있다. 대세 배우로 부상한 추영우와 아역 배우로 오래 활동해 온 김소현은 호불호를 부를 정도로 본 적 없던 날 것의 연기를 꺼냈다. ‘말하는 모자’ 교수 이지훈 역 장인섭과 얄미운 공대 동기 김세진 역 임진효 등 내공이 느껴지는 조연들의 연기도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끌어올렸다.
ENA 월화드라마 ‘연애박사’ 김소현 (사진=KT 스튜디오 지니 제공) ‘다큐멘터리 같다’는 반응이 보일 정도로 현실적이지만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1973년도 발매된 올드팝, 도노반의 ‘아이 라이크 유’(I Like You)를 2020년대 남자 주인공의 정서로 연결하듯 안 감독이 생전 인간다움과 사랑을 탐구해 시청자에게 내보이던 예술이다.
김헌식 대중문화 평론가는 “세대 간의 감수성이 다르다고 하지만 ‘연애박사’는 새로운 세대가 품은 보편적인 감성들을 끌어내는 역할을 잘 해냈다”며 “최근 비현실적인 장르물이 많아지면서 사랑과 사람을 불신하게 만들고, 신뢰 자본이 붕괴되는 설정의 드라마가 많았다. 이 가운데 안판석 감독은 꾸준히 인간의 사랑과 따뜻함, 희망적인 메시지를 마지막까지 지속해 왔다. 이런 따뜻한 작품들이 지금의 K콘텐츠의 흐름에는 필요함을 성찰하게 하는 드라마”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