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뒤흔든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졌다.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특히 한국 미래를 이끌어가야 할 '청춘'들의 상실감이 크다. 최순실과 그의 딸 정유라가 받았던 수많은 특혜와 불법이 낱낱이 드러나자 청춘들이 가졌던 순수한 열정의 불꽃이 꺼지고 있다.
돈 많은 부모가 없으면 성공하지 못하는 사회, 권력에 줄을 서야하고, '빽'이 뒷받침해줘야 높이 올라 갈 수 있는 나라라고 '최순실 사태'는 청춘들에게 역설하고 있다.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갈 길을 잃은 청춘들에게 '어차피 열심히 해봐야 안 된다'라는 현실을 교육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절망의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암흑의 시대에도 언제나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내는 이들은 있다. 그 빛을 보고 청춘들은 다시 꿈을 꿔볼만 하다. 사회를 밝게 바꿀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한국 축구에도 이런 이가 존재한다. 돈과 빽 없이 오직 노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 이름, 황선홍(48)이다. 젊은 세대는 그를 잘 모를 수 있다. 지적인 이미지의 성공한 감독으로 생각할 수 있다.
황선홍 FC 서울 감독은 '두 얼굴'을 가졌다. 그는 한국 축구 최고의 공격수였다. 또 가장 많은 시련을 겪은 불운의 선수이기도 했다. 지난달 30일 경기도 구리의 한 카페에서 만난 황 감독에게 성장 과정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위기를 극복해낼 수 있었던 방법도 허심탄회하게 털어놨다.
자신이 잘 나갔고 성공했던 시절은 얘기하지 않았다. 실패했고 좌절하며 눈물을 흘렸던 상황들만 기억해냈다. 황선홍 축구 인생은 분명 영광보다 눈물이 더 많았다.
이런 과정을 겪었기에 그의 말 하나하나가 지금 절망한 청춘들에게 긍정적인 힘을 전할 수 있다. '정정당당한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도 포함됐다.
그는 이렇게 말을 시작했다.
"축구 인생에 부침이 많았다. 나는 한국 축구 선수 중 가장 많은 욕을 들었던 선수였다. 부상으로 수술도 6번이나 했다. 성공적인 선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왔다. 정말 간절하게 축구를 했다.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는 없었다."
'황새'라는 별명에는 아픔이 묻어있다.
황선홍의 성인 황씨에서 따온 별명인 것은 맞다. 지금은 황새처럼 우아한 모습이 먼저 연상이 되지만 황새라는 말은 가난에서 시작됐다. 불우한 환경에서 제대로 영양보충을 하지 못한 황선홍은 청소년 시절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왜소했다. 다리가 길고 너무나 말랐다고 해서 용문고 선배들이 황선홍을 부르던 말이 바로 '황새'였다.
"내가 밥을 먹지 못해 물배를 채워 뒤뚱거렸다고 황새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그건 와전된 말이다. 청소년때 정말 말랐는데 다리가 길었다. 힘이 없어 부딪치면 넘어지고 쓰러졌다. 지탱하고 버틸 힘이 없었다. 이 모습을 보고 선배들이 황새라고 불렀다."
가난은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의 이혼으로 심해졌다. 아버지 홀로 3남매를 키웠다. 의지할 거라곤 축구공뿐이었다.
"풍족하게 살지 못했다. 홀아버지 밑에서 3남매가 힘겹게 산 것 같다. 아버지가 운수업을 하셨다. 정 붙일 곳은 축구밖에 없었다. 나를 지탱해주는 힘이 축구였다. 삶의 희망이었기에 더 열심히 했다. 축구를 절실하게 했다."
축구를 좋아했지만 뛰어나지는 못했다. 중고교 시절 주목받지 못했다. 한국 최고의 공격수라 평가 받는 그가 청소년대표팀에 단 한 번도 발탁되지 못했던 점이 놀라울 정도다.
"경기도에 초등학교(양정초) 다닐 때만 하더라도 스스로 잘 한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5학년 때 서울로 전학(숭곡초)을 왔는데 서울에 잘 하는 선수들이 너무나 많았다. 서울이 이렇게 무서운 곳인지 몰랐다. 나는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미완의 시기였다. 그래서 청소년 대표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용문중·고를 거친 황선홍은 건국대로 진학했다. 축구 명문 고려대와 연세대를 가고 싶었지만 두 학교 모두 무명의 선수에 관심이 없었다.
"체격과 체력이 약한 나를 탐내는 대학교는 없었다. 좋은 기회로 건국대에 갈 수 있었다. 현실적으로 경기에 꾸준히 뛸 수 있는 팀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건국대 유니폼을 입자 무명의 황선홍이 비상하기 시작했다. 1988년 춘계대학연맹전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며 대학생 신분으로 국가대표팀까지 발탁됐다. 건국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주목을 받았다. 고정운 선배를 만난 것이 컸다. 내가 1학년 때 고 선배는 3학년이었다. 고 선배가 어시스트를 많이 해줘 나 역시 많은 골을 넣을 수 있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한 방을 썼는데 밤마다 나를 지하실로 끌고 가 운동을 시켰다. 줄넘기를 정말 죽도록 한 것 같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니 정말 많이 도움이 됐다. 체력적으로도."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까지 출전하며 스타가 된 황선홍.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1991년 K리그 드래프트 거부 사건이다. 황선홍은 K리그 클럽들의 공공의 적이 됐다.
"시대에 역행하는 느낌이었다. 드래프트 제도가 합리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가고 싶은 팀에 가지 못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그래서 드래프트를 거부했다."
K리그를 뒤로한 채 독일로 향했다. 1991년 레버쿠젠 아마추어에 입단해 좋은 활약을 펼쳤다. 17골을 터뜨리며 주목을 받아 1992년 분데스리가 2부인 부퍼탈 SV로 옮겼다. 하지만 상승세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해 8월 경기도중 십자인대 파열을 당했다.
"야심차게 독일로 갔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때 유럽 진출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다. 주먹구구식이었다. 통역도 없었다. 내가 직접 운전하고 밥을 해 먹어야 했다. 적응하는데 힘들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잘 했다. 하지만 2년차 때 십자인대가 끊어져 수술을 해야 했다. 운이 좋지 않았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지금 손흥민처럼 되지 않았을까.(웃음) 유럽에 진출해서 한국 선수의 위상을 높이지 못했다. 내가 선수로서 성공적인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다."
1993년 한국으로 돌아와 포항 스틸러스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1994년 황선홍 인생 최악의 경기가 펼쳐진다. 1994년 6월 23일 열린 미국월드컵 C조 2차전 볼리비아전. 황선홍의 인생을 흔든 경기였다. 수많은 기회를 놓친 그는 '역적'이 됐다.
"그때 경기를 가끔 TV로 본다. 왜 저렇게 터무니없는 슈팅을 했을까 생각을 한다. 당시에는 위로 때리면 골 성공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슈팅이 많이 떴다. 너무 경직돼 있었다. 축구 자체를 즐거운 마음으로 하지 못했다. 부담감이 더 컸다.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은 것 같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이때부터 (오히려) 잡초 근성이 생긴 것 같다."
월드컵 실패를 만회하고자 4년을 기다린 황선홍. 하지만 그에게 1998 프랑스월드컵은 허락되지 않았다. 월드컵 직전 열린 중국과의 평가전에서 무릎 부상을 당했다. 당시 차범근(63) 대표팀 감독은 "대표팀 전력의 50%를 잃었다"고 한탄했다.
"내 인생은 절망적이었다. 축구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다. 미국월드컵에서 저지른 죄가 있었다. 프랑스에서 반전시키고 싶었다. 독기를 품고 4년을 기다렸다. 경기를 뛰고 욕을 먹는 건 괜찮다. 경기도 나서지 못하니 더 힘들었다. 중국전은 냉정하지 못했다. 의욕이 앞서 무리한 플레이를 했다. 중국 골키퍼 앞에서 내가 멈추거나 피했어야 했다. 94년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의지가 컸다. 이 시절이 내 축구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다."
프랑스의 좌절을 딛고 1999년 일본 J리그 세레소 오사카에서 한국인 최초로 득점왕을 차지하는 등 황선홍은 다시 도약했다. 하지만 2000년 수원 삼성 유니폼을 입고 더 높은 곳으로 가려 했지만 부상으로 가시와 레이솔로 임대돼야 했다. 그때 나이 32세였다.
"1994년, 1998년 한국 팬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질타를 많이 받았고 이런 인식을 바꾸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나의 이미지를 바꾸고 싶었다. J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했지만 K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 이런 이미지를 완벽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K리그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었다. 수원으로 갔지만 부상으로 가시와로 임대됐다. 내가 생각했던 장면과 차이가 컸다."
2002년 한일월드컵 4강이라는 기적을 일군 뒤 황선홍은 다시 한 번 K리그에서의 유종의 미를 노렸다.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지만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현역에서 은퇴했다.
"K리그에서의 유종의 미는 결국 실패했다. 전남에서 한 경기도 못 뛰었다. 은퇴하니 선수로서 리그 우승을 한 번도 하지 못했더라. 이 부분도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95년 포항 멤버가 정말 좋았다. 라데, 홍명보 등 우승할 절호의 찬스였는데 일화에 져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이토록 많은 시련이 왔는데 황선홍은 최고의 선수로 기억된다. 극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특별한 방법은 없다. 누구에게나 시련은 찾아온다.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를 컨트롤 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잠깐 방심하고 나태해지면 나도 모르게 이상한 길로 가게 된다. 함정으로 가고 있다. 다른 것을 보지 못하면서 고집의 길로 들어서는 나를 꺼내야 한다. 내 생각에만 갇혀 있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자신과 타협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산책을 하면서 걷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다. 끊임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채찍질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부상을 당한 선수도 없다.
"오른쪽 무릎 수술 3번, 십자인대 수술 2번, 어깨 수술 1번 받았다. 그런데도 35세까지 공격수를 했다. 부상을 당한 뒤 다시 정상 밸런스를 찾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조급해 할 필요도 위축될 필요도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요즘 의술도 많이 좋아졌다. 평소에 웨이트 등 관리와 준비를 잘 하면 좋겠다. 시련을 막을 수는 없지만 줄일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