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 ➁ 미완성의 정의 (1)
박지효 기자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2. 미완성의 정의
더위가 가실 기미가 안 보인다. 땀이 많은 체질인지라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땀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시’는 덥지도 춥지도 않다고 들었다. 과연 그럴까. 자신들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한 한낱 소문일 뿐이겠지. 헤진 셔츠의 소매로 땀을 닦으며 정신없이 거리를 걷던 도중 발에 무언가 걸렸다. 내려다보니 바닥에 떨어진 매미 사체였다. 미처 지르지 못한 비명을 삼키고 앞으로 뛰어갔다. 달리는 내 양옆으로 빽빽이 들어선 청록빛 나무가 스쳐 지나갔다. 도시에서는 나무 한 그루조차 찾기 힘들다는데 센터 주변에는 왜 이리 많이 심었는지 모르겠다. 거기에는 매미도 없겠지…. 왼쪽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에서 요란한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서화의 전화였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통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내가 뱉은 네 음절 뒤로 이어진 건 잔소리였다. 더운 날씨에 어딜 간 거냐, 수업은 또 땡땡이쳤냐와 같은 시답잖은 잔소리 말이다. 서화의 목소리에 세차게 우는 매미 소리가 뒤섞여 잘 들리지 않았다. 이 점은 매미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웃음을 흘리자, 서화가 물었다.
“더위 먹었냐?”
“아니거든. 아이스크림 사 갈까.”
“불량한 주제에 간은 커. 나는 소다 맛.”
짧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눈에 들어온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훅 끼치는 에어컨 공기가 상쾌했다. 여러 개를 사고픈 욕심이 났지만, 무더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 모조리 녹을 것 같아서 딱 두 개만 샀다. 멜론 맛 아이스크림을 까서 한입 베어 물은 순간 끊긴 줄 알았던 통화에서 서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몸을 한껏 움츠리며 놀랐다.
“왜?”
“너무 일찍 철이 들어도 별로인 것 같아.”
“책이라도 읽었냐?”
장난을 걸었는데도 서화는 반응이 없었다. 내 머쓱한 웃음을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겼다. 괜히 민망해서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트레이닝 집업 주머니 속 소다 맛 아이스크림이 녹지 않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센터에 들어서니 경직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반갑기는, 매일 갇혀있는데. 기숙사로 올라가 복도를 걸었다. 그래도 오늘은 시끌벅적했다. 별다른 일이 없다는 뜻이겠지 싶었다. 주변의 눈치를 보면서 쭈뼛쭈뼛 서화의 방 앞에 섰다. 원칙적으로 기숙사에서는 본인 방에만 드나들어야 하지만, 학생 대부분이 지키지 않는다. 윗선에서도 조치하지 않아 이제는 당연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주변을 살피는 건 내가 남긴 마지막 예의랄까.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서화의 방 안에 들어섰다.
“야, 아이스크림.”
어째서인지 서화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3평 남짓인 공간에서 숨을 곳은 없었다. 아무래도 잠깐 외출한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소중한 아이스크림을 책상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상상 이상으로 깨끗하고 정돈된 방이었다. 웬일이래, 내가 아는 서화는 방 정리에 이렇게까지 힘쓴 적이 없었다. 더위를 먹은 건 이쪽인 것 같았다.
침구에서는 섬세한 향이 폴폴 풍겼다. 서화의 근처에 가면 항상 나를 반기던 비에 젖은 숲속의 향이었다. 이불을 만지작거리던 내 손가락 사이로 종잇장이 걸렸다. 책이었다. 일찍 철이 드는 게 별로라는 발언은 이 책에서 발췌한 문장일 거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책 표지에 크게 박힌 ‘이모션 사이클’ 여섯 글자와 부제 ‘현대 사회의 희망’. 당황한 채 책상 위 쌓인 책들을 바라보니 온통 이런 식이었다. 이모션 사이클의 장점을 나열했고, 제목부터 의도가 다분했다. 내가 벙찐 사이 문이 열렸다. 익숙한 얼굴이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벌써 와있었네.”
나와 서화는 동시에 당황했다. 원인은 내 손에 들린 책이었다. 정적을 먼저 깬 사람은 나였다.
“왜 빌린 거야?”
서화의 흐트러진 머리와 가쁜 호흡을 보아 어딘가에서 뛰어온 듯했다. 그토록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었을 리는 없고. 낯선 위화감이 느껴졌다. 그제야 서화의 손에 들린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모션 사이클 시술 동의서였다.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동의서를 한순간에 빼앗았다.
“설명해 줘.”
지금 건넬 수 있는 최선의 다정함이었다. 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정, 사정은 들어보고 판단해야 하잖아? 다음으로 서화가 꺼낸 말은 내게 가히 충격적이었다.
“몰라도 돼.”
“모르기 싫어. 설명해달라고.”
“방금 거절한 거야. 싫다고.”
그 세 음절이 머릿속을 꿰뚫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겨를이 없었다. 언제부터? 서화도 나랑같은 생각이 아니었나? 그냥 나에게 맞춰준 거였나? 머리가 멍해져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악력에 의해 구겨진 시술 동의서와 책 한 권을 힘없이 내려놓았다.
“장난해?”
“애도 아니고 장난질을 왜 해?”
“내가 거짓말 줄이랬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짝 마른 입이 더는 문장을 만들지 못했다. 무서웠다. 괜히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 화를 내버릴 것 같았다. 서화가 한숨을 내쉬더니 문을 닫고는 그 앞에 기대었다. 할 말이 많은 모습이었지만 애꿎은 머리카락만 쓸어 넘기고 있었다.
“한이류.”
“돈이라도 받았어? 너도 숫자에 움직이는 놈이었냐고.”
“세상이 네 상상처럼 돌아가지는 않아.”
“내가 망상이라도 했다는 거야?”
“아니, 여기는 네가 창조한 세계가 아니잖아.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이런 시시한 말은 먹히지 않는다고.”
서화의 단단히 굳어진 목소리를 듣자, 실감이 났다.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었다.
“알아듣게 말해!”
결국 내가 언성을 높였다. 쥔 주먹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서화가 눈을 피하며 말했다.
"나는 히어로가 아니거든.”
“누가 히어로 해달래? 당연하지, 이 세상에 그런 건 없잖아. 적어도 우리는 친구 아니었어? 허용되지 않는 걸 나눈 건 불법이니까, 같은 길을 걸어야 하는 것 아니야?”
“유치한 짓 그만하자.”
“뭐가 유치한데, 어느 부분이.”
눈물이 눈앞을 감싸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차마 주먹을 휘두르진 못했다. ‘유치한’ 우정 따위에 꽁꽁 묶이는 나라서. 책상 위 아이스크림을 집어 들었다. 떨리는 왼손으로 아이스크림을 꽉 쥐었다. 이미 녹은 지 오래였다. 터진 봉지 밖으로 푸른 빛 액체가 조금씩 삐져나와 손을 흠뻑 적셨다. 서화에게서 나는 향을 모조리 덮을 만큼 달콤하고도 머리 아픈 향이 풍겼다. 서둘러 방에서 나가려 하자 서화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그와 동시에 더욱 많은 양의 아이스크림이 손목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힘이 빠진 왼손에서 축축한 봉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서화의 손을 뿌리친 채 문을 열었다. 복도를 달리는 동안 손에서는 끈적한 액체가, 눈에서는 쓸데없는 눈물이 떨어졌다. 애정. 같은 길을 걸으며 쌓아 올린 애정 때문이었다. 단순한 증오, 불쾌감을 비롯한 부정은 모두 그 사사로운 감정 속에서 피어올랐다.
삐걱거리는 낡은 문을 힘껏 닫았다. 침대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책상에 앉았다. 이불 속에 파묻혀 깊이 생각하다가는 정말 되돌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서럽게 울지는 않았다. 나는 서화를 아꼈으니까. 표현은 서툴렀을지언정 그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서화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이 사회에서 잘못된 사람은 서화가 아닌 나이기에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가 간과한 점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나눈 게 신념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저 서로를 아낀다는 명분만으로 지속된 관계였다. 아니지, 일방적인 동정이었을지도.
*
“우리 왜 친해진 거야?”
서화가 햇볕에 그을린 듯이 새까만 자갈을 발로 차며 내게 물었다. 가끔 센터 단지를 걸으며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동질감?”
손에 쥔 에너지바 봉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졌다. 아깝게 빗나간 탓에 허리를 숙여서 다시 주워야 했다. 쓰레기통 주위에 놓인 까만 봉투에서 역한 냄새가 났다. 내 모습이 웃겼는지 서화가 자꾸만 히죽거렸다.
“너도 알잖아. 우리 보육원 그리 좋지 않았다는 거. 길가에 버려진 쓰레기봉투가 자기랑 똑같은 친구를 발견하면 둘이 친해지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쓰레기봉투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급히 변명하며 앞장서서 걸었다. 어느새 서화가 멀리 찼던 자갈이 내 발에 걸렸다. 예상치 못한 장애물에 몸이 휘청거렸다. 다행히 서화가 내 가방끈을 잡아준 덕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조심히 다니지 그래.”
그때의 나는 어렸다. 어른스럽고 싶은 아이, 초등생이 할 법한 생각이었다. 당시 서화는 지나치게 아이같이 구는 면이 있어 내가 자주 꾸짖었다. 지금 와서 후회해 보아야 소용없지만, 서화는 꽤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철이 들 대로 들어버린 아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던 나는 무작정 내가 더 성숙하다고 믿었다. 그래, 나는 유치하고, 엉망진창이었다. 되고 싶은 인간상이 옆에 존재했음에도 미처 알지 못했다.
어린 내 믿음과는 달리 이른 나이에 철이 드는 건 저주였다.
책상 구석에 밀어두었던 고글을 썼다. 얇은 홀로그램이 공중에 드러났다. 이모션 사이클. 여섯 글자를 검색창에 올리자 뒤따라 ‘부작용’, ‘의미’, ‘접종’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역시 구식 고글답게 기사를 내릴 때마다 화면이 깜빡거려 눈이 피로했다. 기사를 정독할 마음은 없었다. 새로 고침을 누르자 오른쪽 위에 관련 페이지가 추천되었다. 어떤 회사의 로고가 잠시 나타난 뒤, 부연 설명자막이 나타났다.
‘잡음을 은폐하리.’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홈페이지 목록에 익숙한 글자가 보였다. 회사명은 클록터, 이모션 사이클을 개발한 기업이었다. 순간 화면이 지직거리며 작동을 멈췄다. 정말 싸구려는 맞나보네. 짜증스럽게 고글을 벗어 침대 위로 던졌다. 이모션 사이클을 개발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여름 감기가 오려는 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서화 말대로 아이스크림 좀 적당히 먹을 걸 그랬다. 지끈거리는 두통에 후회하며 목을 뒤로 젖히니 선반 위에 올려 둔 향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번 수영장에서 깨트린 걸 다시 조향해야겠네. 전문적인 조향은 아니다. 감정을 보관하는 나의 방식일 뿐이다. 망할 사회가 감정을 품는 걸 방해하니까. 제대로 된 향료를 구하는 건 무리라 시중에 판매되는 향수를 사들여 소분하고 조합한다. 이마저도 센터 몰래 반입한 거라 들키면 압수될 염려가 있다. 재료가 뭐든 결과물이 괜찮으니, 그거로 충분하지 않나. 모르겠다. 하나도 모르겠다. 나는 모르는 게 많다. 당장 서화가 행하려는 이모션 사이클이 잘못된 정책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어느 쪽이 내 삶에 긍정인지 부정인지, 혹은 내가 선인지 악인지, 서화가 이기주의적인지 자기희생적인지 단 하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단 살아보아야 했다. 그게 몇 안 되는 내 사람들을 위한 최선이었다. 만나야 하고, 찾아가야 하니까. 괜히 언성을 높여 소리친 게 미안했다. 그 애라면 무언가 계획이 있겠지. 이모션 사이클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도 남을 똑똑한 아이니까. 창밖의 시들지 않은 뜨거운 열기가 방 안으로 들어와 나를 헤집었다. 이를 재촉과 방해, 어느 쪽으로 삼을지 판단하는 건 내 몫이었다.
잉크가 모자란 펜으로 꾸역꾸역 글씨를 써 내려갔다. 제일 만만한 ‘사랑’ 두 글자를 반복해서 적었다. 정의를 내리기 위해서 헤져버린 조그마한 사전을 펼쳤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별로다. 나의 조상들은 이런 걸 왈가왈부하던 시대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는 말인가. 그래도 아끼고 귀중히 여긴다는 게 조금은 궁금했다. 나는 서화를 정말로 아끼는 걸까? 불편한 진실이 주입한 무언가를 그대로 서화에게 건넬 뿐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사랑은 아니었다. 초조함과 경계, 동정심. 아무리 그래도 우리 둘은 친구인데. 다시 한번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소유욕이 생겨 버린 거다.
작은 수첩을 바지 주머니에 쑤셔 넣고 센터를 나왔다. 정문을 지나서 뒤를 돌아 반듯한 건물을 아니꼽게 쳐다보았다. 딱딱하기 그지없는 글씨체로 쓰인 후원사 이름을 보고는 깨달았다. 아까 검색했던 클록터인지 뭔지가 우리 센터의 후원사였다. 딱히 별생각은 안 들었다. 이런 썩어빠진 곳에 돈을 주는 회사가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었다.
세상 속 대부분은 갑과 을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항상 주도권을 누군가가 붙잡고, 그 누군가가 짜놓은 길을 계약이라는 명분으로 걸어가는 것. 이런 주종 관계에서 올바르다는 개념은 필요 없다. 내가 정상적일지라도 갑이 그것을 비정상이라고 칭한다면 소용없는, 그런 모순. 갑을 맡은 클록터는 ‘을’인 나를 비정상으로 분류한다.
순간 매캐한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와 생각이 흩어졌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들어오자, 미간이 찌푸려지는 냄새가 심해졌다. 잔기침하며 발길을 옮겼다.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은 담배꽁초를 보아 얼마 전까지 흡연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근처 골목은 센터에서 관리하지 않나 보다. 교육 기관이 왜 이리 어설픈 거야? 혼잣말을 읊조리며 근처 폐건물로 들어갔다. 한 걸음씩 계단을 오를 때마다 벅찬 숨소리가 콘크리트 벽 사이를 부딪치며 부유했다. 먼지가 한가득 쌓인 바닥을 신발 바닥으로 거칠게 쓸었다. 얼마 안 가 구석에 쓰러지듯 몸을 늘어트렸다.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비상구 유도등이 힘겨워 보였다. 보육원의 낡은 비상구 유도등과 닮아있었다. 가끔 잠에 들기 싫을 때면 서화와 철제문 앞에 쪼그려 앉아 초록빛 불빛을 맞고는 했었다. 아, 서화가 아닌가…. 그 딱딱한 문 앞이 우리의 아지트였다. 나의 어설프고 허술한 문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 아이라면 나의 바람을 이해하리라 믿었다. 오밀조밀한 문장을 함께 수집해 놓은 공책이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조향에 참고하면 훌륭한 자료가 될 텐데 말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건물의 공기는 그리 맑지 않아서 자료로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졸음이 쏟아졌다. 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회백색 벽에 달라붙었다.
몇 분 정도 졸았을까, 눈을 떠보니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여기서 더 시간을 벌이다가는 센터 관리인이 나를 찾으러 올 거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인지 괜히 기숙사로 돌아가기 싫었다. 옷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고 폐건물을 빠져나왔다. 발길은 점점 센터 부근을 벗어났다. 쉼 없이 거리를 활보하다가 고장 난 자판기가 나올 즈음에 방향을 꺾으면, 철조망이 엉켜 지저분한 골목이 나온다. 낡은 쪽문을 통해 철조망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눈앞 쪽문에 걸린 자물쇠는 늘 그렇듯 장식이다. 문을 열고 한 발 내딛자 내 시야를 연둣빛 식물이 가득 채웠다. 옛 그림에나 나올 듯한 풍경에 매혹되었다. 넓은 잔디밭 곳곳에 심어진 나무는 늘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걸어 보았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이내 주변이 뻥 뚫린 환경에 홀로 서 있는 창백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충동으로 인해 나는 그곳으로 향해야만 했다.
흰 건물의 입구에 도착했다. 더는 작동하지 않는 자동문이 열린 채 고정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개방해 놓은 눈치였다. 실례한다는 말은 뒤로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어차피 버려진 건물일 뿐인데 뭐 어때. 발목 부근이 까끌까끌한 느낌에 고개를 구부리자, 먼지로 뒤덮인 책 몇 권이 쌓여 있었다. 내가 들어온 곳은 폐쇄된 도서관이었다. 무채색 구조물 사이에 꽂혀있는 색색의 책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2층에는 책상과 의자가 마구잡이로 널브러져 있었다. 제일 편안해 보이는 의자를 일으켜 세운 뒤 바닥에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책의 줄거리를 읽어보았다.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나중에 서화랑 땡땡이치면 이리로 와야겠다.
뿌옇게 오염된 유리로 노을빛이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일 층에서 거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의 숨이 내뱉어지는 소리. 분명 들어올 때 인기척이라고는 느끼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책장과 책장 사이 빈틈에 몸을 숨겼다. 곧이어 사람의 발소리가 도서관에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그들의 목소리를 맞닥뜨렸다. 목소리의 거리가 점점 좁혀질수록 등을 더욱 벽에 밀착시켰다.
“아마 문학 도서는 2층 구석에 있을 겁니다.”
선명히 귀에 꽂힌 한마디가 내게 도망치라고 신호를 주었다. 하지만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없었다. 주로 ‘감정’을 다루던 문학 작품은 이모션 사이클이 도입됨에 따라 폐기 되었다. 정부는 이모션 사이클의 성공적인 도입을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일상에서 쉽사리 문학 작품을 찾기란 어려웠다. 오랫동안 방치된 도서관에는 아직 문학 도서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를 수거하러 사람들이 왔나 보다. 저들이 나를 발견한다면? 꽤 골칫거리일 것이다. 심문은 기본이고, 처벌의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 타지역의 센터로 강제 추방당할지도 모른다.
맞은 편에서 사람 서너 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딱, 한 명만이 내 쪽으로 계속해서 다가왔다. 구두 굽이 바닥에 마찰하여 나는 소리의 간격이 나의 호흡과 비슷했다. 긴장된 탓에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또각거림이 잦아든 무렵에 거센 노을빛이 눈을 강타했다. 그러고는 시야에 그 아이가 들어왔다. 맹목적인 갈색 눈동자에 곧게 뻗은 콧날. 얼굴 위로 음영이 들어서자, 내 기억이 반응했다. 여유롭게 살랑이는 머리카락에 신념이 무너졌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➁ 미완성의 정의 (2)에서 계속)
박지효 기자 jihyop@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