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금알음 작가의「세계에서」
그날 점심시간.
스무 명 남짓 앉아 있는 교실은 사람이 그리 많은데도 불구하고 적막이 감돌았다. 터치스크린을 조작하는 소리, 알림창을 활성화하는 작은 클릭 소리, 펜이 태블릿을 조작하는 소리 따위가 인간미 없는 교실을 이따금 울릴 뿐이었다. 어쩐지 가슴이 조금 답답해져서, 나는 잠시 화학식에서 눈을 떼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새하얀 불빛.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가 차가웠다. 상급 때부턴 다들 그랬다. 일단 옆에 앉은 아이가 죽어라 공부하고 있으니, 자투리 시간을 쉬는 용도로 활용하고 싶어도 도무지 그럴 수가 없다. 쉬는 동안 또, 내가 이겨야 할 누군가는 저만치 앞서 나갈 테니까.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지던 분위기는 졸업 학년에 다다라서는 아예 인간이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을 느끼고 있을 테다. 인간이라면 으레 뛰어야 할 심장이 추위에 주춤대고 있으니, 교실에서 인간미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점심시간이 인간의 맥동을 가득 품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한 모습 같다고 느낀 지 오래지만, 이 교실은 유독 숨이 막힐 정도로 차가웠다. 극심한 추위도 사람의 숨통을 죄일 수 있다. 오랜 시간 잘 훈련된 아이들이 얼어붙은 심장으로 마지막 힘을 다하는 모습은, 그저 스잔하기만 하다.
지배는 그렇게 고요했다. 아무 소리 없이, 어떤 공통된 행동을 하게 만들고, 그게 진리였다고 서서히 믿게 한다. 아이들에게 아무 소리 없이 동등한 입장을 심어준 그 지배자는, 다수가 옳다고 믿으면 이치가 된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어느새 모두를 장악했다. 각각 마음속에 품고 있던 것들이 다른 이들도 그렇다는 것을 파악하는 순간, 그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기정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죄악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굳어진 머리로 사고하기엔, 지배란 것은 너무 가학적인 단어로 들렸으니까. 아니, 가학적이라고 느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애초에 우리는 적어도 가학적이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교실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리 여겨지는 것은 인과관계가 뒤바뀌는 일이었다…, 하다못해 그간 달려온 길을 부정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른 길로 향하려는 사고를 옳은 길로 붙잡아 두어야 했다. 아니, 하지만, 이것은, 나는 멍하니 손을 들어 귀를 틀어막았다. 사고가 뒤죽박죽 뒤섞이고, 머릿속이 미친 듯이 울린다. 어느 것이 정상이고 어느 것이 비정상인지 알 수가 없었다. 조도를 최적으로 맞춰놓은 조명의 불빛이, 어쩐지 숨통을 죄는 듯하다. 고요는 그곳에서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소리 없는 암살자인 그것은… 순간, 어떤 목소리가 고요를 뚫고 내게 닿았다. “… 여명?” “아, 미안. 집중하느라…” 나는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현실에 돌아오고,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이 어딘가 익숙하다. 시야가 흐려지는 와중 나타난 존재는 이번에도 숨을 트이게 했다.
… 이번에도? 나를 부른 여로는 방해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시간표를 다시 확인했다. 여로의 시선이 교실을 훑기 시작하자, 나도 그의 시선을 따라 교실을 둘러보았다. “다음 시간 체육 아니야? 체육은 운동장에서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별달리 이질적인 부분이 없어서 오히려 여로를 의문스럽게 느끼는데, 그가 아이들과 창문 밖으로 보이는 운동장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여로는 나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이들을 의아해한 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얘기해 주지 않았던가. “체육은 학기에 한 번 있는 체력 측정 빼고는 거의 안 해. 그냥 교실에서 필요한 공부 하면 돼.” 여로의 눈이 일순간 크게 뜨였다. “체육을 안 한다고? 그럼 체육 시간엔 보통 뭐해?” “교실에서 자습하거나… 보충이 필요한 과목 선생님들이 화면으로 수업 연결해 주셔서 그걸 봐. 전 학교에선 안 그랬어?” 체육은 정말 명목상 끼워 넣는 과목이다. 저학년 때도 체육 시간에 운동장에서 어떤 활동을 한 기억은 없었다. 대부분의 상급 학교가 그런 줄 알았는데. 여로는 아니었나? “그건 아닌데, … 아니야. 알려줘서 고마워.” 여로는 상투적으로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질문을 얼버무려 넘기려 하는 게, 질문을 달가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실례되는 질문을 했나? 나는 가슴이 살짝 묵직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람마다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것들은 있을 텐데, 그걸 잠시 간과한 모양이다.
“저, 있잖아. 진작 물어봤어야 했는데, 적응하면서 특별히 힘든 점은 없어? 뭐, 워낙 잘 하고있는 것 같긴 하지만.” 실례되는 질문을 한 것이 미안해서, 나는 몸을 돌려 뒷자리에 앉고 있는 여로에게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이전의 대화를 염두에 둔 질문이었다. 의례적으로라도 이미 물어야 했던 것인데, 여로는 설령 힘든 일이 있더라도 성숙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다행히 여로는 순서가 뒤바뀐 질문에도 밝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응, 그다지 힘든 건 없어. 내가 생각했던 거랑 딱히 다를 것도 없었고, 너도 잘 도와주려 하던걸.” 여로가 겸손하게 말하며 공치사를 돌렸다. 뜻밖의 칭찬에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 반장이니까 당연한 건데. 애초에 책무를 다하지 못한다는 가정 자체가 끔찍했다. 그런 속물적인 목표만으로 여로를 친절하게 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익숙지 않은 칭찬에는 여전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게 내 일인데 뭘… 더 궁금한 거 있으면 편하게 물어봐. 그래도 아직 낯선 게 많을 거 아냐.” “음, 아. 혹시 보건 시간에는 뭐 배워? 전 학교에서는 없던 과목이라.” “아, 몇몇 중급 학교에서만 배우는 과목이라 몰랐을 거야. 보건실에 계시는 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생명 시간에 배운 인체 구조 같은 것들을 확장해서 배우고, 질병이나 면역 체계 같은 기본적인 의학 지식을 배워. 생명 분야로 가려는 애들이 점점 많아지니까, 기초 지식도 쌓을 겸 차별성을 두려고 개설됐대.”
나는 태블릿으로 보건 시간에 완성한 학술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보건은 교과서는 따로 없지만, 전문 과목인 만큼 웬만한 화학이나 수학 정도로 난도가 높았다. 다만 공학이나 화학 등 여러 분야와 연계할 수 있어 연구 포인트를 가장 많이 쌓을 수 있는 과목이기도 했고, 개설 학교가 얼마 없다는 것으로 이점을 만들기 위해 생긴, 말 그대로 기능적인 과목이었다. 다른 학교에 비해서 해야 할 게 죽어라 늘어난 게 이런 것들 때문인 것 같지만. 나는 뒷말은 애써 삼키고 웃었다. 동기는 알 수 없었어도 이제 새로 시작하는 애한테, 고생길이 열릴 거라고 괜히 겁을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아예 특정 분야를 위해 과목이 있을 정도면… 지금 그쪽이 가장 중요한 분야이긴 한가 보네.” “당연하지. 어쨌든 그 동기로 다들 여기 모였고, 좀 넓게 생각하면, 그걸로 좀 더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으면 좋은 거니까.” 나는 어쩐지 조금 회의적으로 보이는 여로에게 입학 설명회 때 들은 이야기를 인용해 열변을 토했다. 뭐랄까, 여로는 내내 그랬긴 했지만, 생명 쪽을 이야기할 때 특히 여타 아이들과 다른 반응을 보여서. 보통은 꼭 거기에 서고 싶다며 눈을 빛내거나 그 분야에 있지 못할까 긴장을 하곤 했다. 그만큼 주된 사회의 흐름이었고, 이 학교 학생들의 유년을 맞바꾼 것들이기도 했다. 그 보편적인 흐름에 회의적인 모습이, 왠지 입학 설명회 때의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해서,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그게 옳다고 믿어야 했으므로. 거의 나 자신을 확신시키기 위한 의식이기도 했다.
“… 생각을 피하지 말란 게, 그런 생각을 피하지 말란 건 아니었는데.” “… 뭐라고?”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여로가 잠시 미소를 지운 채 혼잣말을 했다. 여로의 미소는 부정한 감정을 찾아볼 새도 없이 곧바로 원래의 궤도를 찾았으나, 나는 이미 찰나의 정색을 본뒤였다. “아까 얘기한 거… 말하는 거야?” “반쯤은? 나도 아직 확신이 안 가서, 함부로 무어라 얘기하지는 못하겠어.” 여로는 손가락으로 툭, 툭 책상 구석을 두드렸다. 무언가를 고뇌하듯, 혹은 고뇌를 정리하듯. 그 흐름을 멍하니 쳐다보는데, 별안간 손가락이 탁, 하고 멈춘다. “그래도 너랑은 좀 더 얘기해 보고 싶네. 아무리 오래 친한 건 아니었지만….” 책상 밖으로 손목이 빠져나오자 그의 옷자락이 툭,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흘리듯 내뱉은 말에 기시감이 든다. 여로는 내가 아까 말한 것을 의식하고 있던 것이다.
“방랑 중에 고향 사람을 만나면 기쁜 법이니까.” “… 고향 사람? 너 나 알아?” 여로의 말에 놀란 심장이 두근댔다. 놀란 감정을 여실히 드러내며 거의 반사적으로 내뱉은 말이 상대를 놀라게 한 듯했으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곧 부드럽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직관적인 의미는 아니었어. 생각보다 너무 놀라는데, 괜히 얘기했나.” “아냐, … 내가 과민반응했어. 무슨 소린진 모르겠지만, 친하게 지내자는 뜻으로 알게.” 심장의 고동이 서서히 정상 궤도를 찾았다. 나를 정말로 아는 걸까 하는 의심에 순간 모든 사고가 굳어 버려서, 정상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다. 직관적인 표현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의미란 거지. 뜻 모를 의문이 차올랐지만, 이미 앞선 대화에 일말의 공포심이 차올라서 굳이 그걸 깊게 파고들지 않고 대화를 정리했다. 사담은 이걸로도 충분하다. 마음 쏟을 데가 가뜩이나 많은데, 고작 이런 것으로 동요하게 되면 곤란했다.
식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옮겼음에도, 내 바람과는 반대로 앞선 대화가 계속해서 머리에 맴돌았다. 사실 사리에 맞지 않아 보이는 이런 식의 대화가 지금이 처음은 아니었다. 여로는 이런 식으로 학교에 대한 것을 논할 때마다 종종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학교의 구조나, 자습 신청 방법이나, 기록부 운용 방법 등을 일러줄 때. 어쩐지 비관적인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어도 영문을 몰라 당시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쯤 되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간이라도 빠르게 된 심장이 그 느낌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여로가 신비하다고 불리는 이유는, 그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비단 그 완벽한 머리나 성숙함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어떤 흐름을 거스르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여로의 눈동자에 마음이 끌린 이유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내 심장과 겹쳐 보여서일 수도 있겠다고… 그리 막연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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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로의 의뭉스러운 말들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예감과는 달리, 내가 여로의 암호 같은 말을 이해하게 되는 건 생각보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루의 체력이 가장 한계에 다다를 때쯤 있는 화학 수업 시간이었다.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 있을 칩은 눈앞에 오비탈을 그려내고 있었다. 두통이 머리를 죄여대는데, 칩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모양이다. 나는 미간을 크게 찌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오비탈의 궤적을 정신없이 따라갔다. “이 파트는 다들 풀 줄 알겠죠?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여기선 2S 오비탈에 들어있는 전자의 개수를 파악해서…” 전자 칠판에 글씨를 쓰던 선생님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멈춘다. 진행이 끊긴 탓에 칠판과 연동된 푸른 창에도 오비탈에 전자가 채워지다 말고 뚝 멈추었다. 그리고 침묵. 선생님의 시선은 어느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기엔 펜을 들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한결이 있었다. 한결의 눈앞에는 켜져 있어야 하는 수업 창도 꺼져 있었다. 아, 한결아. 그러니까, 나는 탄식이 튀어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 미지의 원소가 2주기 원소라는 것을 알아낸 후, 나머지 부분을 풀어가면 됩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말해두겠지만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자는 학생을 깨우지 않습니다. 본인 인생은 본인이 책임지도록 하세요. 자, 다음 21페이지를 보면…”
선생님은 곧 한결에게 닿은 시선을 거뒀다. 뼈가 박힌 말을, 듣지도 못하고 있을 한결에게 내뱉으면서. 아이들 모두를 청자로 삼았으나, 실상은 한결을 저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교실에 다른 종류의 긴장이 맴돈다. 그것은 교실에 있는 모두가 그 속에 깔린 저의를 알아챘다는 것을 시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결의 주변에 있는 애들 가운데 눈치껏 한결을 깨우는 애는 아무도 없다. 그리 좋지 못한 것을 담고 있는 모두의 눈초리가 한 사람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한결을 그 시선 속에 방치했다. 어쨌든, 자신들은 누군가 조는 틈을 이용해 앞으로 나가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이해는 했다. 저들의 시선 속에 담긴 것은, 일종의 안도와 경계 따위일 것이다. 나는 안 졸면 돼. 여물지 못한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으므로, 그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닌데. 순간,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들었다. 뭘 부정하고 싶은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서, 그냥 이 상황이 모조리 틀려먹었다고, 저 앞에 나가서 외치고 싶었다. 쿵, 쿵… 낮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이 정상적인 방향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수업 시간에 조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었으므로, 그사이 경주에서 뒤처지거나 공개적으로 질타를 받아도 별달리 할 수 있는 말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둥글게 둘러앉은 구조에서, 한결의 정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나는 보였다. 졸지 않기 위해서 뾰족한 태블릿 펜으로 손끝을 찔러가며 분투한 흔적. 원의 지름만큼 떨어진 나도 보이는데, 반지름보다 가까이 있던 선생님에게는 정말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그래도 신경을 놓쳐서는 안 되는데. 허탈한 상념 탓에, 필기하는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말마따나 미래를 위해선 극심한 피로에 분투하다가 아주 잠시간 굴복하게 되는 것도 죄악이라 치부할 수 있는 걸까. 모두가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 그런 잔혹한 과정으로 만들어진 미래는, 정말 아름답기만 할까? 버겁다면 적응이 됐다고는 할 수 없잖아.
순간, 고요한 정오의 햇살과 함께 여로의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복도로 들이치던 햇살과 함께, 기이한 감정이 슬그머니 다시 기지개를 켜던 그때. 한결이 별안간 눈을 번쩍 떴다. 한결의 뒷자리에 앉은 여로가 한결을 깨운 것이다. … 다행이다. 더이상 한결이 무력하게 시선 없는 시선을 받지는 않을 거라는 안도에, 고개를 쳐들던 근원 모를 감정들이 잠시 누그러졌다. 한결에게 아예 시선을 주고 있지 않던 선생님도, 정신을 차리고 망연한 표정을 하는 한결을 알게 모르게 흘긋댔다. 항상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했던 한결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나는 그가 겪고 있을 무력감을 떠올리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아직 수업 중이었으므로 시선을 옮기려는데, 순간 한결의 뒤에 있던 여로와 눈이 마주친다. 여로는 예의 그 눈웃음을 지으며, 입 모양으로 무언가를 얘기했다. 한결과 함께 일순 동요한 내 상태를 읽기라도 한 듯이. ‘전에 그거.’ … 뭐? ‘이 친구가 대답해 주네.’ 여로가 한결의 뒤에서 한결을 눈짓했다. 나는 그의 말을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니까… 그때 대화를 얘기하는 건가? 적응하지 못한 경우? 무얼 얘기하고 싶은 건지 정확히 알 수 없어 마음속의 혼란만 더 커져갔다. 다만, 그의 음성과 함께 올라온 하나의 기시감에 소름이 끼쳤다. 그 이야기. 여로는 내가 한결을 보면서,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는 걸 눈치챈 걸까. 우연치고는 너무나 절묘하다. 알 수 없는 혼란이 화학식을 밀어내서, 20분 남짓 남은 수업도 머릿속에 들어오다 말고 반대쪽으로 흘러 나갔다. 궤도 함수니 오비탈이니 하는 것보단… 내 궤도에 들어와 버린 상념들이 더 문제였으니까.
그럼에도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흘렀다.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급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중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여로를 찾았다기보단, 한결을 보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혼란의 시발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남은 수업 내내 한결의 표정이 너무나 좋지 않았던 탓도 있었다. “… 여명아, 나 많이 졸았어?” 한결은 창백한 낯으로 사위를 둘러보았다.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그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내뱉는 말이 다급하다. … 심장이 죄이는 느낌이겠지, 아마. 그 끔찍한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절로 미간을 찡그리며 한결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수업 중간에… 선생님이 아시긴 했어. 많이 피곤했어?” “아, 포인트 깎이겠다…. 며칠 동안 심화 탐구 마무리하느라 동트는 거 보고 잤거든.” 한결이 짙은 한숨을 내쉬며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이 학교 학생치고 매우 밝은 편에 속하는 한결도, 이따금 풀리지 않는 일들에 눌려 이리 시들어 버리곤 했다. 나는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일을 떠올렸다. 며칠 전 입학 설명회 때 본, 흥분에 차 있던 얼굴과는 대조적이다. 죽어버린 얼굴이 가슴을 아리게 해서, 도무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며칠 밤을 무리해 가며 했다는 심화 탐구도, 결국 포인트를 얻고 기록부에 한 줄 남기기 위한 것이었을 텐데. 학교에선 종종 이리 주객이 전도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나는 그저 풀 죽은 한결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렸다. 짙은 상실감과 동시에, 인생을 통괄하는 목표에서 점차 멀어지는 느낌. 숨을 쉬게 해주고 싶은데, 나조차 숨을 참고 달리고 있으니 도무지 어떤 식으로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세계에서 멀어지는 듯한 아득한 느낌은,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았으니까.
“… 나 포인트로 상급 못 갈 것 같아. 참 ….” 얼굴을 묻고 있던 한결이 천천히 고개를 들더니,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포인트 모아뒀던 거 다 버리고 졸업 시험 준비할까." 멈칫. 한결의 등을 토닥이던 손이 잠시 멈췄다가, 내색하지 않으려 애써 노력하며 손짓을 이어갔다. 졸업 시험. 애들 사이에선, 거의 최후의 수단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포인트가 중요한 평가 요소긴 하나, 상급 학교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중급 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의 졸업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포인트와 상관없이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 있긴 했다. 다만 그 취지는 아이들 개개인의 역량을 키워주기 위해서라는 것보다는, 한 분야로 지나치게 몰려버린 학생들을 인력이 적은 분야에 넣기 위함이 더 컸다.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공부할 능력이 있는 학생들을 골라내 특정 분야의 학교에 임의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졸업 시험을 보면 선택의 자유가 거의 사라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의 고생 후에도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지 못하는 건 개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꽤 잔인한 일이었으나, 특정 분야에만 인재가 집중된다면 과학을 기반으로 한 사회가 고루 발전할 수 없었으므로 졸업 시험은 어찌 보면 필요악이기도 했다. 한결은 그런 길을 간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길을 타인에게 맡겨버리겠다고.
“너 졸업반 들어오고 엄청 열심히 했잖아. 이제부터 잘 하면…” “입학 설명회 때 정신 차리고도 이러잖아. 의지 문제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하.” 한결이 얼굴을 찌푸리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다면 조는 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인데, 그냥 자신이 의지박약이라는 말들을 덧붙이면서. 어차피 포인트는 적립식이었으므로, 졸업반에 들어와 막판 스퍼트를 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한결도 그중 하나였고. 몇 달간 쉴 새 없이 공부하고 탐구를 진행한 한결이 잠시 힘에 부쳤는지 흐린 눈을 하던 때가 있었다. 입학 설명회 후 다시 힘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힘에도 좌절한 한결은 아예 자조적으로 웃어버렸다.
“역시 난 글렀어. 지친 게 핑계가 되면 안 됐는데, 힘들다고 긴장을 놓은 게 실수였어. 설명회 듣고 정신 차려서, 깎인 포인트들 만회하려고 한 건데, 계속 이러면 이젠 좀 위험해서… 원하는 공부는 못 해도 일단 상급 나오면 인생이 완전히 망하진 않잖아. 괜찮을 것 같은데…” 한결이 거의 혼잣말을 하듯이 내뱉었다. 뒷말부터는 아예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인 듯했다. 명랑한 성정으로도 짙은 피로를 숨기지 못하는 한결은 위로보단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 보이는 것 같았다. 결국엔 나도 풀지 못한 문제의 해답을 들려줄 수도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한결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했다. “… 머리 좀 식히고, 천천히 생각해 봐.” 상투적인 말을 내뱉은 나는 마지막으로 한결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고 손을 물렸다. 문득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담임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지만, 그 말을 한결에게 대입하기엔 너무나 공허했다.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지치지 않아야 한다는 말은, 아무리 다정한 어조로 말해도 텅 비어버린 것일 테니까. 잠시간 그대로 움직이지 않던 한결은 점심시간에 점심을 거르고 조금이라도 자야겠다며 이동 수업실을 먼저 나갔다. 교실은 고작 사람 하나 없어졌다고 직전보다 몇 배는 더 고요해졌다.
시선이 느껴져 앞을 보니 일련의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여로와 눈이 마주쳤다. 여로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단념한 듯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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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나는 멀건 죽을 떠먹다 말고 푹 고개를 숙였다. 뭉근히 풍겨오는 그레이비 소스 냄새가 은근히 후각을 자극했다. 거의 아무런 향도, 맛도 없는 내 음식에서 풍기는 냄새는 아니었다. 물끄럼한 내 시선에, 여로가 함박 스테이크를 입에 가져가다 말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내 시선이 고기 조각에 닿아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장난스레 포크를 흔들어 보인다. “좀 나눠줄까?” “… 아니, 괜찮아.” 여로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시선을 먹고 싶어서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바로 고개를 저은 나는 다시 내 몫의 음식을 떠먹는 데 집중했다. 먹고 싶기는커녕, 자극적인 음식 냄새는 조금 역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음식 냄새를 선호하는 편은 아니었어도, 역하게 느낄 만큼 싫어하지는 않았는데. 후각 문제라기보단 심리적인 요인 같았다. 옆자리가 휑하니 텅 빈 느낌이 들었으니까. 화학 시간 때 얕은 잠은 한결에게서 의욕뿐만 아니라 식욕마저 앗아간 모양인지, 한결은 저녁 시간에 저녁을 먹기보다 차라리 자야겠다며 기숙사로 향했다. 저녁 이후엔 자율 학습이나 보충 수업이 있으니 많이 피곤하다면 그편이 현명한 선택일 테지만, 씁쓸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상황이 그러니, 오히려 입맛이 도는 게 이상하겠지. 나는 평소에도 입이 짧은 편이었고, 저녁을 거르려는 나를 억지로 끌고 오는 것은 한결이었다. 오늘은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한결이 가버린 뒤 교실에 남아있으려던 나를 끝끝내 나를 식당으로 끌고 온 것은 여로였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하면서.
“그거 먹고 힘이 나? 돌아서면 배고플 나이 아닌가. 성장기잖아.” 한참 우울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여로가 또 한 번 말을 걸었다. 그의 시선은 반 넘게 남아있는 내 그릇에 닿아 있었다. “… 아직도 성장기를 따져? 키 크는 거 단념한 지 오랜데.” “크는 애들은 스무 살 넘어서도 커. 나는 지금도 크고 있는데.” 여로가 손가락을 쫙 펴 내 키를 가늠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무리 전에 없던 풍요의 시대라지만, 인위적 노력을 가하지 않는다면 아직 키는 어느 정도 선천적인 영향이 컸다. 태어나길 발육이 좋았는지 운동이라도 한 것인지, 여로는 또래보다 한 뼘 정도가 컸고, 나는 또래보다 아주 조금 작은 편이었다.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감정을 누른 나는 불만을 담아 미간을 조금 찡그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딘가, 억울한 기분이 든다.
그때는 여로가 나를 놀렸을 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멀건 죽에는 이래 봬도 영양보충식이란 이름이 있었고, 이걸로 식사를 때운다 해도 영양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나는 불퉁하게 튀어나오려는 입을 통제하며 애써 여상한 투로 말했다. “글쎄, 뭐… 키 크는 게 중요할 때는 아니니까. 그리고 많이 먹으면 이따 졸아. 앉아 있기 힘들기도 하고.” 그러니까, 키가 작다고 해도 내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였다. 논리적으로 줄줄이 이유를 댔지만, 왠지 변명 같은 느낌을 지우지 못해 끝으로 갈수록 말소리가 작아졌다. 어딘가 모르게, 이전과 비슷한 기시감이다. “밤에 잠을 못 자니까 당연하지. 어제도 늦게까지 불 켜져 있던데.” 여로는 길고 긴 내 변명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간단히 이야기했다. 정리하고 보면, 문제의 해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말하듯이. 하지만 항변하자면, 또 이 문제의 원인은 아주 간단하다. 포인트를 마지막으로 많이 쌓을 수 있는 졸업반에서 제대로 된 수면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나는 문득 든 생각을 달갑게 여기며 입을 열었다. “그때 자면 과제를 못 끝내니까… … 잠깐, 근데.” 너는 그 많은 걸 다 하고 일찍 잔 거야? 어색하게 끝맺은 말이 허공에 잠시 맴돌았다. 말을 하면서 문득 든 의문에 떠오른 날 것의 그대로를 내뱉으려다가, 묻기엔 실례일 수 있다는 이성이 겨우 커브를 돌렸다. 생각하고 보니 신기했다. 가뜩이나 학기 중간에 전학 와서 중간 평가 과제가 넘쳐날 텐데, 어떻게 맨날 정시에 잘 수 있는 거지? 며칠간, 나는 딱히 여로가 바쁜 일정에 허우적댄다거나… 과제가 버겁다고 하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원래 이곳에 있던 아이들도 버거워하는 것을 생각하면 신기한 일이었다. 선생님들이 아직 과제를 할당하지 않았다기엔, 여로에게 과제 알림이 오는 것을 봤고, 여로가 그것을 확인하고 알림창을 지우는 것도 봤는데.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물다가, 그의 총명함을 떠올린 나는 곧 체념 어린 어떤 결론에 당도했다. 나 혼자 생각하고 결론을 내려버리는 게 웃기지도 않다. 그냥 여로가 뛰어나서, 모든 과제를 ‘원래’ 끝내야 했던 시간에 전부 끝낸 것일 수도 있었다. 일단 모든 과제나 연구는 수업 시간 안에 끝내야 하는 게 원칙이었으나, 많은 양과 미친 난이도 때문에 시간 안에 끝내지 못하고 수면 시간을 침범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여로는 그 보편적인 얘기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너무 나를 중심으로만 생각한 모양이었다. 결국에는 과제가 과도하다고 느끼는 것도, 그걸 제시간에 끝내지 못해 식사 시간이나 수면 시간을 쓰는 것도 보편적인 일이라고 포장했긴 하나, 내가 능력이 부족한 탓이다. 나보다 더한 노력의 집체라거나, 상식 밖의 천재들이 있는 것은 익숙한 얘기다. 그러니까 좀 더 낮고 겸손한 자세로, 아무런 핑계도 대지 않고, 좀 더 정진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우리 저녁 먹고 산책 나갈까?” “… 응?” “오면서 보니까 교정이 참 예쁘던데. 마침 오늘 비가 안 와서.” 여로는 어색하게 끊긴 문장이 무엇이었는지 캐묻진 않았다. 다만, 노을 진 창문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얘기를 꺼내 놓을 뿐이었다. … 산책을 가자고? 지금? 이해를 못 할 만큼 어려운 문장은 아니었으나,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한 산책이란 단어가 순간 낯설게 다가왔다. 숟가락질을 하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추어 선다. 일부러 나가야 할 일이 있나? 혹시 모를 가정에 나는 어색한 표정을 숨기며 입을 열었다. “산책이… 필요해? 과제나 그런 것 때문에? 생태 관찰 같은 과제는 지금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산책을 필요해서 나가?” 여로가 눈을 깜빡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필요가 없으면 왜 나가?” 의문에 의문으로 대답하는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소리였다. 졸업반 학생쯤 되면, 학교 밖으로 나갈 일이 거의 없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체력 측정은 학기 초에 진작 끝나 유일하게 시험을 보지 않는 체육 시간에도 자습을 했고, 잘 시간도 부족한 마당에 목적 없이 교정을 거닐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어색하게 끊긴 대화 탓에, 나와 여로 사이에 잠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여로는 예의 그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저 어떤 말을 하기보다는, 가만히 미소 짓는 것을 택했다. 아무 맥락도 없이.
“내가 아직 널 잘 아는 건 아니지만.” “….” “산책 때문에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해둘게. 거절한다면야 강제할 수는 없겠지만, 날 좋을 때 한 번쯤 바람을 쐬는 건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거야.” 여로가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기저에는, 어느 정도의 확신이나 신념이 없으면 담아내지 못할 것들이 있었다. 나는, 그러니까, 잠시 그대로 멈춰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로가 그리 웃었듯이, 홀린 듯한 대답에도 아무 맥락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튀어나온 행동에 뒤늦게 놀랐지만, 그 순간 마주친 여로의 잔물결이 은은하게 빛났기에, 도저히 끄덕임이 실수였노라 얘기할 수 없었다. … 그래. 말마따나, 정말 십 분 정도 나가서 걷다 오는 것은 괜찮겠지. 여차하면 한 시간 정도 늦게 자면 된다. 머릿속으로 바쁘게 저녁 일정을 조절하면서도, 문득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예감이 마음속에 짙게 자리 잡았다.
여로의 말대로, 설령 아무런 가치를 찾지 못한다 한들… 이 산책이 나를 더 아프게 하거나,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을 거라는, 조금 무모한 예감.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① 나그네 하나 (4)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