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금알음 작가의「세계에서」
세상이 뒤집히고 난 뒤의 날씨는 언제나 제멋대로였다. 새로운 지구를 경험하지 못한 옛사람들은, 날씨도 가시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이다. 사계절은 이미 사라졌다. 일 년 가운데 유독 덥거나 추운 시기가 있다는 것이 지구에 사계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공전과 자전의 궤도가 변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정작 지구 내부의 궤도가 한 번 크게 비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세상이 한 번 파멸에 이르렀었다는 증거는 변칙적인 날씨에서 가장 여실히 느껴지곤 한다. 여름에도 눈이 오는가 하면, 겨울에도 태풍이 불었다. 또 저 높은 곳을 구성하는 원소들은, 세상의 잔인한 풍경들에 질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늘이 매일 색채를 달리하여 노란빛으로, 보랏빛으로, 이따금은 붉은색으로 물드는 예측 불가한 나날의 반복이었다.
오늘은 하늘이 유독 붉었다. 눈부심을 참고 빛을 좇다 보니, 붉은빛의 근원은 지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고 있는 태양이었다. 그 조그만 끄트머리에서 나오는 빛이 지평선 아래 바다까지 물들여, 온 세상을 불태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낙조는 거대한 무게추다. 너무나 무거워서, 바다가 빛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보이는 듯했다. 아니, 바다도 온통 붉으니까, 빛이 바다를 집어삼킨 것일까. 학교 현관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이것이 과연 옳은 행동인가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그 장엄한 붉은 빛을 보고 복잡하게 생각하던 것을 멈추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 의지라기보단,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을 제대로 마주한 것도 꽤 오랜만이었으니까. 온 사고가 잠시 작동을 멈출 정도로 마음을 뺏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있어 하늘은 해가 길어지는 시간 때쯤, 공식이 빼곡하게 적힌 태블릿에 어떤 색조를 입히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정작 창문 밖을 쳐다볼 용기는 없어서 그 색채로 겨우 하늘의 색을 짐작하는 게 전부였는데. 유독 저 붉은 빛에 시선을 빼앗긴 것은, 창문 안쪽의 세계와 바깥 세계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엄청 붉다. 불타는 것 같네.” 여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 맥락 없는 말이 불편하지 않다. 그 두서없는 사고가 나와 같은 생각을 담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일까.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홀린 듯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학교 중앙에는 커다란 연못이 하나 있다. 연못 옆에 인조 잔디가 심겨 있는 운동장이 작게 나 있고, 그 주위를 학교 건물이 디귿(ㄷ) 자로 둘러싸는 구조였다. 수도 도심과 조금 떨어져 있는 학교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건물 밖까지만 나와도 바다의 지평선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연못의 물은 유독 검은 편인 것에 반해서, 바다의 물은 청명한 하늘을 닮아 맑다. 만약 여유라는 게 있을 수 있다면, 그 대비를 보는 것도 꽤 쏠쏠한 재미일 것 같았다. “난 아직 길을 잘 모르는데, 어떻게 가면 좋을까?” 내가 이 산책을 꽤 호의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안다는 듯, 여로가 여상한 투로 물었다. 나는 여전히 붉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무의식적으로 연못가를 손짓했다. 이 년을 조금 넘게 이 학교에 다녔으면서 한 번도 개인적으로 가보지 않은 곳이었지만, 산책을 하기에는 아마 저 주위가 적격일 터였다. “연못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들어가자. 저녁 자율 학습 시간에만 안 늦으면 되니까.” “그래. 난 그냥 너 따라갈게.”
나는 한번 낮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이상한 일이다. 연못으로 향하는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수록, 발걸음에 따라 학교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알 수 없는 예감으로 심장이 쿵쿵 고동치기 시작했다. 바람은 적당히 선선했고, 어제 비가 온 것 치고는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습기가 기분 좋게 온몸을 감싸 안았다. “오늘 날씨 꽤 마음에 드네. 어젠 공기가 척척해서 별로였거든.” “어제도 나갔다 왔어?” 어제라는 단어에 조금 놀라 그에게로 고개를 돌리자, 여로가 여상히 어깨를 으쓱였다. 난 저녁쯤에 맨날 나와. 무슨 문제가 있냐는 듯 당당히 덧붙이는 말에 나는 머릿속으로 여로의 행적을 되짚었다. 지난 사흘간 여로와 거의 매시간 붙어 다녔지만, 자습실이 달라 저녁 자습 때만큼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모르는 사이 산책을 했다면, 그 시간을 이용한 걸까. 여로의 행동이나 행적은, 이제 조금 기이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거의 모두가 무용하다고 여기는 일을, 왜 꾸준히 단행하고 있는 것일까. “넌 어때?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니더니.” 여로가 나를 바라보며 역으로 질문했다. 의문은 손대지도 못한 채로, 나는 여로의 그 말간 눈을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다. 어떻냐고? 그래, 아까는 확실히 산책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나오는 와중에도, 불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 시원해. 에어컨 바람이랑은 또 달라.” … 좋았다. 단지 발걸음을 옮기는 것만으로 일종의 해방감이 느껴졌으니까. 우리 학교는 잘 따지고 보면 퍽 낭만적인 장소다. 온갖 신비로운 자연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신성한 학문을 위해 외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는 이곳에 낭만이 존재하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학교에서 조금만 가면 바다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고 졸업하는 애들이 있다는 게 문제지만. “… 역시.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뭐라고?” “… 아니야. 좋다니 다행이다. 억지로 끌고 나온 거면 미안하잖아.” 여로가 지평선 너머 먼 곳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의중을 알 수는 없었으나, 이제는 그 뜻 모를 중얼거림이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것 같았다. 구태여 의중 모를 말을 따지지 않고, 여로의 시선을 따라 지평선 너머를 바라본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았지만, 태양 빛이 바다 위로 넓게 퍼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꼭 언어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달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까. 단순한 직감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옆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과 내가 같은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고 느꼈다. 같은 시선 속에서도, 서로 다른 형태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도.
그거 아는가? 태양은 정오보다 황혼 녘에 세상을 더욱 다채롭게 물들인다. 곧 자신의 존재가 사라질 걸 알아서, 마지막 힘을 다해 자신을 불태우는 것이다. 죽기 전 엄청난 에너지를 내며 폭발하는 초신성처럼. 지금의 붉은 태양은 마치 초신성 같았다. 빛의 세기가 너무나 밝은 나머지 세상을 비추다 못해, 그것을 들여다보는 누군가의 마음도 비출 수 있을 법한. … 어라. 방금까지 한 생각이… 뭐더라. 정제되지 않은 사고가 생경해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몰랐던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마음 가는 대로의 사고를, 그저 너무 오랜만에 목도한 것뿐이었다. 낯선 사고에 잠겨 있던 나는 문득 옆자리가 너무나 조용한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본 여로의 눈은, 붉은 태양이 물들인 바다처럼 빛을 받아 붉게 빛났다. 여로는 무엇이든 받아들일 줄 알았다. 정제된 언어도, 정제된 언어도, 혹은 정제되지 않은 빛깔들도. 여로는 침묵을 탓하지 않았다. 멈춤을 지적하지도, 답을 내라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조용히 먼 발치에서 기다리며, 받아들이라 말할 뿐이었다. 생각을 받아들여. 그게 이런 뜻이었던가? 문득 붉은 정경에 또다시 여로의 언어가 겹쳐지며, 두 상황이 동시에 떠올랐다. 그것은 서로 전혀 다른 두 상황을 안았고, 또 다른 상황마저 안고 있었다. 여로의 말은 꽤 포괄적이었던 모양이다. 세상의 어떤 것들을 모두 투과하는 진리처럼.
“… 아까 화학 수업 시간에 했던 말 있잖아. 한결이가 대답해 줬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나는 그 생경한 것들을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원래는 이해하지 못한 그 말을 그냥 잊어버리고 넘길 작정이었다. 그 모호한 것을 풀어낸다고 해서 세상의 진리가 하나 더 보이는 것도, 포인트가 쌓이는 것도 아닐 테니까. 이미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것은 차고 넘쳤으니까. 하지만 순간, 어딘가 모르는 채로 넘겨버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까와 같은 예감. 이것을 그냥 넘겨버린다면, 나는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끝없이 후회하고 있을 것만 같다고. 머뭇대며 나온 질문이 멍청하게 들렸을까 걱정했지만, 여로는 그 서툶을 보고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언제 물어봐 주나 했네.” 그러니까 이를테면, 기특한 행동을 한 어린아이를 칭찬할 때 보이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것. 어릴 때도 잘 받아본 적 없는 미소에 나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것을 겨우 다잡아야만 했다. 그러나 낯설기만 하진 않은 느낌이다. 여로와 있을 때면, 어쩐지 선생님들에게 어른스럽다고 칭찬을 듣는 내가 잔뜩 어려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혹시 그거 알아? ‘모든 세상은 무대이고, 남자와 여자는 단지 배우일 뿐이다.’” “… 셰익스피어?” “오, 읽어봤니?” 여로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떴다. “하급 때 제2 공통어 시간에 읽어봤어. 파멸 전 엄청 유명한 시인이었다고 들었는데.”
‘뜻대로 하세요.’ 그 희곡의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여로가 말한 것은, 아마 거기 나온 구절일 것이다. 중급부턴 문법을 제한 언어 과목이 따로 없어서, (공통어로 된 논문을 읽거나 공통어로 수업을 듣는 것은 제외하고) 저 구절을 듣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었다. 정부가 인문학적 요소들을 아예 터부시한다는 건 아니다. 다만 과학과 비교해서는, 우선순위가 밀렸을 뿐이었다. 지금 학문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모두 과학자들을 이야기했고, 더 이상 종교학이나 문학은 학문의 영역이 아니었다. 언어는 차라리 과학이란 학문을 탐구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급 학교 때는 지금 발화하고 있는 제1 공통어 말고 총 세 언어를 배웠다. 지금 통용되는 세계의 언어는 파멸 전 힘이 제일 강했던 나라의 언어들을 통합한 결과다. 파멸은 문화를 앗아갔다. 지구상 그리 다양했던 언어는 통합된 공용어 다섯 개밖에 남지 않았고, 상급 학교 고서적 어딘가에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문학이라 불리던 학문은 흔적만을 남기고 현재에 와서 거의 가르치지 않았지만, 인지도가 높았거나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던 문인들의 작품은 종종 언어 시간에 쓰이긴 했다. 셰익스피어도 그중 하나였는데, 선생님이 특히 저 문장이 중요한 구절이라고 강조한 게 기억에 있어 아직까지도 희곡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그 선생님은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면서 유독 문장 구조가 아닌 내용과 표현을 강조했다. 한창 입학시험을 중시하던 당시에는 불필요한 것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짜증이 나긴 했지만, 평소에 나는 그런 선생님의 수업을 꽤 좋아했다. 뭐랄까. 인간적인 걸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읽어봤다니 다행이네. 문학은 좋아해?” “문학?” “응. 소설이나, 시나, 수필이나… 희곡이라고 불렸던 것들.” 여로가 단어 하나하나를 가늠하듯 천천히 이야기했다. 조금 당황스럽다. 문학을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도, 거의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그것은 지금 사회에서 그리 쓸모 있는 부류의 것은 아니다. 아무런 규칙성도 없는 인간의 감정 하나하나를 그저 길게 늘여 쓰는 것은 파멸 후 생존에 급급했던 인류에게 그리 큰 도움을 주진 못했다. 누군가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 줄 수 있었을진 몰라도, 그 텍스트들은 재해로 무너진 곳을 복구하거나, 여러 차례의 방사능 피폭으로 인해 망가진 신체를 치료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런 이유들로 종교라고 불리던 것도 거의 쇠퇴했는데, 문학이라고 다를 게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얘기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하급에서나 중급에서나 크게 문학을 대할 기회는 없었다. 애초에 문학이란 단어를 듣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기도 했다. 나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들에 고개를 휘저었다. 애초에 한결이 일을 물었는데 왜 문학을 논하는 거지. “한결이 일을 물어봤잖아. 문학 얘기를 꺼낸 건 아니었는데.” 나는 결국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내가 묻기를 택했다. 무엇이 궁금한지도 잘 모르겠는데, 머릿속에 온통 의문만 가득 차 있었다. “문학을 이해하면 꽤 여러 상황을 이해할 수 있거든. 한결이란 친구도 그렇고.” 여로는 그리 말하며 붉게 타오르는 저 지평선 너머를 손짓했다. 넘실대는 붉은 빛에 아득해진 기분이 조금 더 세를 불렸다. “아까 그걸 느낀 거지? 사람이 좀 졸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뭘 저리 면박을 주냐고.” “무슨, 그런 예의 없는 생각 안 했어!” 나는 순간 아연해져서 소리쳤다. 선생님의 시선이 한결에게 닿은 그때 아주 잠시 든 생각을, 여로가 알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어쩌면 본심을 들킨 것에 당황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순간이었으나, 나는 그때 선생님이 아주 미웠으니까. 원망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그런 죄를 또다시 지을 수는 없었다…
최근에 잠시 세를 죽였던 죄악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려 하는데, 여로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본심을 들킨 게 아닐까 하는 불안이나 마음을 좀먹는 죄악감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푸른 눈은 지금은 다정함을 담고 있다. 눈빛으로 위로를 전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처럼. “그런 놀란 표정 짓지 마, 네가 예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또, 명확히 드러내지 않아서 ‘느꼈다’고 표현한 거고. 하지만 그 생각들을 드러냈다 한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네가 반대로 생각했다는 게 중요한 거지.” “… 반대로?” “응. 예컨대 이 학교의 선생이나 학생들은, 대부분 그 상황에서 선생님을 옹호했을 거잖아?” 순간 여로의 목소리가 낮게 변했다. 그 기세에 잠시 주춤하는데, 여로는 곧 평소의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너는 그때, 네 ‘배역’을 연기하지 않고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지. 한결이 잘못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잘못한 것일 수도 있다고. 그를 통해서, 너는 나한테 그걸 보여줬던 거야. 연기하지 않는 거.”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머리가 복잡했다. 배역은 뭐고, 또 배우는 뭔지. 여로가 하는 말 절반 이상이 공식도 없이 풀어야 하는 문제처럼 느껴진다. 무용한 것 같기도 했다. 거짓된 것을 자아낼 뿐인 연극들은, 그냥 옛 얘기에 불과한 것 아니었던가. 그걸 상기한들,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지?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이해하듯이, 여로는 고개를 조금 숙여 제 눈을 조금 더 편히 들여다보게 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을 무용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사람에게 하는 배려는 꽤 따뜻했다. “다시 한번 해볼까? 아까 얘기했지. 모든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인간은 단지 배우일 뿐이라고. 학교가 무대라면, 너와 나는 모두 학생을 연기하고 있어.” 여로는 나와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는 교복에 그려진 학교 마크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만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배우’라는 걸 모르고 있어. 안다고 하더라도 이미 배역에 너무 몰입되어 있어서,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매우 힘든 일이지. 하지만 너는 그 순간, 널 좀먹던 그 배역에서 빠져나온 거야. 배역이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으로 상황을 본 거지.” 꽤 긴 설명이 가슴에 들어오면서, 잔상처럼 둥둥 떠돌았다. 긴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말을 반쯤은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왠지 심장이 두근거렸다. 스스로 반항아라고 여기다가, 현실과의 그 괴리에서 고통스러워하다가, 처음으로 같은 누군가에게 이해받은 기분. 그러나 미숙한 그 감정을 언어로 정립하기는 불가능했다. 그저 느낀 그대로를 겨우 입 밖으로 뱉을 수 있을 뿐이었다. 고동은 쉽사리 멎지 않는다. 생각한 것을 그대로 내뱉는 것에도 꽤 큰 용기가 필요했다.
“… 솔직히 잘 이해는 안 가. 내가 배우라는 말도 뭔지 모르겠고, 그게 한결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지금 바로 이해할 필요는 없어. 그러라고 종용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여로가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깊고 깊은 해원(海原). 가까이서 보니 알 수 있었다. 여로의 눈동자의 비친 푸르름은 표면의 색만이 아니라, 도달할 수 없는 심해만큼 깊고 넓었다. “여명아. 나한테 적응하도록 도와준다고 했지.” “….” “그럼 난 적응하지 않는 법을 보여줄게."
그럼 보일 거야. 배우라는 인간인 네가. 여로가 나직이 덧붙였다. 솔직히 얘기하자면, 잘… 모르겠다. 설명한 감정들 하며, 낯선 언어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저 여전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떤 것에 의한 두근거림인지조차 알 수 없다. 다만 그때는 머리가 아프지 않았고, 긴장되지 않았고, 알 수 없는 불안이 시야를 흐리지도 않았다. … 단지 그것으로도, 여로의 호의를 받아들일 가치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더라도, 그냥 그 세계 안에 발을 들여보고 싶었다. 그 깊은 심해를 탐구해 보고 싶었다. 근원 모를 말들이 이해되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움트고 있었다.
“가끔 같이 나올래? 날이 좋을 때.” 여로가 나직하게, 아니, 다정하게 말했다. 이성은 이 미친 제안을 수락하지 말라고 소리쳤으나, 나는 홀린 듯이,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➁ 산딸기 콩포트 한 스푼 (1)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