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김재인 작가의「반항의 향」
“이류야!” 쾌활한 목소리에 부합하는 미소를 띤 여자아이가 나를 부른다. 낡은 선풍기 소리가 덜그럭거리며 소음을 만들어 낸다. 여자아이는 서화의 악보 묶음을 손에 꼭 쥐고서 나를 바라본다. “서화가 알면 화내지 않을까? 조심히 다뤄.” “응. 나, 나. 궁금한 거.” 저 아이의 세상에는 궁금한 게 뭐가 그리 많은지. 궁금한 건 아무나 붙잡아 질문하는 아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귀찮았다. 나는 딱히 궁금한 일도, 풍부한 상상력도 없었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말해보라는 뜻으로 몸을 기울이자, 여자아이가 악보를 보여주며 물었다. “왜 얘는 시들었어?” “시들었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아이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낮은 음자리표였다.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음자리표가 시들었다는 말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번 더 되물었다. “그림이 어떻게 시들어?” “아니, 봐봐. 얘는 꼿꼿이 서 있잖아.” 높은 음자리표로 시선이 향했다. 아, 생김새가 마치 시든 식물 같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다시 보니 낮은 음자리표는 높은 음자리표에 반해 힘없이 처진 느낌이었다. “이해했어. 근데, 이건 낮은 음자리표야. 서화가 설명해 줬거든. 시든 게 아니야.” 여자아이는 ‘낮은 음자리표’라고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더니 몽당연필과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수첩에는 중간중간 아무것도 쓰지 않고 건너뛴 쪽이 존재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저렇게 사용하면 비효율적인데. 여자아이는 깨끗한 페이지를 열어 낮은 음자리표를 따라 그렸다. 나는 그 행동을 조용히 지켜볼 뿐이었다.
‘시들어 버린 비운의 음표!’
삐뚤빼뚤한 그림 아래 쓰인 문장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설명해 줘도 별 소용이 없었다. “비운의? 비운이 뭐야.” “얼마 전에 사전에서 배웠어! 불쌍한 운명, 그런 거래.” 여자아이가 주머니에서 작은 단어사전을 꺼내 들어 자랑하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선휘연!” 서화가 어딘가 짜증 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서화가 휘연이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말을 쏟아냈다. “내가 악보 가져가지 말랬지! 한참 찾았잖아. 낙서한 거 아니지?” “안 해! 배서화. 이거 시든 거 같지 않아? 진짜 시든 음표야.” “음표가 뭐가 시들어! 그리고 네가 그린 건 음자리표거든?” 서화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한숨을 내쉬고 휘연이의 의견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언제 불평했냐는 듯이 서화가 크게 웃었다. “바보.” “뭐!” 휘연이가 소리치며 부정했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 바보 같았는데 말이지.
오후에는 선생님과 산책하러 갔다. 해가 지는 무렵에 너절한 거리를 걷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날 선생님은 내게 막대사탕 하나를 쥐여주셨다. 먹고 난 후에는 양치를 잘해야 한다고 당부하던 목소리가 생생하다. “이류는 크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아픈 다리를 감추고 걷던 내게 선생님이 물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냐는 말이 어려웠지만, 못 알아들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아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웃을 수 있는 사람이요.” 서화와 휘연이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셋이 웃으면서 놀고 싶었다. 그게 내 진심이었다. 작은 목소리로 내뱉은 문장이 끝난 후에는 한동안 정적만이 감돌았다. 선생님이 무언가 깊은 뜻을 추론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안했던 나는 다급하게 말을 돌렸다. “서화는 커서 기타 치는 사람 될 거래요. 맨날 저한테 악보 보여주면서, 이건 무슨 음표고 플랫이 붙었다고 하나하나 알려줘요. 나는 관심도 없는데.” 갑자기 말문이 트인 내 모습에 선생님이 놀라셨다. 막대사탕이 모조리 녹고 남은 종이 막대를 입에서 빼냈다. “휘연이는 책 쓰고 싶대요. 소설가랬나. 서화가 악보 보여줄 때 걔는 단어사전 자랑해요. 가끔 휘연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제야 선생님이 웃었다. 나답지 않게 말을 쏟아낸 터라 숨이 차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바닥을 보고 걸으며 낙엽을 발로 뭉갰다. “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뒤로 이어진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선생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쌀쌀한 가을바람을 피해 삐걱대는 철문을 열고 보육원의 마당으로 들어섰다.
몇 주 후였나, 아니면 몇 년 뒤였나. 처음으로 그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느덧 9살이 된 우리는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화 도중 휘연이가 내뱉은 단어를 몰랐던 서화와 나는 대충 맞장구쳤다. 우리가 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휘연이가 ‘감정 단어사전’이라 적힌 조그마한 책을 내밀었다. 진정한 선물이었다. 그해 여름, 이모션 사이클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시행되었다. 우리가 보육원에서 감정을 조금씩 배워나갈 때 사회 속 사람들은 이미 감정을 잃었다. 다들 쥐도 새도 모르게 이모션 사이클을 시술한 모양이었다. 9살짜리 꼬맹이들은 뉴스도 보지 않았기에, 갑자기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그들이 들이닥쳤고, 나는 황급히 감정 단어사전을 등 뒤로 숨겼다. 보육원 안에서는 차가운 목소리가 오갔다. 그들은 우리에게 선물을 줄 거라며 서화와 나를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차례가 되면 문을 열고 나오라고 시켰다.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감지하고 서화에게 속삭였다. “선생님 표정이 안 좋았어. 거짓말 같아.” “그랬으면 선생님이 말렸겠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방 밖에는 그들과 휘연이가 있었다. 기분 나쁜 상황에 주춤거리던 도중,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방 문고리를 잡은 순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지 말라는 경고였다. 그 후로 기억이 없다. 오랜 시간 후에 방문을 열고 나가 보았다. 텅 빈 거실 가운데에 휘연이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갔냐고 물어도 졸린 표정을 지은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년 전, 센터에 짐을 풀다가 감정 단어 수첩이 발등에 떨어졌다. 그때가 되어서야 알았다. 휘연이의 이상 행동이 이모션 사이클의 영향이었다는걸. 휘연이는 이모션 사이클의 개념을 잘 이해했다. 시술 효과도 잘 드러났다. 그래, 클록터는 그런 휘연이를 데려가 본인들의 인재로 성장시키고 싶어 했다. 돈과 의식주 지원을 빌미로 휘연이를 채갔다. 이제 나에게는 서화, 서화에게는 나뿐이었다. 셋은 더 이상 셋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기억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늘이 남빛으로 물들었다. 도서관에는 왠지 모르게 비릿한 공기만이 남아 있었다. 계단을 내려와 살펴보아도 방금 사람이 다녀갔다는 사실을 입증할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체취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졌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바닥난 체력을 견디고 꾸역꾸역 기숙사로 돌아왔다. 도서관에서 잠을 청했다가는 위험에 처할 것 같았다. 센터 사람을 피해 내 방으로 들어오기에 성공했다. 다시 한번 세상이 꼴 보기 싫었다. 왜 휘연이가 그딴 기업을 선택했는지, 본질적으로 왜 우리를 버리고 떠난 건지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우리가 있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웠다고 숨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얼른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침대에 누워 흰 백지만을 떠올리려 애써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서러운 마음에 오랫동안 잠을 설쳤다. 나답지 않게 자꾸만 흐느꼈다. 나답지 않은, 그러면 나다운 건 뭔데. 여기서 그런 게 존재하긴 해?
간신히 선잠에 빠졌다가 뒤척이며 깼다. 커튼을 걷자, 아직 달이 빛나고 있었다. 후줄근한 차림으로 센터를 벗어났다. 실내와 실외를 쉼 없이 오갔다. 이렇게 움직여야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편의점에 들어가 탄산음료를 잔뜩 샀다. 낡은 전단지가 덕지덕지 붙은 가로등에 기대어 캔을 땄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냥 맹물이나 하나 살 걸 그랬나. 오늘 내가 망할 도서관에 가지 않았더라면, 외출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적어도 서화와 다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반갑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 그리움을 마주할 필요가 없었다. 거지 같은 배서화. 그 자식 때문에 잠도 설치고 정신 건강이 악화했다. 어느새 내 손에는 비워진 사이다 캔이 들려있었다. 양치를 다시 해야 하겠지. 선생님,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냥 잘게요.
며칠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이모션 사이클에 대응할 첫 번째 구실이 사라지는 상황을 마주하는 것은 착잡한 일이었다. 사람의 감정은 향과 관계가 깊다고 한다. 그래서 조향을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허용되는 건 딱딱하고 반듯한 가공품뿐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 꾸역꾸역 틀에 맞추어 살아간다고 해서 의의가 생기나? 휘연이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불완전하고 어리석은 기억. 그러니까, 추억, 그런 거. 향으로 담은 추억은 클록터가 굳힌 반듯한 틀을 비집고 들어가 휘연이에게 닿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성숙한 사람이 아니라서 전해줄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이게 내 최선이었다. 전해지지 못한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나 변색된 향수를 손에 쥐었다. 차라리 그때 한 발짝 앞으로 나가 눈을 맞출걸. 내가 여기 있다고, 너는 어디에 있냐고. 심한 욕이라도 해서 기억에 남도록 할걸. 걔가 뭐가 그리 그립다고 나름대로 다정을 베풀었을까.
나는 서화를 피했다. 서화도 이 사실을 아는지는 모르겠다. 다행스럽게도 같은 반이 아닌지라 마주칠 일은 드물었다. 일부러 수영부에도 출석하지 않았다. 반 아이들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지만, 들려오는 소문을 통해 서화 또한 수영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화는 나와 함께 보육원을 옮긴 이후 한 부잣집에 입양되었다. 나는 사람을 입양 보낸다는 개념이 불쾌했기에 방구석에 숨어 있었다. 서화의 수영장을 혐오하는 태도는 그 시기에 시작되었다. 우리 둘이 몰래 만날 때면 증세가 나날이 심해져 갔다.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서화는 내가 이유를 물을 때마다 망설이며 침묵했다. 물어서는 안 되는구나, 눈치채고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어느 시점부터 서화가 내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요즘 보육원 생활은 어떠냐고. 나 또한 대답할 수 없었다. 서화가 그렇게 보육원을 떠난 이후로 나는 은근히 미움받고 있었다. 어째서 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보다 두세 살 나이가 많은 언니들의 시선이 따가웠다. 지금 생각하면 하찮고 웃기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주제에 애를 괴롭히기나 하고. 허구한 날 단체 채팅방에 초대해 폭언을 일삼았고, 선생님이 볼 수 없는 부위를 여러 물건으로 구타했다. 그중 한 사람의 실수에 의해 내 얼굴에 상처가 생겨 선생님이 알아차린 이후로 구타는 멈추었다. 하지만 멈춘 만큼의 고통은 폭언으로 돌아왔다. 차라리 이모션 사이클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의 성격 덕분에 그 진흙탕 속에서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런데도 서화가 왜 수영부 부장을 맡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나에게 이모션 사이클이 왜 싫냐고 묻는 서화에게 역으로 수영장을 싫어하는 이유를 되물었던 날, 그날이야말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이었나 보다. 갑자기 센터에 수영부가 개설되며 서화는 내게 차장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센터에서 강요하기도 했고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어 수락했다. 그저 취미로 수영장에 출석하는 아이들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대회 출전 같은 거창한 일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센터에서 그런 일을 시켜줄 리도 없었다.
수영장 세 글자에 얽히고설키는 서화의 눈빛, 손의 미세한 떨림. 그로 인해 깨달은 점. 때로는 무언의 흔적이 더욱 깊게 새겨진다. 경험해야만 알 수 있는 오묘한 각인. 그런 게 나를 이끌었다. 색이 바랜 가죽 가방에 짐을 쑤셔 넣었다. 거울에 비친 내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 꽃 장식이 달린 머리끈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묶었다. 침구도 제대로 정리하지 않은 채 방을 나섰다. 센터에서 이십 분 정도 걸으면 옛 시골에나 있을 법한 기차역이 나온다. 노후화된 시설이 지역의 빈부격차를 잘 드러내고 있었다. 잡음이 섞인 안내 방송과 함께 도착한 기차에 올랐다. 서둘러 자리에 앉아 짐을 정리했다. 접이식 책상을 핀 후 눈앞 화면을 누르자 홀로그램이 재생되었다. 과하게 선명한 홀로그램에 어지러움을 느껴 뚜껑을 연 향수병을 놓쳐버렸다. 미색의 거친 종이 위로 얼룩이 퍼져나갔다. 다행히 내용물이 흘렀을 뿐 깨지진 않았다. 옆에 서화가 있었다면 향수병 간수 잘하라고 잔소리를 들었을 거다. 미간을 찌푸리며 공책 위로 화장지를 가져다 대보았다. 오히려 종이의 표면만 상해서 그만두었다. 손에 낡아빠진 공책과 단어사전을 꼭 쥐었다. 이 연약한 묶음은 도전이자 유서였기 때문에, 내 전부였다.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챙겨온 안대를 신경질적으로 내리고 잠을 청했다.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가 몰려와 쉽게 잠들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는다. 눈을 떴을 때는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며 서둘러 도착지에 발을 디뎠다. 심장이 두근거렸지만, 이 두근거림이 설렘과 두려움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랬다.
과거의 사람들은 여름을 낭만의 계절이라고 칭했다. 나는 잘 모르겠다. 푹푹 찌는 더위와 목선을 따라 땀과 함께 엉겨 붙는 머리카락이 뭐가 좋다고. 나이를 먹을 대로 먹었나. 아니면 내가 사회에 적응하고 있는 걸까. 발길이 따르는 대로 움직였다. 붉은 벽돌로 쌓인 담장의 모퉁이를 지나자, 눈앞이 샛노란 색으로 물들었다. 사방이 온통 해바라기였다. 저 많은 해바라기가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이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재개발이 덜 된 지역이기에 가능한 풍경이었다. 이 섬찟한 분위기가 좋았다. 아무도 없는 해바라기 밭으로 달려갔다. 풍성하게 자란 꽃들 사이에 누우니 흙먼지에 옷이 더럽혀졌다. 살랑임과는 거리가 먼 세찬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주위를 구경하는 데에 한 눈이 팔려 앞을 보지 못하고 넘어졌다. 덕분에 상반신까지 더럽혀졌다. 해탈한 순간 크게 울린 스마트폰 알람이 쩌렁쩌렁 울렸다. 손에서 흙을 대충 털고 화면을 눌렀다.
‘어디야?’
내가 밝히지 않은 사실이 있다면, 서화는 그동안 꾸준히 내게 연락을 보내왔다는 점이다. 당연히 나는 답하지 않았다. 마음이 불안해서 못 했다. 마치 외줄 타기를 하는 느낌이었다. 서화의 문자는 나를 외줄에서 떨어트리기 충분했다. 그래, 무서웠다는 말이다. 오늘은 오후에 특별관에 모여 이모션 사이클 이론 수업을 들어야 했다. 예정대로라면 두 시간 전부터 딱딱한 의자에 기대어 지루한 설명을 듣고 있었을 거다. 도망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화는 문자로 나의 안부를 묻거나, 내 생활을 멋대로 추측했다. 하나하나 입력한 텍스트 속에서 서화가 지닌 미안함이 눈에 비쳤다. 괜히 심술이 나서 바로 앞에 보이는 해바라기를 찍어 보내주었다. 사진과 함께 딱 한 마디만 입력했다. 왜 꾸준히 연락했냐고, 잠적하지 않았느냐고.
‘내 부재를 네게 증명하는 꼴이 되잖아. 그게 싫었어. 나쁜 놈 같아서.’
한 단어, 한 글자를 눈동자로 읽어 내릴 때마다 범죄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내 속을 달래주려고 하는지 해님 위로 구름이 드리웠다. 그러고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더위에 파묻혀 숨을 내뱉기도 어려웠던 지난날의 여름이 투정을 부리듯 눈물을 쏟아냈다. 힘없이 내리는 이슬비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온 짧은 부름이 빗줄기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내게 닿았다. ‘으’인지 ‘야’인지 그 사이 어딘가 모호한 음절이 고막에 울렸다. 서서히 젖어가는 앞머리를 넘기고 눈을 또렷이 떴다. 멀지 않은 거리에 서 있는 형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꼴이 추레하네.” 나와 눈을 맞춘 서화가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그래, 저 웃음이, 휘어지는 눈이, 짝짝이로 올라간 입꼬리가, 그리웠다. 확신할 수 있었다. 서화의 미소는 억제된 감정이 아니었다. 이모션 사이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동안 그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빠른 걸음으로 서화에게 다가갔다. 서화의 얼굴을 비롯한 피부 곳곳에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사람 팼냐?” 문장이 평소의 투로 뱉어지지 않았다.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장난스레 말하려 노력했지만 망해버렸다. “조금 싸웠지.” “반항아 같으니라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해바라기 밭을 걸었다. 한없이 많은 노랑을 보았다. 서로에게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삼십 분 정도 어색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걷다 보니 해안가에 도착했다. 힘찬 파도 소리에 조금은 어색함이 떠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서화가 먼저 앉자며 자신의 얇은 셔츠를 모래 위에 깔았다. 셔츠 다 더럽혀지겠는데. 미안함에 주춤거리는 사이 서화는 내 팔을 끌고 풀썩 앉았다. 뿌연 바다가 햇빛을 흡수해 따뜻하게 반짝였다. 도서관에서 보았던 광경이 떠오름과 동시에 눈앞이 일그러지며 울렁였다. 하는 수없이 눈을 꼭 감았다. 서화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그래? 눈부셔?” “나, 선휘연 만났어.” 떨리는 눈동자로 서화를 바라보았다. 내 예상과는 달리 서화의 표정은 평온했다. 마치 선휘연이 누구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얼굴이 급격히 굳어진다거나, 안색이 안 좋아지는 광경을 상상했었다. “너랑 싸운 날에 도서관 갔거든. 버려진 도서관인데, 그런 데가 있어.” 말을 잇기 어려웠다.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클록터 알아? 거기 사람들이 문학 도서 폐기한다고 갑자기 들어왔거든. 그때 선휘연 봤어.” 뒤죽박죽이었다. 내 말이 끝나길 기다린 서화가 입을 뗐다. “알아. 걔, 팀장이야. 능력도 좋지,” 안다고? 팀장은 또 뭐고. 내가 말을 잇기 전에 서화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이모션 사이클 할 생각이었어. 진짜로. 클록터에 잠입해서 어떤 일을 꾸미고 그런 게 아니라. 너한테 서류도 들켰잖아. 그날 우리 센터장이랑 같이 클록터 본사에 갔는데, 선휘연이 있더라. 내가 쓴 서류를 손에 쥔 채 뻔뻔하게 내 앞에 앉아서. 정도 없지, 아는 체도 안 해. 회사에서 얼마나 굴리는지 다크서클이 엄청 심했어. 서럽더라고. 내가 보육원 시절 이야기를 꺼내봐도 어림도 없었어. 근데 봤거든. 내가 예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눈동자가 조금씩 흔들리는 거. 까먹은 게 아니라 모른 체하는 거야. 직원들은 얼른 서명이나 하라고 재촉하더라. 아, 뭐랄까. 네가 그 공기를 맛봤어야 해. 거지 같아서 숨도 안 쉬어지는 그 방 안에 있는 게 힘들더라고. 그냥…. 뒤집어엎고 나왔어. 옆에 있던 남자들 힘도 더럽게 세더라.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는데. 차마 선휘연은 못 때렸어. 애가 너무 삐쩍 마르고 쇠약해 보여서. 우린 아직 불완전한 인간이잖아? 미련 남은 거지. 괘씸하긴.” 서화가 제 팔에 있는 멍을 보면서 웃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인정할 수 있었다. 선휘연이 클록터에 있다는 것. 다시 흥분하지 않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호흡했다. 이제는 외면할 수 없었다. “너는 괜찮은 거고?” “솔직히 불안하기는 해. 내가 난리 친 거 센터에서 집에 연락했는지, 나한테 어떤 처벌을 내릴지 아무것도 몰라. 불행 중 다행인 게,” 네가 여기 있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서화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정말 나만 있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거짓말. 훗날 내가 너에게 저주를 건다면, 아마 불명료한 내 확신을 평생 안고 살라는 걸 거야. 나는 너와 다르게 유치해서 멋대로 판단한 감정을 항상 지니고 살거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을 삼키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몸이 흔들리자, 서화가 어깨를 내주었다. 진작에 전부 말할걸.
“돌아가야지. 이대로 밤샐 수 없으니까.” 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센터 때문에 호되게 당해놓고도 다시 돌아가자고 말하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하는 수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역시나 깔고 앉은 서화의 셔츠에는 모래가 잔뜩 묻어버렸다. 그 밑으로 조개껍데기가 보였다. 별로 예쁘지는 않았다. 조그마한 크기에 곳곳이 부서져 앙상했다. 내가 조개껍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서화가 아무 말 없이 주워 주었다.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어 기차에서 내용물이 쏟아졌던 향수 공병에 집어넣었다.
역까지 돌아가는 동안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클록터 본사는 어떤 모습인지, 폐도서관의 먼지 쌓인 서적은 무엇이 있는지와 같은 재미없는 이야기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서화가 내 몸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었다. 보살핌 받는 느낌에 괜히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기차에 오른 순간부터 우리는 웃음을 감춰야만 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직 우리는 어설프니까, 미완성작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의미가 있었으니까.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③ 모순 (1)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