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주지훈(37)이지만, '그 주지훈 맞아?' 싶을 정도로 '다른' 주지훈이다. 물 만났다, 물 만났다 했더니 헤엄치며 잔재주까지 부리고 있다. '신과함께(김용화 감독)', '공작(윤종빈 감독)'에 이어 '암수살인(김태균 감독)'까지 터뜨렸다. 흥행 타율 100%. 올 한 해만 세 편의 작품을 공개하며 자타공인 흥행보증수표로 거듭났다. '2018년은 주지훈의 해'라는 표현도 더 이상 과장이 아니다.
열심히 일한다고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보상은 아니다. 주지훈 스스로도 "이런 시기가 다시 올까 싶다"며 자기객관화에 여념이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작품마다 매번 다른 얼굴을 보여준 올해의 주지훈은 '배우 주지훈'이 갖춘 매력을 어떻게 해서든 모두 꺼내보려 노력했고, 칭찬받아 마땅한 결과물을 내놨다. 특히 삭발을 감행한 까까머리, 짙은 다크서클조차 감추지 않은 쌩얼, 혹평받기 십상인 부산 사투리까지 '암수살인' 속 주지훈은 '신과함께', '공작'으로 차곡차곡 쌓은 관객들의 믿음을 결코 져버리지 않았다.
'자유'를 핑계로 마음껏 살았던 시절도 있지만 이제는 "책임없는 자유는 방종이다"는 말을 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 성장의 밑바탕엔 주지훈의 귀인들이라 불리는 정우성·하정우·황정민 등 영화계 선배들이 있다. 선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동시에 "나도 곧 마흔이 된다"며 너털웃음을 지어 보인 주지훈은 "요즘 하고 있는 가장 큰 긍정의 고민은 나 역시 선배들처럼 후배들에게 양탄자를 깔아줄 수 있는 선배다운 선배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더 많이 배우며 발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솔직한 속내를 고백했다. - '암수살인'이 범죄극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생각보다 자극적이지 않아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 아닐까 싶다. 그동안의 범죄극을 봐 온 일반 관객들 입장에서는 조금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어떻게 봐 주실지 궁금하다.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아 좋다."
- 밤톨머리 비주얼이 가장 눈에 띄었다. "비주얼적인 표현은 원했던대로 나온 것 같다. 시나리오에는 '감옥에 들어간 후 짧은 헤어'라고만 쓰여져 있었지 '삭발'이라고 적시돼 있지는 않았다. 내가 먼저 '아예 다 밀어버리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는데, 감독님과 PD님도 사실은 삭발을 원했다고 하더라. 배우에게 강요가 될까봐 이야기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웃음) 노메이크업도 감옥에 갇혀 있는 수감자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도움이 된 것 같다."
- 다크서클은 오히려 분장인 줄 알았다. "내가 다크서클이 좀 심하다. 하하. 사람이 그런 옷 입고 머리까지 빡빡 깎고 있으니까 실제로 기분이 좀 다운되더라. 주변 분위기도 마찬가지고. 다크서클이 더 내려오지 않았나 싶다.(웃음) 혼자 상상을 했다. 처음에는 도망자 신세니까 머리를 기르고 다녔지만, 감옥에 들어간 후에는 강해 보이기 위해 센 비주얼을 선호하지 않을까. 머리 감고 말리는 것도 선호하지 않았을 것 같다. 계속은 아니지만 굉장히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 100% 부산 사투리 대사를 소화했다. "부산 사투리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특유의 정감어림이 있지 않나. '언젠가 꼭 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웃음) 부산 사투리는 누가 쓰면 '어! 이거 부산 사투리!' 할 정도로 익숙하다. 그건 직접 소화해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양날의 검이다. 나처럼 서울 토박이에게도 익숙한데, 직접 사용하시는 분들은 얼마나 잘 캐치해 내겠나. 조금만 잘못해도 감정없이 융단폭격 맞기 딱 좋았다." - 해내야만 하는 가장 큰 미션 아닌가. "현장에 갔는데 나 빼고 스태프들까지 다 부산 출신을 뽑아 놓으셨더라. 딱 미치는 줄 알았다.(웃음) 연기자는 손짓, 발짓, 몸짓, 그리고 대사로 감정을 표현하는 직업인데 그게 핸디캡이 되니까 정말 죽겠더라. 현장에 가기 싫었다. 막상 가면 좋은데 한 발 들이기가 매일 매일 짜증났다. 왜 한여름에도 바닷물은 차갑지 않나. 들어갈 땐 멈칫해도 막상 들어가면 신나게 잘 논다. 그런 느낌이었다." - 스트레스가 심했을 것 같다. "대본에 성조를 한 글자 한 글자 다 그리면서 연습했다. 다섯 단계로. 간혹 현장에서 대사가 바뀌면 또 죽겠더라.(웃음) 후시녹음 분량은 준비도 못했는데 현장에서 갑자기 찍겠다고 하면 망연자실하게 되더라. 감독에서 전화를 거는 첫 장면이 그랬다. 얼마나 중요한 신이냐. 원래는 안 찍는 것이었는데 찍었다. 예습·복습을 왜 철저하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했으면 서울대 갈 수 있었을 것 같다."
- 예습·복습은 어떤 방식으로 했나. "크랭크인 전 사투리 연습을 미친듯이 하면서 전체 분량을 한 번 봐 뒀고, 당일 촬영이 끝나면 자기 전에 다음 날 촬영분을 꼬박꼬박 챙겨 봤다. 그리고 현장에도 한, 두시간씩 꼭 일찍 나가 있었다. 안 그러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겠더라. 두 달 넘게, 하루 8시간동안 사투리만 잡고 살았다. 처음엔 혼자 해 보겠다고 부산 친구와 매일 통화를 하기도 했는데 대사량이 너무 많아 그럴 정신이 없더라. '주어진 걸 완벽하게 하자'는 마음으로 다 끊고 일상 생활에서 툭 건드리면 튀어나올 정도로 연습했다."
- 곽경택 감독에게 직접 배웠다고. "감독님과 성격도 잘 맞는 편이다.(웃음) 확실히 오래된 명감독님들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을 존중해주는 분이다. 뭘 요구할 때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하신다. 사투리도 감독님께서 추천해준 방법이 진짜 잘 맞았다. '아날로그 녹음기 테이프를 이용해 보면 어떻겠냐'고 하시더라. '녹음해 줄테니까 해 보겠냐'고. 난 새로운 무언가를 하는 것에 겁이 없다. 냉큼 '하겠다'고 하고 받았는데 손에 착 감기는 그 맛이 디지털과는 다르더라."
- 클래식한 방식이 좋을 때가 있다. "휴대폰은 내가 원하는 부분을 선택하려면 기계를 봐야하고, 맞춰도 꼭 살짝 빗나가기 마련인데 테이프는 달랐다. 감각만 익히면 됐다. 청담동, 그 비싼 강남 노른자 땅 덩어리 한복판을 네 다섯시간씩 걸어 다니면서 연습했다. 주변 분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게 데시벨을 줄이긴 했는데, 덩치 큰 애가 검정 모자에 마스크까지 쓰고 중얼 중얼 거리는걸 본 분들은 이상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나였다. 하하."
- 후유증은 없었나. "이상하게 또 후유증은 없다. 열심히 했고, 깨끗하게 털어냈다. '암수살인'을 찍고 나서 바로 '킹덤'을 찍었다. 사극 말투로 바로 바꿨다.(웃음) 몇몇 분들은 '경상도 사투리 쓰는 작품은 이제 쉽게 하겠네?'라고 하는데 아니다. 할 때마다 엄청난 고뇌가 필요할 것 같다. 또 하게 될지도 잘 모르겠다. 그만큼 힘들었고, 후회없이 했다. '거슬리지 않았다'는 관객 분들의 말이 제일 안도가 된다. 어쨌든 사투리 평가 시험을 보려고 한건 아니니까. '쏟아부은 시간이 헛되지 않았구나' 싶기도 했다."
- 사실상 취조실에 살았는데. "곽경택 감독님이 '암수살인'의 제작자이자 작가다. 감독님과 각본을 같이 쓰면서 머릿속에 배우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 다 구상해 놓으셨더라. 2~3개월간 사투리를 배우면서 사투리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그 외 여러가지 것들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요즘 고갈된 소재를 뚫고 나가기 위해 영화인들이 많은 노력을 하는데, 그 과정에서 배우들도 점점 더 예민해져야 하고, 디테일해져야 한다. 예능처럼 카메라를 두고 풀어 놓다가 그 다음에 디렉션을 주는 방식은 지난 3년의 경험 안에서는 없었다. 스크린 안에서 배우가 자유롭게 노는 것 처럼 보이는 것도 하나 하나 다 계산돼 있는 행동이다."
- '암수살인'도 마찬가지였고. "취조실 신이 여러 번 등장한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모습이지만 관객이 지루하지 않게 다른 느낌을 줘야 했다. 각도까지 다 계산하고 들어갔다. 더 좋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욕심이다. 때문에 배우들도 열심히 해왔지만, 더 잘 준비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내가 연기한다고 해서 내 것이 아니다. 배우가 '이렇게 바꿔보고 싶다'고 하는건 거의 통하지 않는 시대다. 투자·배급의 선을 넘는 것부터 힘들다. 대본 한 줄 한 줄, 세분화 된 협업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②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