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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223. 2인자

지난 1일, 미국 9.11테러의 주범인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군에 의해 사살됐다. 작전명은 '제로니모 작전 중 사망'. 미국 측 발표에 의하면 그는 비무장상태로 부인과 딸 앞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의 시신은 아라비아 해에 수장됐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사망 당시 사진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유는 너무 끔찍하다는 것. 사망당시 사진도, 시신도, 그의 죽음을 증언할 사람도 없다. 뭔가 미심쩍고 석연치 않은 구석은 많지만 공식적으로 미국도, 탈레반도 그의 사망을 인정한 상태다. 나는 빈 라덴의 사망소식을 접하는 순간 2인자들의 허망한 죽음이 뇌리를 스쳤다.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에르빈 롬멜. 1891년 부유한 독일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아프리카 군단을 이끌며 연전연승했다. 연합국과 아프리카 영국 군대는 롬멜을 두려워하면서도 존경했다. 오죽하면 영국 수상이던 처칠이 의회 공식 연설에서 전쟁과 상관없이 롬멜을 위대한 장군이라 평한다고 했겠는가. 하지만 롬멜은 1944년 히틀러 암살 작전을 공모한 죄로 히틀러가 보낸 게슈타포에 둘러싸여 자살한다. 그가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평소 롬멜이 히틀러에 보낸 충성심은 대단했다. 그런 그가 과연 히틀러를 죽일 생각을 했었을까. 아마도 반대가 아니었나 싶다. 히틀러는 잘 알려진 대로 질투심이 굉장히 강한 인물이었다. 콤플렉스와 시기심·의심 등 인격적 결함이 많았던 그에 비해 롬멜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부유하며 귀족적인 가정환경, 뛰어난 지도력과 실전감각, 최고의 장군이라 평가받는 세계인들의 시선까지. 결국 히틀러는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롬멜을 죽인다. 2차 세계대전이 낳은 위대한 장군 롬멜은 게슈타포가 건넨 청산가리를 먹고 자신의 벤츠 안에서 눈을 감았다. 마치 모든 것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그의 행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했다. 아르헨티나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죽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의사의 길을 걷던 그는 남미여행으로 자신의 진로를 완전히 바꾼다. 혁명의 꿈은 현실이 되어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의 친미독재정권인 바티스타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성공하지만 카스트로가 자신의 동생을 2인자로 내세우자 볼리비아로 떠나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다 볼리비아 정부군에 잡혀 총살된다.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지만 그 역시 체 게바라를 죽게 방치했다는 게 맞다. 충분히 그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카스트로에게 체 게바라는 히틀러에게 롬멜과도 같은 언젠가 없애야할 빛나는 2인자였던 것이다. 나의 부친인 차일혁 총경은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중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했다. 박헌영과 더불어 2인자였던 그의 죽음에 북측은 어떠한 군사적 도움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이현상은 북의 애국렬사능에 제1호로 묻혔으며 그의 가족들은 중앙공산당 핵심직을 맡고 있다. 역사는 2인자들의 최후에 침묵한다. 나는 빈 라덴이 실질적인 1인자가 아니었음에 씁쓸했다. 잘난 2인자는 결국 1인자에게 죽는다. 탈레반의 실질적 리더는 아직 살아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5.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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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224. 후암동의 추억

지난 초파일엔 반가운 얼굴이 많았다. 특히 25년 전 후암동 첫 법회 때 멤버들이 찾아왔다. 법회가 모두 끝난 뒤 나는 그분들과 보이차를 마시며 즐거운 담소를 나눴다. 마치 고교동창을 만난 듯 옛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때 보살님께서 남편이 이사가 되는 게 소원이라고 했죠?" A보살은 남편의 승진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 남편이 상고를 졸업해 모대기업 과장으로 있는데 이사까지만 승진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랬죠, 저희 남편이 학벌 때문에 이사가 되기 힘들다고 했거든요." 이후 A씨 남편은 이사는 물론이고 상무까지 진급한 뒤 정년퇴직했다. 그녀는 바라던 소원은 다 이뤘다며 수줍게 웃었다. 그녀 옆엔 B씨가 앉아 있었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부친이 명문법대 학장을 지내신 B씨는 잃어버린 혈육을 찾기 위해 구명시식을 올렸었다. 그러나 눈병이 있는 사람이 나타나 내눈을 가리며 "찾지 말아달라"고 하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C씨의 기억도 선명하다. 구명시식을 올리자 수십 명의 가족 영가들이 모두 머리에 하얀 보자기를 쓰고 나타났다. "영가님들이 머리에 하얀 보자기를 쓰고 계시는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그러자 C씨는 "저희 집안은 할머니 때부터 천주교를 믿어왔어요. 그래서 하얀 보자기를 쓰셨나봅니다." 아무리 법당에서 올리는 구명시식이라도 천주교 신자 영가님들은 미사포를 잊지 않았다. 무남독녀 외동딸로 자라 부친과 인연이 깊었던 D씨. 당시 70세였던 부친이 늑막염으로 모대학병원에 입원한 뒤 나를 찾아왔다. 노환이라 걱정은 되도 깊은 병이 아니니 금방 회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첫 마디는 가혹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반문했다. "저희 아버지는 늑막염입니다. 큰 병도 아닌데 왜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나요?" 착잡했다. 병원의 오진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유명 대학병원이라도 실수는 있는 법. "부친은 늑막염이 아니라 폐암 말기십니다. 두 달 정도 남았으니 잘해드리세요." 처음엔 부친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D씨는 내 말을 들은 뒤 최선을 다해 부친을 모셨다. 부친은 2달 후 세상을 뜨셨다. E씨 부부 아들에겐 지방대학교를 가라고 했다. 지방대에 갈 정도로 나쁜 성적은 아니었지만 딱 잘라 지방대에 보내라고 했다. "처음엔 눈앞이 깜깜했죠. 그런데 저희 아들이 지방대에 가더니 더 공부를 열심히 외국으로 유학 가서 석박사까지 모두 마쳤습니다." 지금 D씨 아들은 미국에서 가정을 꾸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후암동 시절, 그 때는 영적으로 기이한 현상이 참 많았다. 구명시식 도중 나도 모르게 공중으로 붕 떠올라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고 영가에게 올린 쌀알이 마치 시계추처럼 딱 한 알씩만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어떤 보살님은 내가 절을 너무 많이 시켜 무릎에 병을 얻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제가 그렇게 절 한 덕분에 우리 아들 좌골신경통이 다 나아 기적적으로 군대까지 갔다 왔습니다." 후암동을 떠난 지 25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후암'이라는 이름을 쓴다. 그때의 인연은 대부분 떠나갔지만 두터울 후(厚)에 바위 암(巖)이라는 뜻처럼 이곳을 두텁게 지키는 분들이 있기에 잠실에서도, 뉴욕에서도, 대학로에서도 후암선원은 영원할 것이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5.2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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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222. 4.3사건 구명시식

천석꾼은 천 가지를 걱정하고 만석꾼은 만 가지를 걱정한다. 노숙자는 오늘만 걱정하지만 부자는 주식도 걱정이고 세금도 걱정이다. 다른 사람은 자기 영혼 하나만 걱정이지만 나 같은 사람은 내 영혼뿐 아니라 다른 사람 영혼들까지 걱정해줘야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구명시식을 피한 적은 없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피하고 싶은 구명시식도 있다. 만25년 동안 이상하게 하지 못했던 구명시식이 있다. 바로 제주도 4.3사건 구명시식이다. 강제 징용 피해자 영가들, 빨치산 영가들, 6.25전쟁 때 참혹하게 죽은 민간인 영가들까지 억울하게 돌아가신 수많은 영가들을 구명시식했지만 제주도 4.3사건 피해자 영가 구명시식만큼은 몇 번을 보류했는지 모른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주도 4.3사건 피해자 영가처럼 한 맺힌 영가들을 본 적이 없었다. 4.3사건은 10.19 여수사건을 촉발한 사건으로 해방정국 좌우익의 극명한 대립을 보여줬으며 더 나아가 6.25전쟁의 시발점이 됐던 참혹한 사건이었다. 그래서일까. 4.3사건 피해자 영가들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건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정다운 우리네 이웃이었으며, 동네 형이었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였다. 그런 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하루아침에 대나무 죽창에, 총탄에, 농기구에 맞아 유명을 달리했으니 한 또한 매우 깊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제주도 분들과 인연을 맺어왔다. 그러나 4.3사건 피해자 영가들을 위한 구명시식만큼은 자꾸 미뤄졌다. 얼마 전 제주도에서 올라온 부부가 구명시식을 청했다. 단순히 가족령을 위한 구명시식이라 생각했는데 구명시식 전날 영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다름 아닌 4.3사건 피해자 영가가 아닌가. 이제와 구명시식을 못하겠다고 할 수 없고 정말 난감했다. 그런데 구명시식 당일 때마침 낙뢰에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쾌재였다. 이대로 쭉 비가 내려 제주도발 김포행 비행기가 안뜨길 바랬다. '만약 비행기가 뜨면 4.3사건 구명시식을 하라는 하늘의 뜻이요, 비행기가 안 뜨면 구명시식을 접자.' 그때였다. '따르릉.' 제주도 부부의 전화였다. "법사님, 기적적으로 비행기가 딱 한 대 뜬답니다. 서울에서 뵙겠습니다." 순간 나는 하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25년 구명시식 역사상 최초로 올리는 제주도 4.3사건 구명시식이었다. 그날 밤, 기상 관측 이래 두 번째로 많은 번개가 쳤다고 한다. 여름이 아닌 봄에 무려 4만 9000번 이상의 번개가 관측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을까. 제주도 4.3사건의 내막이 구명시식을 통해 밝혀졌지만 영원한 비밀로 함구됐다. 하늘은 낙뢰와 함께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다. 제주도 4.3사건 구명시식을 드디어 하게 된 것은 좌우익 대립의 종말을 의미했다. 그 말인즉, 우리에게 통일이 머지않았다는 뜻. 몽고와 제주도는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모이면 갈라지고, 갈라지면 다시 모인다. 제주 4.3사건이 발생한지 한 갑자가 넘었다. 이제 다시 돌아와 모일 때가 아닌가 싶다. 선친 차일혁 총경이 작사한 '학도병가' 중 '해도 하나 달도 하나 사랑도 하나/나라 위해 바친 목숨 그도 하나이건만/하물며 조국이 둘이 있을까보냐/길이 막혀 못가나 산이 높아 못가나/백두에서 한라까지 강물은 흐르네'라는 가사가 있다. 이번 구명시식으로 이 가사가 곧 현실이 되는 큰 이벤트가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5.16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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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219. 시한부 선고

"말기암입니다." 의사로부터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 가족들의 선택은 둘로 나뉜다. 환자에게 사실을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 미국 임상의들은 반드시 말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여긴다. 환자에게 죽음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그렇지 않다. 아직도 가족들이 환자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삶의 희망을 꺾고 싶지 않아서다. J씨는 돌아가신 아버지에게 한 거짓말이 늘 마음에 걸렸다. 평생을 예술가로 살아온 아버지가 시한부 말기암 판정을 받으셨지만 J씨는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빨리 나으실 거예요"라고 위안을 드렸다. 그는 구명시식으로 아버지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구명시식을 하기 전까지 그는 반신반의했다. 과연 구명시식에 아버지 영가가 나타날까. 구명시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죄를 올린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었다. 그런데 구명시식을 시작하자마자 J씨는 아버지 영가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생전 아버지 말투 그대로였다. "내게 거짓말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나는 심약한 사람이라 네가 거짓말을 안했다면 암에 대한 공포로 6개월도 못 살았을 것이다. 네 덕분에 평온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J씨는 그대로 눈물을 흘렸다. 부친은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던 자식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 무렵에는 나도 얼마 못 살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네 말을 들으면 마음의 위안이 됐다." 나는 평소 시한부 환자들에게 반드시 남은 시간을 말해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J씨 부친의 구명시식을 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에 따라 원칙도 바뀌어야 한다. 아무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해도 시한부 선고는 사람을 봐가면서 말해줘야 한다. 죽음에 통달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평소 심성이나 종교·생각 등을 고려해서 판단해야 한다. '1+1'이 꼭 '2'가 되란 법은 없듯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고 그대로 환자에게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시한부 선고는 사형수와 같다. 사형수도 사형당일에는 '사형한다'고 말하지 않고 '면회왔다'고 말하고는 끌고 간다. 그러면 열이면 열, 오늘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사형장 문 앞에서도 '정말 면회 온 것일 수도 있어'라며 스스로 위안을 찾는다고. 과거 총살로 사형을 집행할 시절에는 집행관 8명 중 한명에게는 공포탄이 지급됐다. 집행관들은 방아쇠를 당기면서도 자신의 총에는 실탄이 들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죽음과 가까이 지내는 그들이었지만 죽음에 초연하기란 그만큼 쉽지 않다. 새우깡을 먹었다고 새우를 먹은 것은 아니다. 죽어보지 않으면 죽음에 대해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죽음은 매뉴얼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론적으로는 남은 시간을 말해줘야 하지만 우리 정서상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 J씨 부친처럼 환자의 아름다운 최후를 위해서라면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하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5.0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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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대연각 호텔

사람의 사주팔자는 진짜 맞는 것일까. 주역의 64괘에는 철학이 있다. 제일 좋은 괘가 나와도 나중에 나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잊지 않고, 제일 나쁜 괘가 나와도 훗날 좋아질 테니 희망을 놓지 말라는 말이 나온다. 좋든 나쁘든 사주는 변하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저희 아버지께서는 사주를 피하지 못해 돌아가셨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한 구명시식을 청했다. 아버지는 과거 대연각호텔에서 바람을 피우다 어머니께 들켜 끌려나왔는데 그 직후 호텔에서 화재가 나 무려 165명이 사망했다. 이후 아버지가 어머니께 고마워하여 한동안 여자를 안 만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몇 년 후 대왕코너 화재사건으로 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셨다. 첫 번째 기적은 있어도 두 번째 기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화재로 돌아가실 팔자였나 봅니다." 부친은 평소 자신은 대연각호텔 화재사건때도 죽지 않은 사람이니 앞으로도 죽을 일이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하셨다고 한다. 그런 아버지가 대왕코너 화재사건으로 돌아가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당신 아버지는 화재로 돌아가실 사주가 아니었습니다." 구명시식을 해보니 그는 화재로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조심해야할 것은 화재가 아니라 바로 여자였다. 애초에 여자를 만나 바람을 피우지만 않았더라도 대연각호텔에 갈 일도, 대왕코너에 갈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인생의 낙이 여자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늘 바람을 피웠다. 하늘은 이미 대연각호텔 사건으로 미래의 죽음을 경고해줬건만 아버지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여자를 만나다 그만 큰 화를 당하고 말았다. 대연각 호텔 사건 이후로 조심만 했어도 평온하게 살다 돌아가실 팔자였다. 사람이 자신의 업장을 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은 손가락을 끊고도 도박을 한다. 마약을 끊었다는 사람도 언젠가는 반드시 마약을 하게 되어 있다. 인간은 '내가 왜 이러지' 자책하면서도 항상 자신이 지은 업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 특히 많은 남자가 여자 때문에 큰 실수를 한다. 여자를 끊는다는 것은 참 어렵다. 김유신 장군처럼 천관녀 집 앞에 멈춰선 애마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릴 수 있는 남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업장을 무섭게 끊는 사람은 크게 성공하거나 큰 화를 면할 수 있다. "사주란 장점보다 단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약 여자를 조심하라는 경고만 귀담아 들었어도 아버지는 화재로 돌아가시지 않았을 겁니다." 아들은 아버지 인생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내가 보기에 아버지는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더 큰 행복을 좇다 제 명을 다하지 못했다. 사람 팔자에 두 번씩 죽어야할 사람은 없다. 천운으로 죽을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면 하루빨리 자신의 단점을 고쳐야 한다. 하늘은 절대 두 번 구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반드시 불행한 삶이라고 볼 수 없다. 몇 년 연장시킨 수명과 그 사이 잠깐이나마 느꼈던 그 심정은 그분의 영혼을 약간이나마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한 자의 차이는 간단하다고 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행복하게 여기는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만 보고 불행으로 여기는 사람은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인생의 행·불행은 멀리 있지 않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2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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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인생의 스승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8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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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인생의 스승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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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인생의 스승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사건이 나던 날이었다. 20대 초반의 나이, 꿈이었던 군인도 경찰도 되지 못한 나는 학교를 그만둔 지 3년만에 다시 건국대 야간대학에 들어가게 됐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학교 1학년이라니. 나는 답답한 마음에 종로의 유명한 관상가인 B씨를 찾아갔다. 딱지처럼 생긴 순번표를 받고 반나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B씨 앞에 앉게 됐지만 그는 나를 보자마자 "볼 것도 없으니 그냥 가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누군가 B씨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는 반신에 풍을 맞았는지 얼굴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다. "너 혹시 차총경 아들 차길진 아니니?" 너무 반가웠다. 그분은 이승만 대통령의 인사비서실장직을 지낸 차 선생님이었다. 아버지와 성이 같아 형제처럼 지내셨고, 나도 아버지를 따라 경무대에 있는 차 선생님 댁에 몇 번 다녀오곤 했다. "얘는 내가 잘 아는 분의 아드님이오. 다시 좀 봐주시오." 차 선생님의 말에 B씨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종교의 길을 가던지 아니면 나와 같은 길을 갈 것이오. 어쩌면 나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소." 말도 안됐다. 야간대학 입학을 앞두고 있는 내게 종교가 아니면 관상을 보라니.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지만 그 후로도 차 선생님과의 인연은 계속됐다. 선생님은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몸에 풍이 오는 바람에 잠시 쉬며 B씨 일을 돕고 있었다. 이미 침술의 명인으로 사주와 관상에도 높은 경지에 올랐던 선생님은 내 사주를 보시고는 "길진아, 너는 사주는 좋지만 눈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 네 눈은 단명상이지만 그것을 면하려면 종교 계통의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종교계통의 일만은 정말 하기 싫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폐결핵으로 시한부판정을 받고 다시 차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연신 피를 토하며 기침하는 나를 보면서도 "너는 죽을 사람이 아니다. 사주는 절대 못 속인다. 큰 일을 할 사람이니 기운 내라"며 어깨를 때려주셨다. 그 말에 힘을 얻은 나는 죽기살기로 건강을 회복해 결국 종교인의 운명을 받아들이게 됐다. 얼마 전 차 선생님이 94세 생신을 맞으셨다. 나는 기쁜 마음에 인편으로 용돈을 챙겨 드렸다.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네게 용돈도 받고 참 기쁘다"며 건강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은 "길진아, 내가 소원이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마치 오랫동안 생각해놓으셨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여셨다. "죽을 때 말이야, 자는 듯이 갔으면 좋겠다. 길진아, 네겐 그런 능력이 있지?" 나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선생님의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걱정 마세요. 꼭 그렇게 해드릴께요."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소원대로 자는 듯이 돌아가셨다. 선생은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부는 직업을 가르쳐주며, 스승은 인생을 가르쳐준다고 했다. 비록 구명시식으로 영결식장에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차 선생님은 내 인생의 큰 스승이셨다. "선생님, 제가 장지에 못가도 이해해주시겠죠? 부디 못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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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야구의 역사

야구시즌이 돌아왔다. 올해는 한국프로야구 30주년이 되는 해로 매우 특별하다. 일본대지진과 방사능유출에도 불구하고 야구장은 연일 매진사례다. 한국인의 야구사랑도 이제 못 말릴 정도가 됐다. 나는 올해도 야구 구단주 대행이 됐다. 홀가분하게 순수한 야구팬으로 돌아가려했지만 뜻대로 되진 못했다. 아무래도 나와 야구의 인연은 생각보다 끈질긴 모양이다. 내가 처음 야구와 인연을 맺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다. 야구장도 없었던 시절. 지금은 철거된 동대문운동장에선 육상과 축구 정도만 할 수 있었다.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경기장은 대변신을 했다. 육상 때 쓰는 허들로 대충 야구장 모양을 만든 뒤 넘어가면 홈런이라며 좋아했다. 동대문 근방에 살던 나는 야구경기를 빼놓지 않고 관람했다. 그 시절 잊을 수 없는 경기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봤던 고교야구 결승전 경기다. 경남의 명문팀과 인천의 명문팀이 박빙의 승부를 벌이고 있었다. 경기만큼이나 관중석도 흥미진진했다. 팽팽한 경기로 손에 땀을 쥐며 응원하는데 누군가 운 좋게 홈런볼을 잡았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기에 나도 그 장면을 똑똑히 목격했다. “내가 공을 잡았다! 홈런볼을 잡았다!” 그때였다. “어, 이 사람이 지금 뭐하는 거야!” 홈런볼 주인공은 갑자기 돌변해 한 남자의 멱살을 붙잡았다. 알고 보니 하필 홈런볼을 잡는 순간 소매치기가 그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훔치다 딱 걸리고 만 것. 당시 만년필은 부의 상징이었고 꽤 비싼 물건이라 상황은 심각해졌다. 단번에 경찰이 들려오고 그 자리에서 수갑이 채워졌다. 관중들도 구름처럼 몰려와 소매치기를 보느라 몸싸움이 벌어졌고 이때다 싶었는지 아이스케키 장수까지 나타나 불티나게 아이스케키를 팔아치웠다. 관중석은 난장판이었지만 경기는 살얼음판이 따로 없었다. 경남과 인천의 자존심이 걸린 명승부였지만 승리는 인천에게 돌아갔다. 9회 말 인천의 승리가 확정되자 인천 쪽 벤치에서 선수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그라운드로 달려 나왔다. “와!” 환호성은 요란했다. 관중들은 모두 인천팀의 승리를 축하했다. 하지만 나의 눈은 인천 선수들이 아닌 그라운드에 우두커니 서 있던 경남의 한 선수에게로 향했다. 그는 처음엔 약간 훌쩍이더니 이내 폭포수 같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최선을 다해 싸운 고교선수의 눈물을 보고 있노라니 나까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날 이후 고교야구하면 으레 그 선수의 눈물부터 떠올랐다. 과연 그는 어떤 선수가 됐을까. 눈물을 흘릴 만큼 승부욕이 강했던 선수는 고교졸업 후 모 실업야구팀에서 선수생활을 하다 조용히 은퇴했다고 한다. 지금쯤 돌아가셨거나 초로의 노인이 되었을 그 선수. 올해로 3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프로야구의 힘은 바로 그때의 고교야구선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내가 구단주대행으로 있는 팀 경기에 그분들을 꼭 모시고 싶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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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의 미스터리Q] 212.명인

어떤 분야에서 이름과 명성을 떨치는 사람들을 우리는 '명인(名人)'이라고 한다. 명인들의 특징이 있다면 굳이 사인이나 낙관을 찍지 않아도 한 눈에 자신의 작품을 알아본다. 비단 예술작품 뿐 아니라 의학·공학·문학 등 모든 분야에 해당된다. 얼마 전 일이다. 척추디스크가 심해져 병원에 갔다. 담당의는 척추디스크로는 명의로 소문난 의사. 그는 내 수술부위를 살피더니 단번에 "A의사에게 수술을 받으셨었네요"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다보면 그 정도는 다 압니다"라며 겸연쩍게 웃었다. 아무래도 환자들을 명의를 쫓아다니는 경향이 있고 그러다보니 그 분야에서 유명하다는 의사들 솜씨는 꿰맨 자국만 봐도 알아맞힌다고.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경상도 진주에서 온 B씨는 오빠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법사님, 제가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 오빠를 죽게 만들었어요." 사연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B씨는 중환자인 오빠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큰 대학병원으로 오빠를 옮길 수 있게 됐다. 진주에서 서울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더군다나 오빠가 중환인 상태에서 이송중 병세가 더 악화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B씨는 포기할 수 없었다. 오빠를 이송하기 위해 구급차가 동원됐다. 모두 오빠를 살릴 수 있게 됐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이송 당일 구급차는 그만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차에 타고 있던 오빠는 물론이고 간호사·조카까지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제가 죽인 겁니다. 오빠를 서울로 옮기지만 않았어도 사고를 당하진 않았을거에요." 그때 구명시식에 나타났던 간호사·조카 영가를 잊을 수 없다. 젊은 나이에 꿈도 이루지 못하고 요절했으니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 그런데 얼마 전 대학로 법당에 구급차에서 환자를 이송하다 죽은 언니를 위해 구명시식을 올리고 싶다면서 찾아온 분이 있었다. 나는 단번에 과거 구명시식을 올려줬던 간호사 영가가 떠올랐다. "혹시 돌아가신 분 성함이 OOO씨 아닙니까?"라고 묻자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우리 언니를 어떻게 아세요?" 물론 그들은 이미 내가 언니의 구명시식을 올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구명시식에서 만난 간호사 영가는 구면이었다. 사고 당시 입었던 간호사복을 그대로 입고 나타난 그녀는 죽은 뒤에도 직업정신이 투철했다. 사고로 죽은 것은 억울하지만 환자를 간호하다 목숨을 잃었기에 간호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 후암선원에는 내가 중신해준 커플들의 2세 소식이 분주하다. 임신과 출산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들을 보니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나는 간호사 영가에게도 좋은 짝을 찾아줄 생각이다. 비록 영계에서 2세는 낳을 수 없지만 환생해 다시금 부부의 인연을 맺을 수 있는 멋진 총각영가와 소박한 영혼결혼식을 올려드리고 싶다. (hooam.com/ 인터넷신문 whoim.kr) 2011.04.11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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