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보호받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아무리 경력이 쌓여도 밥줄은 책임자에 의해 결정됩니다.”
지상파 방송사에서 예능 작가로 근무했던 박모씨는 방송업계의 근무 환경에 대해 “각자도생”이라며 “수직관계도 심하고 서로 경쟁하는 구조로 마음 붙일 곳도 없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문제를 제기했다간 자신만 이상해지고 이미지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갈 수 있다”고 떠올렸다.
MBC 기상캐스터 고(故) 오요안나의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방송사의 고질적인 비정규직 고용 구조가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2021년 5월 프리랜서 기상캐스터로 MBC에 입사한 오요안나는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이후 동료 4명의 괴롭힘에 시달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방송업계 종사자들은 오요안나 사건이 불안전한 고용 형태와 열악한 처우 속에서 살아남으려 무한 경쟁하는 구조에서 벌어진 비극이라고 입을 모은다. 방송사는 많은 직군의 인력들이 프로그램별로 계약을 맺는 구조다. 실제 오요안나가 속했던 MBC 외 KBS, SBS 등 지상파 3사에서 근무하는 기상캐스터는 모두 프리랜서 신분이다. 리포터, 작가 등은 대부분 프리랜서일 뿐더러 경우에 따라 아나운서와 PD 등도 정규직이 아닌 프리랜서 또는 비정규직으로 방송사와 계약을 맺는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20년 12월 발표한 방송사 비정규직과 프리랜서 실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방송산업 노동자 1만 6676명 중 비정규직·프리랜서 등은 6999명으로 전체의 42%에 달한다.
그렇다보니 방송사에서 계속 일을 해나가려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감수하고 문제 제기를 하기 어려운 분위기라는 게 많은 비정규직, 프리랜서 방송 종사자들의 설명이다.
박씨는 “프로그램 끝날 때쯤 메인 PD가 메인 작가를 불러 ‘다음에는 이런 프로그램 개발 중인데 같이 하자’라는 식으로 연명하는 구조다. 아나운서나 기상캐스터도 마찬가지”라며 “프로그램을 계속 맡기 위해 자신의 역량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책임자의 마음에 들지 않아 하루아침에 물갈이되는 경우도 많다. 방송국 안에는 이렇게 자리가 위태로운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부연했다.
프리랜서 PD로 6년째 일하고 있는 이모씨는 “설령 힘들어서 회사를 나오려고 마음먹고 다른 일을 구해도 방송계는 대부분 평판 조회를 하고 소문이 돌아 그만 두는 것도 쉽지 않다”며 “그만 두는 과정에서 잡음이 생겨 다음 일을 할 수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여럿 봤다. 이런 곳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호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전했다.
이런 구조 속에서 비정규직 방송업계 종사자들은 근로기준법 등 노동 관련 보호 법령의 사각지대에 놓인다. 기상캐스터는 정규직인 지상파 방송사 아나운서들과는 달리 프리랜서로 직업 안정성이 적다보니 을끼리 경쟁이 더욱 치열한 구조일 수밖에 없다는 게 방송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또한 직장 내 괴롭힘 문제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일 경우에만 적용되며 프리랜서의 경우 적용되지 않기에, 고 오요안나를 비롯해 프리랜서 방송 종사자들은 사실상 회사의 지시와 감독을 받으면서도 적법한 보호는 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는 셈이다.
때문에 프리랜서-비정규직 방송업계 종사자들은 고용 환경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비정규직 방송 노동자 모임인 엔딩크레딧은 지난 4일 성명을 내고 “(고 오요안나 사건이)수십 년간 비용 절감, 노동법 적용 회피 등을 위해 비정규직을 남용하면서 뿌리깊은 신분상 위계와 서열, 차별과 불평등을 고착화했던 ‘비정규직 백화점’ 방송사에서 벌어진 또 하나의 비극”이라며 “MBC는 지금이라도 기상캐스터를 비롯하여 근로자임이 명백한 모든 노동자들과의 불법 프리랜서 계약을 중단하고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하라”고 촉구했다.
전문가들은 프리랜서 고용 형태에 대한 가이드 라인과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 확대가 필요하다고 조언하고 있다. 최근 법원이 방송업계 비정규직의 근로자성을 인정한 판결이 연달아 나오기도 했지만 업계 전반에 걸쳐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효신 노무사(소나무노동법률사무소)는 “프리랜서들의 경우 4대 보험이 아닌 3.3%의 사업소득세를 뗀다. 근로계약이 아닌 민법상 완전히 대등한 사업자와 사업자 대 계약으로 근무한다. 그러나 기상캐스터 등의 경우 프리랜서답게 자유롭게 활동하지는 못하며 사실상 회사에 종속돼 있다. 이런 구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짚었다.
이어 “사측에서 이런 부분을 좀 더 자유롭게 풀어줄 필요도 있다. 사측과 프리랜서 양측이 납득할 만한 가이드라인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며 “궁극적으로는 현재 근로자만 적용받는 근로기준법을 프리랜서 등 특수형태근로종사자로 묶인 이들도 적용받을 수 있도록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