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 ➄ 그리고 아이는 자라난다(1)
박지효 기자
등록2026.10.02 18:48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제1회 하이니티 청소년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 금알음 작가의「세계에서」 5. 그리고 아이는 자라난다
차가운 내음이 코끝을 스친다. 수도의 역사에 비해 구식인 역사에서는 아주 작은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낡은 안내 로봇이 드문드문 내뱉는 정제된 기계음을 어둠과 만나 조금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거의 마지막으로 열차에서 내린 우리는 길을 따라 바닥을 빛내는 등에 의지한 채 개찰구 안으로 들어섰다.
수도를 기점으로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는 대륙의 지역 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적은 곳을 꼽으라면 이곳 남부다. 그마저도 이곳은 가장 끝자락에 위치했고, 수도에서 함께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은 중간역에서 전부 내려버렸다. 애석하게도 개찰구까지 들어와 귀향을 반겨주는 것은 여로에게도, 나에게도 없는 존재였기에, 역사 안을 울리는 발소리는 여로와 내 것이 전부였다.
전자 카드를 활성화하자 포인트 창처럼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그곳에는 나도 거의 잊어버린, 집으로 향하는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 선생님이 첨부해 둔 것일까. 그 메마른 창에 떠오른 배려에,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이 작은 카드에는 기차표를 비롯해 작별을 위한 여정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선생님은 연락을 받자마자 이것을 나에게 건넸고, 경황없던 나 대신 남부의 학생 복지관에 연락을 해주었다. 복지관 담당자는 내일 나와 잠시 대면을 한 후, 내가 남부에 머무를 동안의 신변을 보호한다고 했다. 이곳에 있진 않아도 도착하면 담당자에게 연락을 보내두라고 했으니, 내 행적을 알고 있기는 하겠지.
모든 게 막힘 없이 흘러간다. 그 깔끔한 처리는 선생님이 나와 형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또, 나도 잊고 있던 길을 지도로 표현해 준 것은, 분명 인간다운 일이었다. 어른이 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생님은, 좋은 사람이다. 그 다정이 녹아든 것들이 지금 길을 잃지 않게 해줄 수 있었으니까. 나는 구멍 뚫린 심장으로 옅게 웃었다.
상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만, 올해부터는 만약 내가 졸업하기 전 형이 떠날 경우 성인이 될 때까지 내 신변은 학교에서 보호하기로 되어있었다. 구태여 후견인을 찾지 않은 것은 성년을 맞기까지 몇 개월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사람을 찾는 게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정을 잘 붙이는 성격이 아니어서였다. 담임 선생님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공부에 집중하라고 강조하셨기에 자세한 상황은 알지 못했지만, 원래 살던 집으로 가라고 하신 걸 보면, 아직 집을 처분하진 않은 모양이다. 그제야 재산 처리와 같은 일 때문에 담당자를 붙여준 것이겠지.
… 그렇지. 말마따나 형을 보내고 나면, 나는 온갖 것들을 책임져야 할 터였다. 혼자 살게 될 집이라도 어른의 책임은 있었다. 학교에선 가르치지 않은, 살아가기 위해 홀로 져야 할 것들. 문득 그게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져서, 나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가득 들어오자 가슴이 지릿 저려온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왔을 때보다 시야가 높아졌음은 분명한데, 어쩐지 길 잃은 어린애가 된 기분이었다. “넌 어디로 가?” “원래 살던 집. 아직 남아있긴 한가 봐… 내일 복지관에서 나온다고 했어. 아, 그런데 너는?” “난 이미 성인이잖아. 아무 곳으로나 가도 돼. 4구역 근처 아무 숙소에나 묵으려고.”
4구역? 나는 익숙한 지명에 카드와 여로를 번갈아 보았다. 4구역은 내 목적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용건이 그곳 가까이 있는 걸까. “그럼 우리 집에 같이 갈래? 어차피 아무도 없을 텐데.” 선생님이 알려준 바로는, 형은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있다고 했다. 지금 집에 들어간다 해도 공기는 차가울 텐데,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여로는 미성년인 나보다는 이동이 자유로울 터였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 자각이 안 되었는데, 이름으로 편히 부르고 있어도 여로는 한 살 형이었다. 출결에 구애받는 게 문제지, 사실상 인정 결석 처리되기만 한다면 보호자가 없어도 나처럼 신변을 어떤 기관에 양도하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상황을 논리적으로 정리하고 나니 여로를 쳐다보는 눈길이 조금 간절해졌다. 어른스럽지 못한 눈빛이라는 건 알았는데.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고금(孤衾)의 두려움이 선연했다. “그래도 돼? 궁금하긴 했는데.” “궁금했다고?” “네가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고 싶긴 했어.” 여로가 빙그레 웃으며 말하자 나는 머쓱한 기분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살아왔는데, 특별한 게 있을까. 새삼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내뱉는 숨에 안도감이 서린다. 남부의 밤은 혼자 보내기엔 너무 차가웠다.
행선지를 정한 여로와 나는 역을 나와 4번지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밤이 깊어가고 있어서 그런 걸까,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제일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창문가에 기대어 차가운 유리에 머리를 기댔다. 방금 나온 역은 수도에 비해선 훨씬 작았다. 파멸 전 철도 기술을 다룬 책에 나온, 시골의 역들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의 밤공기는 스잔했고, 어딘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좀 몽롱한가. 여독이 쌓이기 시작한 몸은 의지할 곳이 생기자 곧바로 긴장을 풀었고, 눈가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좀 자. 도착하면 깨워줄게.” 내 옆에 자리 잡은 여로가 말했다. 괜찮다고 하고 싶은데, 자꾸 눈이 감겨온다. “그럼 고맙지… 미안, 너무 피곤해서.” 나는 여로의 호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밀려오는 수마를 받아들였다. 의식의 끝자락에서 기억 속에 묻어있던 남부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도 같았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치는 느낌에 슬며시 눈을 뜨였다. 창문 너머로 눈에 익은 풍경이 들어온다. 잠에서 깨자마자 추위가 온몸으로 찾아들어 소름이 끼쳤다. “다 왔어, 내려야 해.” “… 아, 그렇네. 잠깐만…” 졸음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한 말끝이 조금 느렸다. 나는 황급히 가방을 챙겨 여로를 따라 버스에서 내렸다, 푸른 가로등이 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 아는 곳이다. 기억 속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곳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가자. 여기서 얼마 안 걸려.” 크게 숨을 들이쉰 나는 주위를 둘러보는 여로에게 말했다. 내 기억 속에만 있던 풍경에 여로가 있으니 왠지 낯선 기분이 들었다. 큰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꺾고, 다시 직진하다가, 작은 왼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곧 좁다란 주택가가 나왔다. 파노라마가 스치듯 집으로 향하는 길이 머릿속에 그려졌기에,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괜찮았다.
여로와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걷기 시작했다. 그다지 부유한 동네는 아니었기에 수리되지 못한 망가진 가로등이 이따금 어둠 속에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주변이 어둑해서 다행이다. 옛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향수에 젖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집에 들어간 뒤 느껴도 충분했으니까.
10분이 채 걸리지 않아, 나는 한 낡아빠진 건물 앞에 멈춰 섰다. 현대 기술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한 남루한 이곳이 내가 살던 곳이었다. “기숙사보다 멋지네. 철제 난간 오랜만에 봐.” 여로의 시선은 붉은 건물 옥상에 닿아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기억보다 녹이 슬은 철제 난간은, 정제된 수도의 풍경에선 거의 찾아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자칫 조롱하는 걸로 들릴 수 있는 말은 여로의 입에서 나오자 순수한 경탄으로 바뀌었다. 여로라면, 온갖 더러운 풍경들도 사랑할 줄 알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간단한 어조가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도 같았다.
“… 들어가자. 날 더 추워지기 전에.” 잠시 건물을 바라보던 나는 먼저 몸을 움직였다. 남부 특유의 매서운 바람이 철제 펜스를 거칠게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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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루, 방 하나. 좁은 집 안의 풍경은 기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만 기억 속에서는 흔치 않았던 낡은 먼지 냄새가 공기를 떠돌아다닐 뿐. 나는 불을 켜기도 전에 제일 먼저 보일러를 찾아 틀었다. 자동 관리 시스템이 켜져 있지 않아, 추운 바깥 온도와 실내 온도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등을 켜자 깔끔하게 정리된 방의 풍경이 더욱 선연히 눈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깔끔해서, 오히려 사람이 살았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묵직해지는 가슴을 느끼며 먼지 쌓인 커튼을 내린 나는 잠시 고개를 숙이다가, 곧 여로의 존재를 깨닫고 걸음을 옮겼다. “난방이 잘 안 돼서… 좀 추울 텐데, 금방 따뜻해질 거야. 잠깐만, 방에서 이불이라도 꺼내올게.” 나는 여로에게 욕실의 위치를 일러주고 창문 옆에 딸린 방의 문을 열었다. 하나 있는 방은 내가 사용했고, 형은 마루의 소파에서 잠을 잤었다. 내가 떠난 뒤론 형이 방을 쓰지 않았을까. 물건의 위치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아마 겨울 이불은 방 안의 붙박이장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방 안 풍경은 예상과는 조금 달랐다. 문을 열자마자 마루보다 더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간지럽힌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켠 나는, 잠시 그 자리에서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방은, 여전히 내 방이었다. 기숙사로 떠나기 전 쓰던 얇은 여름 이불이 기억 그대로 침대 위에 개켜져 있었고, 채 정리하지 못하고 나온, 입학시험을 준비할 때 쓴 USB들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왜… 방을 쓰지 않았을까. 잠을 자기에도 마루보단 방이 훨씬 더 편했을 텐데. 내가 여기서 지낼 땐 어쩔 수 없는 배려였다지만, 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두고… 뭉근한 감정이 의연하려 했던 눈가를 덮친다. 벽에 손을 올린 채 그대로 멈춰 있던 내 뒤로, 여로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기가 네 방이야?” “… 응. 아니어야 했는데, 이제는…” 나는 도무지 말을 맺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내 방이 아니어야 할 방을 보고 있으니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들이 자꾸만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더이상 방 안의 것들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붙박이장으로 다가가 두꺼운 이불을 꺼냈다.
탁. 문을 닫고 나오자, 그제야 숨이 쉬어진다. 소파 위에 이불을 내려놓은 나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으며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여로가 고개를 푹 숙인 나를 보고 물었다. 글쎄, 괜찮은 걸까. 괜찮아야 하는 게 맞는데, 요동치는 가슴은 도무지 그러질 못했다. “… 아마. 네가 방에서 잘래? 난 여기서 자면 돼.” “들어가기 힘든 거라면, 나도 그냥 여기서 잘게. 기숙사에서도 같은 방 썼는데 뭘.” 태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내 심리를 정확히 알고 있는 그에 몸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여로는 타인의 생각이나 마음을 지나치게 잘 읽는다. 아주 작은 행동이나 스쳐 지나간 말로도, 그 행동에 타당한 이유를 부여하곤 했다. 그걸 잠시 간과한 것이다.
항변하길 포기한 나는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편히 앉으라고 옆자리를 툭툭 쳤다. 보일러가 돌기 시작해 카펫이 깔린 바닥은 그럭저럭 앉을 만했다. “그래, 이불 깔아줄게. 저녁은 먹고 나왔어? 여기 먹을 거 없을 거야.” “난 먹었지. 오히려 네가 못 먹었을 거 아냐.” 여로가 내 곁에 앉으며 되물었다.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다. 안 먹어도 된다고 말하려는데, 여로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가방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혹시 컵이랑 뜨거운 물 있어?” “… 그게 뭐야?” “수프 가루. 이것저것 있어.” 여로는 가루가 담긴 작은 병들을 앉은뱅이 식탁 위에 주욱 늘어놓기 시작했다. 양송이 수프, 콘 수프, 클램차우더… 인스턴트 같은 게 종류도 다양하다. 내 반응을 기대하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에, 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트렸다. 학교에는 매점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이런 것들을 구해오는지 모르겠다. “포트 있을 거야. 물 얼마나 필요해?” “포트 절반 정도. 뭐 먹을래?” “… 양송이 수프.” 결국 여로의 손에 들린 것을 눈짓하자 그가 환하게 웃었다. 그래, 말마따나, 수프가 있으면 춥지는 않겠지. 실없는 생각들을 하며 찬장에서 포트를 찾아 물을 올렸다.
물이 끓기 시작하자 여로가 포트를 가져가 컵에 물을 부었고, 곧 아무 냄새도 나지 않던 마루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자.” “… 고마워.” 나는 여로가 내미는 컵을 받아 들었다. 손에 전해지는 온기가 따뜻했다. 한 숟갈을 떠 입에 넣자, 수프의 온기가 입안에 확 퍼진다. 고작 뭉근한 액체가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녹일 수 있다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좀 살 것 같다… 갑자기 추운 곳으로 와버려서.” 탄수화물이 들어가자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는지, 입에서 한숨과 함께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까 버스에서 깊게 잔 것 같은데 아직도 피로가 짙다. 중력이 몸을 아래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가 유독 길었다. 시험을 보고, 세계를 부수고 빠져나와, 고향에 돌아왔다. 그래 놓고도 아직 하루가 다 지나지 않은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편해 보여. 학교에 있을 때보다.” 괜히 수프를 휘적거리는데, 여로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물끄럼한 그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나는 조금 어색한 기색으로 볼을 쓸었다. … 편해 보인다고? 분명 마음은 복잡해서 미치겠는데. 그래도 고향이라고, 여기가 편하게 느껴지는 건가? 원죄를 마주하러 내려왔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 거 아닌가. 뜻 모를 말의 의중보다 그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의 정체를 잘 알지 못했기에 더더욱.
“만시지탄(晩時之歎).” “… 응?” “책장에 적혀 있던데. 저기.” 여로가 커텐 옆에 설치되어 있는, 무릎 정도 높이의 책장을 손짓했다. 커텐에 가려 보이지 않았는데, 저 책장은 내 기억 속에 없는 것이었다. … 형이 가져다 놓은 건가? 나는 절반 넘게 차 있는 책장을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공부는 모두 태블릿으로 했는데, 굳이 왜 저기다 책장을 만든 거지? “… 그건 무슨 언어야?” 책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로 물었다. 만시지탄. 네 음절이 옛날에, 제1 공용어의 배경이 된 언어 중 하나에 있던 단어 같은데, 그 뜻이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자로 된 단어야. 한자 성어를 쓰는 사람들은 정말 드문데… 혹시 형님이 문학을 좋아하셨어?” “형이? 그럴 리가. 형은… 학자가 되고 싶어 했어.”
나는 여로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형이 문학이라니. 전혀 붙여놓고 생각할 수 없는 단어였다. 문학의 정제되지 못한 것들을 혐오하지나 않으면 다행일까. 하지만 여로는 아무 말 없이 책장을 가리키며 가보라는 듯 그곳을 눈짓했다. 의문스러운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 책장으로 다가가자, 흐릿하게 보였던 책등의 글자가 읽히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나는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최소한 학문 서적들일 거라고 생각한, 빼곡하게 꽂혀 있는 책들은 모두 파멸 전의 문학이었다. 개중에는 철학서도 있었고, 내가 여로에게 받아 읽어본 책들도 있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인간 실격**, 신곡***, 국가****… (헤르만 헤세* / 다자이 오사무** / 단테*** / 플라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가 담긴 책으로, 이데아론에 대해 설명함.****)
떨리는 손으로 그 고서들을 쓸어보는데, 문득 프레임에 붙어 있는 작은 쪽지에 시선이 갔다. 그림 같은 문자들. 이게 여로가 말한, 만시지탄이라는 글자일까. 나는 그것을 조심히 떼어 식탁 앞으로 가지고 왔다. 밝은 조명 아래서 본 그것은 분명한 손글씨였다. “… 무슨 뜻이야, 이거?”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다. 혼란스러워하는 내 손에, 여로가 다시 따뜻하게 달아오른 컵을 쥐여주었다. 손에 전해지는 온기가 없었다면, 분명 이 날것의 감정들을 견디지 못했을 것 같았다. “시기에 늦어 기회를 놓침. 그러니까… 때늦은 후회.”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세계에서>는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➄ 그리고 아이는 자라난다(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