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 ➆ 창조주, ➇ 옛정, 애정, 우정
박지효 기자
일간스포츠는 곽재선 문화재단과 함께하는 제1회 하이니티 작가상 최우수상 수상작인 금알음 작가의 「세계에서」와 김재인 작가의 「반항의 향」을 매주 1회씩 순차 연재합니다. 이번 연재는 청소년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굴하고, 신진 작가들의 작품을 보다 많은 독자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됐습니다. 독창적인 상상력과 깊이 있는 시선이 담긴 두 작품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편집자주>
7. 창조주
이모션 사이클은 국가의 획기적인 기술로 자리 잡았다. 쓸데없는 감정을 통제해 효율을 높인다는 아이디어가 통했다. 처음 시작할 당시의 나는 이렇게나 성공하리라 상상하지 못했다. 그저 시시한 과학 기술 공모전에서나 보일 법하다고 여겼다. 그랬던 이모션 사이클이 실제로 실현되어 널리 퍼지고 있었다.
사업을 시작할 초기에 그 아이를 만났다. 제대로 된 이름도 붙여지지 않았던 시절의 임상 실험. 당시 내가 찾아갔던 그 동네에는 등록되지 않은 보육원이 많았다. 생명에 지장이 있을 리는 없었기에 과감하게 실험을 시작했다. 최대한 상냥하고 다정한 표정을 지어가며 힘들게 진행했던 걸 딱히 기억하고 싶지는 않네.
한이류는 알까? 시기가 다르다는 사실을, 본인이 기억하는 그날은 2차 실험이었던 것을. 다른 아이들보다 적은 말 수에 어딘가 식어버린 듯 굴었던 너를 나는 잊을 수 없었다. 이미 감정이 없는 것처럼 구는 아이에게 실험해 봤자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는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좋은 결과를 도출하려면 반례도 알아두어야 하니까. 한이류와 반대되는 인간이 선휘연이었다. 처음 본 나를 경계하지도 않고 반갑게 맞이하던 아이는 최적의 실험체였다. 생글생글 웃으며 감정을 질질 흘리고 다니는 인간이 필요했다. 아마 1차는 약물 접종으로 이루어졌을 거다. 아프다며 엉엉 우는 선휘연과는 달리 내색하지 않는 한이류가 웃겼다. 눈에 눈물이 맺혔는데도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는지 꾹 참는 모습이 기특했다. 휘연이를 어떻게 달래줬더라, 막대 사탕이었나….
그들에게 1차 실험을 마친 뒤 이모션 사이클은 급격히 발전했다. 효율을 원한다면 시술하라는 광고도 시민들에게 잘 먹혔다. 이 덕에 규모가 막대하지는 않았지만, 여러 지역에서 이모션 사이클이 시행되었다. 여론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이름 하나 없는 기술을 무엇을 믿고 찬양했던 건지 난 알 길이 없다. 즉시 2차 임상 실험을 시작했다. 한이류가 기억하는 공포는 이날이다. 워낙 어릴 때의 일이니까 기억의 왜곡이 있겠지.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아직 칩 기술이 개발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2차 실험 또한 약물 접종으로 진행되었다. 놀라웠던 것은 선휘연이었다. 1차 실험은 실패했었다. 한이류와 선휘연에게만 아무런 변화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둘은 반례였다. 하지만 선휘연은 2차 실험에서 극명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이모션 사이클의 원리에 관심을 보였다. 분명 내게 자신도 함께 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운이 좋았던 걸까. 우리는 휘연이를 키워 성장시켰다.
반면 한이류는 여전히 반례에 머물렀다. 이상하리만치 실험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했다. 결국 실험체 중 몇몇만 기록해 두었다. 후에 지켜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지금 내 눈앞에 수년간 기다려 온 결과가 있었다. 폭발해 버린 시한폭탄. 차분했던 어릴 적 모습은 어디 가고 목소리를 터뜨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짜릿했다. 나는 완벽한 부작용의 목격자였다.
“부작용이 감정의 폭발이라. 완전 웃기네.”
올라오는 웃음을 제어할 수 없었다. 이모션 사이클로 억누르고 제어하던 감정 덩어리가 터지는 건가. 이류가 무언가 중얼거렸다. 들리지도 않았다. 속으로 하나뿐인 친구 배서화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배서화가 위치추적 계약을 발설한 것은 의외였다. 태어날 때부터 새장 안에 갇힌 새는 새장만이 유일한 안식처이다. 바깥은 꿈도 못 꾸고 오히려 두려워하는 존재일 뿐이다. 감히 세상을 탐한 게 귀엽다고 해야 할지. 그렇다고 해서 배서화에게 어떤 일을 저지를 의향은 없다. 그냥, 그냥. 재밌네!
8. 옛정, 애정, 우정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다. 기절한 것도, 미쳐버린 것도 아니었다. 압축된 진공 상태에서 풀려난 느낌이었다. 이제야 내가 느꼈던 이질감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 여겼던 감정들이 초면인 듯한 어색함. 이모션 사이클의 효과였다. 서화는 알았을까? 알면서 모르는 체한 걸까? 책상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움직였다. 주머니에서는 끊임없는 진동이 느껴졌다. 번뜩 생각 난 사람은 이담이었다. 데이터. 내가 급히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그가 얕게 띈 미소를 감추었다. 여러 번 나뉘어 전송된 메시지를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지금 데이터 추출 중.’
‘여기 너 이름이 있는데?’
‘뭐야? 연락 왜 안 봐.’
‘내려와.’
‘야.’
‘한이류’
어딘가 급박한 말투에 내 마음도 덩달아 조급해졌다. 얼른 이 공간을 빠져나가야 했다. 차가워진 채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벅벅 문질러 닦았다.
“저, 가보겠습니다.”
“어디를? 왜 벌써 가요?”
“몸 상태가 안 좋아서요.”
“아픈 거 아니야? 쉬다 가요. 급한 약속이라도 있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능글맞은 말투에 온몸의 근육이 굳었다. 그가 검은색의 가죽 장갑을 끼며 내게 다가왔다. 행동 하나하나가 나를 긴장하게 했다. 저 인간이 숨만 쉬어도 무서워, 왜지? 그가 장갑 안으로 내 손을 붙잡았다. 붙잡힌 손이 뜨겁고 닿은 손가락이 아릿해 불쾌했다.
“손이 차네. 이 상태로 어디를 가. 가다가 쓰러지겠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이곳에 붙잡아 두기 위한 꾀였다. 메시지 읽음 표시가 있으니 내가 확인한 사실은 이담에게 전해졌겠지. 이담과 만나는 문제는 뒤로하고 지금 당장에 집중해야 했다.
“정말 괜찮은데요.”
“할 이야기가 더 남지 않았나.”
그의 말끝이 희미하게 늘어졌다. 어느새 흥분은 급격히 잦아들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판단할 수 있는 의식이 있다는 건 정말 소중한 일이었다.
“저는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나는 단호한 사람 별로인데. 그래서, 이류 양은 왜 그렇게 나를 싫어해요?”
“이모션 사이클 받은 사람들은 제 눈에 로봇으로밖에 안 보여요. 사람 사는 게 아닌 거 같다고요. 감정은 그 사람 본인의 것이잖아요. 남이 무슨 수로 그런 걸 제어해요? 어리석은 짓 아닌가요?”
“도시 밖의 인간들, 센터 재학생들의 감정은 불완전합니다. 그렇기에 더 억제되어야만 해요.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효율을 잃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리석고 열등한 생물 아닙니까?”
“그놈의 효율, 효율! 불완전하기에 존재하는 거예요. 당신은 아직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 한 모양이군요. 제가 조향하는 향수도 어설프고 불완전해요. 보잘것없다고. 전문적인 조향은 배워본 적도 없어요. 오직 기억과 감각에만 의존해서 멋대로 만들어요. 그래도, 이 행동 자체에 보람을 느끼니까. 그러니까! 내가 나답게 살아보기 위한 발악이었다고. 당신들이 이모션 사이클이라고 이름 지은 그 속박이 부당하다고 느꼈으니까. 내가 금지된 것들을 간직할 방법은 이거 하나뿐이니까….”
목이 멨지만, 패자의 기분을 느끼기 싫어 꾹 참고 말을 이어 나갔다.
“쓰레기봉투도 나름대로 쓸모 있다고 생각했어. 우리를 찢어발긴 게 당신들, 클록터야. 알기나 해? 나랑 서화, 선휘연, 아니, 휘연이까지 망친 게 당신이니까 클록터를 향한 증오는 내 의무야.”
그가 무언가 말하려 입을 벙긋했다. 그의 뒤로 드러난 움직임이 내 눈동자에 스쳤다. 급하게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기회였다. 열린 문 앞에는 휘연이가 있었다. 문밖에서 나와 그의 대화를 들어버린 표정이었다. 표정이라 할지라도 미간의 얕은 주름 하나 정도이다.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나와 휘연이의 어깨가 부딪혔다. 그대로 앞만 보고 지나쳤다. 세 걸음 걸었을 때 왼쪽 어깨에 보드라운 손의 감촉이 느껴졌다.
“화가 많이 났네.”
“말 걸지 마. 언제부터 나를 걱정했다고.”
“반항은 적당히 해.”
“그러는 넌. 너는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아니야?”
휘연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휘연이는 끝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예전에는 반대였던 것 같은데. 내가 사람 눈을 못 마주쳤었지. 딱딱한 목소리의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네 친구, 왔다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한이류.”
돌에 걸려 넘어지기 일보 직전 중심을 잡은 서늘함과 같은 한기가 퍼졌다. 한동안 복도에는 거친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왜 왔어?”
천천히 뒤를 돌아보니 보란 듯이 서화가 서 있었다. 하관을 오른손으로 가린 채 숨을 몰아쉬는 배서화가 있었다. 기어코 셋이 재회했다.
“오랜만이다, 선휘연.”
다정한 인사에 휘연이 당황한 듯 보였다. 어떤 기억이라도 떠오른 사람처럼 주춤거리는 모습이 낯설었다.
“내 계획에 끼어들지 마.”
“계획도 없이 혼자 막무가내로 온 거 아니야? 위험하잖아. 바보야.”
“상관하지 말라고. 이담 씨랑 다 이야기했어.”
“이담?”
회장의 되묻는 소리에 우리 둘은 동시에 얼어붙었다. 등 뒤편의 문은 열려있었고, 모든 대화를 들려주고 있었다. 휘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 서화를 툭 치며 도움을 부탁했다. 그러고는 스마트폰을 꼭 쥔 채 냅다 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정도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낸 거겠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시간도 없이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촘촘한 계단이 끊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담이 보낸 건물 설계도를 바라보며 데이터 관리실을 찾았다. 일반적인 지도를 보내줬더라면 참 고마웠을 텐데 사정이 있는 터겠지. 문을 박차고 들어간 방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홀로그램이 둥둥 떠 있었다. 그 사이의 이담과 눈이 마주쳤다.
“늦었네?”
“배서화랑, 선휘연이 만났어요.”
숨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담은 어딘가에 열중한 듯 내 말을 한 귀로 흘려들었다.
“친구끼리 모이고 좋았겠다.”
“지금 농담할 분위기 아니거든요.”
그가 문을 잠그며 작게 웃었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철문이 고정되었다. 고요한 복도가 더욱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차라리 직원들이 시끌벅적하게 나를 쫓는 편이 덜 무서울 지경이었다.
“용케도 이런 회사에서 스파이로 살아남았네.”
“허술하다니까. 여기는 기술 하나로 밀고 나가는 거야. 똑똑한 축에는 못 들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담의 옆얼굴을 초록빛 음영이 감쌌다. 머리 위로 올려 쓴 고글은 내가 센터에서 받은 것보다 조금 더 값진 것이었다.
“언제 끝나요? 시간 없는데.”
“재촉하지 마세요. 다 끝났어.”
이담의 타자 속도가 빨라졌다. 정교한 값을 계산하는 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스크린에 뜬 퍼센트는 100을 향해 달려갔다. 이담이 내 눈치를 보며 물었다.
“그, 임상 실험 명단은 어떻게 된 거야. 봤어? 네 이름이….”
“나도 무슨 상황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예전에 당했나 봐요. 이모션 사이클을.”
괜찮냐고 묻는 그의 말에 대충 얼버무려 수긍했다. 지금은 새빨간 사실에 휘둘려서 본분을 잊으면 안 됐다. 거짓을 치덕치덕 붙여서라도 평정심을 유지해야만 했다.
“가자.”
이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노트북을 챙겼다. 복도에 발을 딛은 순간까지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안심이 무서운 법이었다. 위층 어디선가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나 다른 소음은 들리지 않았다. 서화는 아직도 저곳에 있다.
내가 널 두고 떠나도 돼?
“뭐해, 가만히 서서. 잡히고 싶어?”
“저, 저 잠시만요. 먼저 내려가세요.”
본능대로 움직였다. 뒤에서 나를 말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돌아볼 시간은 없었다.
“친구들이랑 할 이야기가 있어요!”
힘겹게 내려온 계단을 거꾸로 올라갔다. 왜인지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다시는 밟고 싶지 않았던 복도에 직접 돌아온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바닥에 엎어진 서화가 보였다. 그 위 회장의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선휘연은 어디 간 거지. 고개를 돌린 서화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 눈가에 빨간 상처가 있었다. 서화가 소리쳤다.
“미쳤어? 내려가!”
서화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몸싸움이라도 났던 것인지 둘의 상태가 엉망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얕은 숨에 휘날렸다. 얼른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이 따라주지 않았다. 무작정 서화에게 뛰어갔다. 회장의 손에는 파란 알약이 들려있었다. 서화는 이를 악물고 얼굴을 돌렸다. 강제로 먹일 셈이었다. 급히 그의 손목을 잡았다. 그가 갑작스레 힘을 준 탓에 손목을 삐끗했다. 통증에 얼굴을 찌푸릴지라도 결코 놓을 수 없었다.
“나는 폭력적인 학생 안 좋아하는데.”
“강제로 약 먹이려는 당신도 다를 바 없어.”
서화는 잠깐 일어서지 못했다. 지금 가장 육체가 멀쩡한 건 나였다. 계속되는 견제 속, 힘겹게 그의 손에서 알약을 뺏었다. 그러고는 입에 던지듯 넣어버렸다. 파란 알약을 와그작 씹었다. 매캐하고도 씁쓸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너는. 무모한 짓 줄여.”
“남 걱정 할 때 아니야.”
이미 한 번 불순물 섞인 사람이 희생하는 게 낫잖아. 한쪽 무릎을 지지대 삼아 간신히 일어나는 서화의 팔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엉덩방아를 찧은 채 슬금슬금 뒤로 움직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심야에 도시 한복판에서 이루어진 오류는 생각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강행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알약을 삼킨 걸 보면 너도 모르게 무의식이 이모션 사이클을 원하나 봐? 하긴, 무언가를 어릴 때 학습하면 더욱 효과적인 법이니까.”
“그딴 소리 집어치워. 당신은 이모션 사이클인지 사회 부적응자의 장난질인지 모를 그 시술을 받지 않았는데도 본인의 감정을 모르잖아.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고.”
“사회 부적응자? 누가 누굴 보고 하는 소리인지. 지금 사회에서 부적응자는 내가 아니라 너희야.”
“내가 알약을 삼킨 건 잠재된 욕구 탓이 아니라, 얘를 위해서야. 배서화를 위해서라고. 사람과 사람 간의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모르는 사람은 내 행동을 이해하기 어렵겠지.”
그의 여유로운 미소가 조금은 흐트러졌다.
“부작용이 심한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네 친구도 위험할 수 있거든. 안타깝지만 시술실로 동행해 주어야겠어요.”
그가 내 손을 꽉 쥐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차가운 가죽 장갑의 표면이 살갗에 스쳤다.
“방금 삼킨 알약은 단순한 이모션 사이클 약물이 아니야. 이주에 한 번꼴로 복용해야 하는 일반적인 알약과 달리 특정 사람을 위한 강력한 버전이죠. 한 달도 넘게 효과가 지속되는 거야. 역시 감정의 판단에 의존하는 사람은 체계적인 사고가 뒤처지는 걸까.”
“이주가 됐든 한 달이 됐든 관심 없으니까 자극하려 시도하지 마세요. 당신의 말에 또다시 당할 정도로 멍청하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으니까.”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문제아들. 말했다시피 센터는 잘못된 아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시설이야. 설령 우리의 기밀을 가지고 이곳을 빠져나간다고 해도 무엇이 달라지냐는 말이야. 너희가 할 수 있는 게 있어?”
말문이 막혔다. 그토록 상상만 하던 날이 왔는데, 정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지?
내가 잠시 우물쭈물하자, 서화가 소리쳤다.
“비인간적인 오답들 사이에서 우리만이 정답이었으니까 우리를 틀렸다고 말하는 거 아니야? 정상의 기준을 바꾼 게 당신이니까. 증명할게. 지금, 이 사회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증명이야!”
서화가 나와 회장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떨어진 내 손에는 빨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픔을 달랠 새도 없이 서화의 발길에 이끌렸다. 더 이상 뛸 힘은 없었다.
“조금만 참아. 지름길을 알아뒀어.”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가는 서화는 한 층을 내려와 구석진 곳의 출구를 찾았다. 연구실과 이어진 통로에는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데?”
“일단 따라와!”
통로를 통해 옆 건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서화는 내가 주변을 살피는 사이 연구실의 장롱을 뒤적거렸다. 비슷한 크기의 하얀 가운이 두 개 보였다. 무슨 목적인지 가운 두 개를 훔치려 했다. 허겁지겁 연구실 안쪽의 철문을 여니 아까와 다른 비상계단이 드러났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내려갈 만한 폭이었다. 쉴 새 없이 발을 움직였다. 다리에 피로가 많이 쌓였는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몇 번을 휘청거렸다.
“이대로 몇십 층을 더 내려가라고?”
“무리야?”
“이미 한계야!”
내 외침에 서화가 멈춰 섰다. 내게 훔쳐 온 가운을 내밀며 입으라 말했다. 영문도 모르고 가운의 단추를 끝까지 잠그니 서화가 입을 열었다.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이동할 거야.”
“들키면 어떡하려고! 나야 이담 씨 사원증이 있지만, 너는?”
“어차피 우리 얼굴 아는 사람 회장밖에 없어. 보안 카메라 영상을 모든 직원에게 전송해 준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는 불가능해.”
“어떻게 확신하냐고. 저 먼 센터에서도 우리를 감시한 기업이야! 그게 회장 한 명뿐이라 생각해?”
이류야. 부름에 멈칫했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확신을 가져. 방법은 없어. 생명까지 위협받기는 싫잖아. 저 사람은 지금 우리를 어떻게든 망가트리려고 해. 그 수단에 무엇이 있을지 어떻게 알아? 선휘연이 사원증을 흘리고 갔어. 나를 일부러 쳐다보면서. 친구였잖아.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도움에 응해줘야 해. 적어도 나는 그래.”
“배신이야. 우리에 대한 예의도, 미련도 없는 사람이라고. 걔는 선휘연이 아니었어. 마음을 개조하고 연구에 미쳐 사는 인간일 뿐이라고. 너는 그런 애를 친구라고 말할 수 있어? 내가 모든 자아를 잃어도, 그때도 여전히 내가 나일까? 모르겠어. 대기업 상대로 개미 수준도 못 미치는 우리가 날뛴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지도 잘 모르겠네. 이제 와서.”
“그날, 이모션 사이클 받은 거 맞아? 소용없어 보이는데. 평소대로잖아. 짜증 내는 거 봐라. 클록터 기술 엉터리네, 완전.”
서화가 활짝 웃으며 나를 꼭 안았다. 눈물이 터질 것 같았지만 참았다. 남한테 폐 끼치는 일을 다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와 서화는 각자 빌린 사원증을 찍고 엘리베이터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위의 숫자가 내려갈수록 사람이 점점 늘어났다. 엘리베이터 안 사람들은 모두 같은 옷차림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볼까 봐 고개를 푹 숙였다. 사람이 밀집되어 숨 쉴 공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구석까지 밀려나 당황했다. 긴장하지 말라는 듯 서화가 내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사람들에 가려져 맞잡은 손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의 감각이 너무 생생해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로비에 도착할 즈음 엘리베이터 안에는 서화와 나 둘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제법 깜깜해진 밖이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빨리 해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담의 문자대로 길을 따라가니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보였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왔냐.”
이담이 짧게 묻고는 아무 말 없이 운전석에 올랐다. 우리도 딱히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창문에서 클록터 본사가 사라지고 나서야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한 연구복을 급히 벗었다. 끝난 건가.
“할 말은 다 했어?”
“그런 것 같은데요.”
“말투에 자신이 없네. 손은 언제까지 잡고 있게? 알콩달콩하네.”
이담의 언급에 꼭 잡은 서화의 손을 뿌리쳤다. 서로 멋쩍은 웃음을 터트렸다. 긴장이 급격히 풀린 탓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서화가 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내며 이담에게 부탁했다.
“휘연이한테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래. 의심받으면 너희 탓이다.”
하늘은 검은 물빛으로 가득 들어찼다. 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오히려 나를 진정시켜 주었다. 방황은 무서웠지만 도전은 흥미로웠다. 내가 이담에게 사원증을 내밀며 감사 인사를 전했지만 거절당했다.
“왜요, 사원증이 있어야 출근하지.”
“돈 벌려고 들어간 회사도 아닌데 더 다닐 필요는 없잖아.”
이담의 웃음소리는 어느 때보다 맑았다. 서화는 어느새 창문에 머리를 콩콩 박으며 졸고 있었다.
“데이터는 잘 전송했어. 시술받은 사람들의 경과보고서도 있더라고. 각기 다른 부작용이나 사망 여부도 모두 기록되어 있어. 걱정하지 마, 뒤는 내가 해결할 테니까. 터트리면 세상도 우리에게로 기울 거야.”
“어느 누가 문제아 목소리를 경청하겠나요. 막막하네. 원하는 걸 해결했는데 이후가 무서워요.”
“문제아든 반항아든 상관없으니까, 오늘처럼 살아. 소중한 건 모두 네 안에 있잖아. 그것만 지키면 돼.”
오늘로써 다가올 봄에 내 진심을 우려 흘려보냈다. 어디선가 상쾌한 밤공기가 들어왔다. 제조된 향이 아닌, 깨끗한 공기 그 자체가.
[제1회 하이니티 X 곽재선 문화재단 최우수 당선작]
<반항의 향>은 매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➈반향의 향에서 계속)
박지효 기자 jihyop@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