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다란 체구에 까무잡잡한 피부, 뒤로 넘긴 머리에 날카로운 표정까지. 배우 이준혁에게 이런 얼굴이 있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최근 몇 년 사이 선한 얼굴을 가진 악인의 활약이 돋보이긴 했지만, 캐릭터를 위해 몸집을 키우거나 스타일 자체에 변화를 준 배우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준혁은 달랐다. 영화 ‘범죄도시3’에서 무자비한 빌런 주성철을 연기 하기 위해 20kg을 증량한 것은 물론 태닝까지 시도했다. 그 정도로 ‘범죄도시3’는 연기에 대해 고민이 깊었던 이준혁에게 찾아온 선물 같은 작품이었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범죄도시3’는 대체불가 괴물형사 마석도(마동석)가 서울 광수대로 이동 후, 신종 마약 범죄 사건의 배후인 주성철(이준혁)과 마약 사건에 연루된 또 다른 빌런 리키(아오키 무네타카)를 잡기 위해 펼치는 통쾌한 범죄 소탕 작전을 그린 영화다.
이준혁은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일간스포츠와 만나 ‘범죄도시3’에 합류하게 된 과정부터 각오, 배우로서의 마음가짐 등을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준혁은 ‘범죄도시’의 윤계상, ‘범죄도시2’ 손석구에 이어 ‘범죄도시3’ 빌런이자 마약 사건의 배후 주성철을 연기했다. 주성철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고 무자비하게 상대방의 숨통을 조이는 인물이다. 앞서 등장한 ‘범죄도시’ 빌런들과는 달리 상황을 설계 후 전략적으로 움직인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주성철의 ‘운수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어요. 인생의 쓴맛을 모르던 사람이 인생 최고의 거래를 앞두고 하필 마석도를 만나게 된 거죠. 주성철의 장점은 자신감이에요. 마지막까지 플랜B가 있었고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죠.”
영화 ‘신과 함께’ 박중위, ‘언니’의 한정우,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오영석, ‘비밀의 숲’ 서동재 등 다양한 캐릭터를 경험한 이준혁도 이토록 무자비하고 악독한 캐릭터는 처음이다. 그간의 악역은 ‘범죄도시3’ 속 주성철을 만나기 위한 빌드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준혁은 주성철 역을 맡아 장첸(윤계상), 강해상(손석구)과는 전혀 다른 매력으로 관객과 만난다.
“사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악역을 한 적은 없어요. ‘적도의 남자’가 최초였는데 그때는 그 캐릭터가 왜 그래야만 했는지 설명이 됐죠. ‘60일, 지정생존자’는 악인은 맞지만, 스스로 대의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너무 순수해서 악행을 저지른다는 생각을 못하는 인물인 거죠. ‘비밀의 숲’은 애초에 무섭게 보는 사람도 없지 않았나요?(웃음)”
이준혁은 ‘범죄도시2’가 개봉하기 전 출연을 제안받았다고 했다. 그는 회사 직원들과 여행차 강화도로 가고 있던 도중 마동석에게 온 전화 한 통으로 출연을 결정하게 됐다며 “대본도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마법 같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았어요. 전화가 오더니 악역인데 살을 좀 찌워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라고요. 시간이 3개월 정도밖에 없어서 급하게 찌웠는데 몸무게가 늘어날 때는 엄청 늘어나다가 한 끼만 안 먹어도 2~3kg씩 빠지더라고요. 지금은 촬영 때보다 16kg 정도 빠졌어요. 처음에는 10kg까지만 빼고 유지하려고 했는데 홍보 기간에 잘 못 먹다 보니까 더 빠지게 됐네요.”
이준혁은 생생한 캐릭터 구현을 위해 외형적으로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전했다. 여기엔 연출을 맡은 이상용 감독의 요구도 있었다. 그는 “감독님은 내가 많이 망가지길 바라셨다”면서 “거칠고 날것의 느낌을 요구하셨는데, 나 역시 그 요구에 순응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난 작품활동을 많이 해온 사람이고 소비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범죄도시3’에선 신선함이 있어야 유리하다고 생각했다”며 “사람들한테 새로운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또 이번 작품을 위해 태닝을 했다는 이준혁은 “영화 ‘데스티네이션’ 때문에 태닝 기계를 무서워했는데 극복하게 됐다”며 남다른 소회를 전했다.
지난해 5월 팬데믹 이후 최초로 천만 관객을 모은 ‘범죄도시2’에 이어 1년 만에 극장가에 돌아온 ‘범죄도시3’는 시리즈 최초 투톱 빌런을 내세웠다. 주성철 역의 이준혁과 리키 역의 아오키 무네타카가 그 주인공인데,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전작을 뛰어넘는다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빌런의 임팩트가 분산돼서 아쉽다는 반응도 있다.
“개인적으로 임팩트가 있는 신이 많다면 좋겠죠. 그런데 그 이전에 관객이 재미를 느끼는 게 중요해요. ‘주성철 분량이 늘어난다고 해서 더 재밌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나중에 아쉬운 부분이 있으면 다르게 풀 기회가 있겠죠.(웃음) 저는 배우로 지낸 시간보다 관객으로 지낸 시간이 길어요. 그래서 영화가 재밌는 게 첫 번째예요. 요즘엔 악역, 선역보단 어떤 캐릭터를 했느냐에 집중되는 것 같아요. 주성철은 평생 만나볼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잖아요.”
이준혁은 올해로 16년 차 배우가 됐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자신이 출연한 작품은 잘 보지 못한다고 털어놨다. 이준혁은 당분간 자신은 도망가있겠다며 ‘범죄도시3’를 극장에서 즐겨달라고 당부했다. 한편으로는 주상철 캐릭터와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랐다.
“저는 혼자 극장에 가는 걸 좋아하는데, 제가 출연한 걸 볼 때면 오히려 눈이 높아져요. 아직 ‘베스트’라고 생각하는 작품도 없었고요. 그래도 운이 좋게도 역할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던 때 마침 나를 변주할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게 됐어요. 배우로서의 성취감, 대중의 사랑을 받으려면 더 열심히 달려야죠. 전 슈퍼스타도 아니라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하거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