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기는 길었고, 반등의 계기는 뜻밖에도 벼랑 끝에 섰다는 냉혹한 현실 감각이었다. 박민지가 5타 차의 열세를 뒤집는 폭발력을 과시하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통산 20승 고지를 밟았다.
박민지는 31일 경기도 양평의 더스타휴 골프&리조트(파72)에서 열린 Sh수협은행 MBN 여자오픈 최종 3라운드에서 버디만 8개를 쓸어 담으며 8언더파 64타를 쳤다. 코스 레코드 타이기록을 세우며 최종 합계 10언더파 206타를 기록한 박민지는 루키 김지윤을 1타 차로 제치고 우승 상금 1억 8000만 원의 주인공이 됐다.
이번 우승으로 박민지는 KLPGA 투어 역사상 고(故) 구옥희, 신지애에 이어 세 번째로 20승 클럽에 가입했다. 지난 2010년 신지애의 20승 달성 이후 무려 16년 만에 나온 대기록이다. 또한, 이번 우승 상금을 더해 생애 통산 상금 68억 원(68억 378만 5000원)을 돌파하는 이정표도 함께 세웠다.
우승 후 박민지는 "아직도 내가 20승을 달성했다는 게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우승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플레이했는데, 아이러니하게 20승이 찾아와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20승을 달성한 박민지. KLPGA 제공
화려한 대기록 이면에는 지난 2년간의 뼈아픈 부진과 냉철한 자기 객관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2024년 6월 셀트리온 퀸즈 마스터즈 우승 이후 박민지는 무려 47개 대회 동안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2017년 데뷔 이래 매년 승수를 쌓아오던 그에게 2025시즌의 '무승'은 낯선 결과였다.
박민지는 그동안 자신의 슬럼프 원인을 스스로의 '노력 부족'으로 규정했다. 그는 "솔직히 작년의 나를 돌아봤을 때 연습도 게을리했고 최선을 다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주변에서 '왜 못하냐, 어디 아프냐' 걱정도 해주셨는데, 사실 아픈 게 아니라 노력이 부족했던 거였다"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지난 시즌 중간까지 우승이 없을 땐 솔직히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그동안 꾸준히 나갔던) 대상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면서 체감했다. '이러다 정말 내년 시드를 잃고 시드순위전까지 가게 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이 들었다"라고 고백했다.
20승을 달성한 박민지. KLPGA 제공
이러한 위기감은 과거 전성기 시절의 '독기'를 다시 불러일으키는 기폭제가 됐다. 박민지는 그동안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뒤에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수동적인 태도로 경기에 임해왔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너무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듯 기다렸나'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대회엔 '내가 먼저 손을 뻗어 당겨와야겠다'라고 생각을 바꿨다. 주위에서 '예전의 독기 어린 눈빛이 돌아왔다'고 할 만큼 집중력 있게 경기했다"고 전했다.
마인드의 변화는 곧장 성적으로 직결됐다. 선두에 5타 뒤진 채 출발한 최종 라운드에서 박민지는 이전처럼 3~4언더파에 안주하지 않았다. 긴장감 없이 편안한 상태에서도 무조건 더 위로 치고 올라가겠다는 집념으로 타수를 줄여나갔고, 결국 2014년 같은 대회에서 배희경이 세웠던 코스 레코드 타이기록(64타)을 작성하며 대역전극을 완성했다.
20승을 달성한 박민지. KLPGA 제공
꿈에 그리던 20승. 마인드를 재정립한 박민지는 여기서 그칠 생각이 없다. 그는 "목표는 심플하다. 계속해서 우승을 추가하는 것"이라며 "사실 예전엔 20승을 하면 내 골프 인생의 큰 챕터 하나가 완전히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20승을 빨리 이루게 돼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야 할 시점인 것 같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이 위치와 기록에 어울리는 선수가 돼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선배이자 선수가 되고 싶다"라며 "우승을 갈망하며 지난 몇 주, 몇 달 동안 고민하고 다잡았던 이 마음가짐을 잊지 않고, 남은 시즌 동안 매 대회 집중력 있게 플레이하겠다"라고 다짐했다.